사랑과 여빈과 시간.
GQ ‘점심형 인간’이라 자신을 표현한 적이 있죠.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 사이 활동이 가장 컨디션에 적절하다고요. 여전한가요?
YB 요즘은 조금 일찍 눈이 떠지기 시작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점심형 인간이 맞는 것 같아요. 아침에 막 일어나면 되게 캄다운된 상태거든요. 그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두거나, 거실로 나가 리클라이너에 가만히 앉아 있어요.
GQ 매일의 루틴인가요?
YB 루틴이라고 하기에는 얼마 안 되었어요. 그런데 괜찮은 것 같아요. 왼편에서 해가 살짝, 아주 잔잔하게 들어와요. 지는 해가 잘 들어오는 집이라, 떠오르는 아침의 빛이 잔잔해요. 오늘 아침에도 그 빛이 참 좋았어요. 은은하게 많이 쏟아지더라고요. 그 빛을 보면서 느꼈어요. 오늘 우리의 만남을 축복해주는구나.
GQ 아름답네요. 그때가 몇 시쯤이었어요?
YB 6시 50분쯤이었어요.
GQ 지는 해가 잘 들어오는 집을 택한 이유가 있어요?
YB 해를 오래 보는 걸 좋아해요. 밤도 좋지만 해가 떠 있을 때가 너무 좋아요. 해가 떨어지는 하늘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그 빛이 주는 에너지가 제 안부를 물어주는 기분이 들어요. 그것이 저를 충만하게 만들어요.
GQ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지금, 오전 9시는 어떤 시간인 것 같아요?
YB 괜찮은 것 같아요. 정신이 약간 깨어있을 때 에두르지 않고 마음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아침에 생각할 수 있는 감수성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해가 한창 뜰 때, 떠 있을 때, 저물어갈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좋아해요.
GQ 밤에는 어때요?
YB 저녁에는 조금 모호해지는 것 같아요. 그 밤이 지나가는 게 아쉬워서 막연한 그리움도 더 붙고요. 밤에는 오히려 생각을 없애보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잘 없어지지는 않아요. 가령 회오리 유리병 안에 물이 담겨 있었어요. 색깔이 있는, 뭔가 섞여 있는 물, 이를테면 꿀물이라고 해볼게요. 막 휘저은 꿀물이 가라앉았을 때가 저녁의 모습인 것 같아요. 그때는 마음 속에 남은 앙금을 더 바라보려고 해요. 그런데 감수성이 깊어지는 시간이라 그것이 조금 어렵더라고요.
GQ 얼마 전, 밤에 SNS에 <멜로가 체질> 때의 사진을 올렸죠.
YB <멜로가 체질>이 마무리된 게 지금 같은 계절이었어요. 그래서 여름밤, 하면 ‘멜체’가 생각나요. 업로드한 사진은 누가 찍어주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주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조금 더운 날의 청담 거리에서 촬영하는데 우리는 긴소매의 옷을 입고 있었어요.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던 기억이 나요.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고,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봤어요.
GQ 무언가 가만히 지켜보는 상황을 좋아하나 봐요. <낙원의 밤>에서도 태구와 재연이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었죠.
YB (허공을 바라본다.) 나의 세계와, 나의 의지나 통제 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타인의 세계가 같이 공존하며, 시공간으로 흘러가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 흘러가는 순간을 바라보고, 느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GQ <너의 시간 속으로>가 곧 공개돼요. 원작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탐냈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여빈의 마음에 일렁임을 준 어떤 지점이 궁금해요.
YB 저는 운명을 믿는다면 믿는 편이고, 혹은 운명이 내 손 안에 있다면 그것 또한 믿는사람이에요. 내 의지가 운명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커다란 믿음 가운데서도, 어떤 인연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가족과의 관계는 완전한 운명이죠. 제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나의 행동, 내가 오늘을 선택하는 것, 존재에 대한 반응을 하는 건 제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선택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랑이든 운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GQ 낭만적인, 소녀의 마음처럼.
YB 그런 낭만이 아직까지는 있는 것 같아요. 대체 불가한, 만날 인연이라면 만나게 되는 그런 인연이 있다고 너무나 믿고 싶어요.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 집에서 오래전부터 좋아한 글귀가 있어요.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GQ 그리움에 대해 많이 생각해왔어요?
YB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뭘까···. 단지 이성이나 사랑에 국한되는 것일까? 대학 시절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적이 있어요. 인간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고,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알고는 있잖아요. 언젠가는 흐려질 것이라고, 혹은 영원할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아주 근원적인 마음이었어요. 나에게 강렬한 존재, 운명의 이끌림같은 필연이 <너의 시간 속으로> 안에 있으니까, 그 만남을 겪고 싶었어요. 겪고 싶고, 구체화하고 싶고,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GQ 감독이 주는 ‘떡밥’을 물고 상상을 펼치고 마인드맵을 그려 나가는 편이라고 했죠. 원작이 있는 작품을 연기하는 데서 오는 한계와 기쁨은 무엇이었어요?
