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박서보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뉴스를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고인의 그림을 보며 사색에 잠긴 적이 많았기에 슬픔이 더 크게 밀려왔다. 1931년에 태어난 고인은 한국 추상미술과 단색화 분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국내 추상 미술 운동을 이끌었고, 1960년대부터는 끊임없이 한 가지 색으로 선을 긋는 ‘묘법(Ecriture)’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묘법은 캔버스에 흰 유화물감을 바른 후 국어 공책의 방안지를 모방한 네모 칸을 연필 긋기로 채우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박 화백은 “다섯 살 둘째 아들이 형의 국어 공책을 펼쳐 두고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묘법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초기 묘법 시리즈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며 묘법이 조금 달라졌다. 박 화백이 한지의 물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부터다. 초기 묘법과 동일하게 연필로 선을 긋는 방식이지만, 한지가 갖는 흡수성으로 인해 안료는 한지 속으로 스며들고, 여기에 박 화백의 반복적 행위가 개입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자연색을 끌어들인 유채색 작업으로 변화를 거듭해 왔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의 작품은 2015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서 열린 ‘단색화’전이 해외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작품값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마가 찾아왔다. 박 화백은 올해 2월 SNS를 통해 폐암 3기 진단 사실을 스스로 밝혔다. 그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아흔을 넘어선 나이에도 작업을 계속했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작품을 생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를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고 했다. 그의 SNS를 보면 최근까지 지방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재단 관계자는 “그래서 너무 갑작스러운 운명”이라고 했다. 고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제주도 서귀포시 JW메리어트호텔 부지에 지어지고 있다. 내년 여름쯤 완공될 예정이다. 박 화백은 생전 인터뷰에서 “미술관에 오는 분들이 내 작품을 보고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다 풀고 치유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인의 바람처럼 많은 이들이 다녀가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