YB 한계보다는 또 다른 빛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만드는 사람과 구성원이 다르니까, 전혀 새로운 색깔을 칠할 수 있겠다고요. 밑그림이 같아도 채우는 사람에 따라 색채도, 그림 풍도,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상도 달라지잖아요. 원작을 본 지 몇 년이 지나서 제 안에 어떤 감상만이 남은 상태였는데, 일부러 원작을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다만 우리가 이 현장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다시 잘 쌓아 나가보자고 다짐했죠.
GQ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에 풍덩 뛰어들면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보기도 할 것 같아요. 여빈은 사랑하면 어떤 사람이 돼요? 어떻게 변화해요?
YB 사랑 속에서 때로는 엄청 솔직하고, 때로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주저없이 달려나가다가도 마구 망설이기도 해요. 사랑에 있어서는 늘 서툴었던 것 같아요. 관계란 우리에게 처음 발생하는 것이니까 서툰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한 뒤론 조금 위안이 돼요. (잠시 침묵) 좋은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요. 좋은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기자님은 좋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GQ 얼마 전에 제 마음에 훅 들어온 말이 있어요.“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_<나란 무엇인가>
YB 아주 맞는 것 같아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말을 좋아해요.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는데 완전한 오해였다,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며 뜬눈으로 밤을 샜던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그땐 해가 엄청 쏟아지는 남향집에 살았는데, 그 빛이 파노라마처럼 선명해요. 타임슬립처럼 영원히 제 기억 안에서 지워질 수 없는 그 무엇보다 영화적인 장면이에요.
GQ 지금은 어떤 사랑을 좋은 사랑이라 부르고 싶어요?
YB 찾아가고 있어요. 알고 싶고, 그걸 알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GQ 사랑에 대해 많이 말하고,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YB 사랑은, 인간에게 아주 필수적인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당신의 오늘이 어땠는지 묻는 것이, 듣고 싶고 궁금해서잖아요. 그런 호기심 자체가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것이 되게 값지다고 생각해요. 인생 자체가 혼자 살아갈 수가 없는 거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장성한 어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랑 없이는 두 발로 서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요. 두 발로 서 있다고 인지하고 있는 지금조차도 다른 존재없이는 온전히 서 있을 수 없고요. 그래서 명사로 말하면 사랑이지만 결국은 인간, 그리고 인생일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할 것 같고, 할머니가 되더라도 탐구하고 싶고, 알아가고 싶어요. 우리의 관계란 뭘까, 사람은 뭘까, 우리가 같이 살아간다는 게 뭘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무언가가 될 수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손잡고 걸을 수 있을까, 네가 주저앉았을 때 난 너를 어떻게 안아줄 수 있을까, 내가 무너졌을 때 내 손 좀 잡아달라고, 일으켜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여빈의 코끝이 빨갛게 익는다.) 계속, 계속 마음을 투과하고 싶어요. 이것을 못 느끼면 산다는 것 자체가 메마른 땅이 될 것 같아요. 그 땅을 촉촉하게 만들어 그 땅 위에서 좋은 결실을 가꾸고 싶어요. 또 있을 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한 번뿐일 거라고 믿는 삶이라는 축제를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또는 부자연스럽게, 또 어떤 때는 애를 쓰고, 어떤 때는 받아 들이면서 제 속도에 맞게 노력하고 싶어요. 노력이 곧 사랑인 것 같아요.
GQ 결국, 노력을 놓지 말아야겠군요.
YB 그런데 사람이니까, 노력이 나를 너무 갉아먹으면 잠깐 내려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기만하지 않고 자신을 인지하는 것, 버거워지는 날에는 내려놓을 수 있게 힘을 빼보는 것, 그 모든 과정이 유기적인 것 같아요.
GQ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이 결국은 여빈을 연기라는 일로 데려다 준 걸까, 라는 생각이 문득 스치네요.
YB 맞아요.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이,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다가가고 싶다 보니 연기라는 것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일을 하면서는 막연하게 꿈꿨던 것보다 더 멋지고 황홀한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퍼진 파동이 시청자분들, 관객분들, 팬분들에게 닿아 다시 나에게 피드백으로 돌아왔을 때, 살아있는 동안 어떤 아름다운 일을 노력하면서 만들어내고 있구나, 이 순간이 헛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하게 돼요. 매 순간이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만약 그 확률의 횟수가 1천 번 중 한 번이라고 해도, 그 경험이 저에게 강렬하고 제 속 아주 깊숙이 들어온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그 한 번이 나머지 999번의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