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을 자꾸 맞다 보면 타격을 피할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다만 다음 재난은 뺨을 치는 수준이 아니다.
조서형 매거진<1.5˚C> 에디터
“원래 여름이 이랬나? 도저히 못 뛰겠는데?” 내가 속한 축구팀은 올해 8월 한 달간 여름방학을 갖기로 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겨울이면 연신 흐르는 코를 장갑으로 훔쳐가며, 여름이면 땀을 주룩주룩 쏟아가며 공을 찼는데. 우리가 약해진 걸까, 날이 더워진 걸까. 일단은 날이 더워진 게 맞다. 2023년 여름은 폭염 일수가 평년보다 약 4일 많았다. 지난 30년간 평균 9.8일에 그치던 폭염이 13.9일로 는 것이다. 열대야는 평년 5.1일보다 두 배 많았다. 전국 평균 기온 역시 24.7도로 평년 23.7도보다 1도 높았다. 강우량도 늘었고 비가 내리는 날도 더 많았다. 얼굴을 몇 차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여름이 겨우 끝났다. 지내고 보니 축구팀 멤버들이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게 아니라 날씨가 실시간으로 고약해지고 있었다. 휴대 전화를 울리는 폭염, 폭우 등 재난 문자가 갈수록 잦아진다. 올해 초 튀르키예에는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했다. 텍사스에서는 테니스공만 한 우박이 내렸고 하와이에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났다. 이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 수준을 벗어났다. 명백한 재난이다. 이솝 우화 속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온난함이 아니라 몇 년 안에 우리 모두 죽게 된다는 통보다.
이대로 가만히 죽는 수밖에 없을까? 기후에 맞춰 인류가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선조들 역시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지구 위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으니까. 계속 두들겨 맞다 보면 타격을 피할 방법을 터득하는 법이다. 올여름 발매된 생물학자 소어 핸슨의 책 <허리케인 도마뱀과 플라스틱 오징어>에는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기후 위기 시대의 생물들이 등장한다. 따뜻한 날씨에 속아 일찍 겨울잠에서 깬 벌은 아직 피지 않은 봄꽃을 억지로 깨운다. 식물의 잎에 구멍을 내가며 다그치는 통에 개화기가 한 달씩 앞당겨지기도 한다. 알래스카의 곰은 다른 때보다 빨리 익어버린 엘더베리를 먹기 위해 연어를 포기하고 숲으로 향한다. 뭐든 먹어 치우는 것으로 알려진 잡식성 곰이 한순간에 채식 중에서도 과일만 먹는 동물이 된 것이다. 큰가시고기 수컷은 붉은 배와 파란 눈을 가지고 빠르게 지그재그로 수영한다. 그렇게 암컷의 주의를 끌어 짝짓기에 성공한다. 기후 위기로 바다가 따뜻해지고 조류가 빨리 자라자 물속 시야가 탁해졌다. 암컷 큰가시고기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수컷 큰가시고기는 옷을 차려입고 춤을 추는 일을 멈췄다. 치장에 쓰던 에너지를 생존에만 쏟게 되었다. 자연의 맵싸한 손바닥으로 뺨을 맞은 인간들은 어떻게 했을까? 동물과 달리 인간의 뇌는 이상한 낙관주의를 발휘했다.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애써 아픔을 무시했다. ‘과학자와 기업, 국가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올 거야. 어떻게 되겠지!’ 정보는 이미 지천으로 널렸다. 많은 과학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기후 변화 이론을 연구해온 게 벌써 2백 년이 되어간다. 축적된 자료는 확실하게 하나의 결론을 말한다. 위기 상황을 피하고 변화를 막는 것은 불가능. 인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문턱을 넘었고 기후 위기를 예방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잠깐, 죽상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죽기 전까진 죽은 게 아니다. 세상은 끝장날거고 그건 몹시 슬픈 일이지만, 이대로 멀뚱히 서 있을 수는 없다. 8월 30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윤순진 교수가 출연했다. 그는 여러 자료를 기반으로 당장 탄소 배출량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지 않는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알렸다. 얘기를 들은 유재석은 탄식을, 조세호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두 엠시의 표정을 본 윤순진 교수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근데 한숨 쉬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잖아요. CO2만 배출할 뿐이지.”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익숙한 세계의 문을 닫아버렸다. 기후 위기를 예방하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멸종을 앞두고 체념하거나 궁극의 기술로 구원받을 생각은 그만두자.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냉철함과 용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새로운 문이 열린다고들 한다. 어떤 일의 막바지는 새로운 일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지금과 아주 다른 미래에 살게 될 것이다. 인간의 과제는 변화를 헤쳐나갈 방법을 생각해내고 최선을 다해 최악의 미래를 피하는 일이다. 작가 이슬아가 운영하는 헤엄출판사에서 출간한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에는 기후 위기를 대하기에 알맞은 태도가 소개되어 있다. 저자 로르 누알라는 국제적 상호 협조 활동 모임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기도문을 언급한다. 전 세계 180개국에서 모임을 시작하기 전 공통으로 읽는 내용은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의 ‘평온을 비는 기도’로 다음과 같다.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을 감내하는 힘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중독을 끊어내야 하는 사람들은 기도문을 읽으며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일은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일엔 노력을 쏟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누리던 편의와 안락함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하는 우리 역시 포기와 수용을 알아야 한다.
위기는 기회다. 기후 위기도 기회다. 절멸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인류에게는 다시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재난을 스승으로 모시기에는 확실히 수업료가 너무 비싸다. 어쨌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얼마라도 빨리 위기를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에 마음을 여는 것이 관건이다. 기후 위기 문제의 어려움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데 있다. 탄소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어 느낄 수 없다. 서울대학교 정수종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서울의 탄소 배출을 쫓는 연구자다. 그는 중요한 탄소 순환 연구보다 미세먼지를 가르치는 교수가 더 많다고 말한다. “미세 먼지는 입자가 커요. 하늘을 뿌옇게 만들고 목에 걸리죠. 즉각적으로 와 닿는 문제이기 때문에 서울대에만도 10명이 넘는 교수가 미세먼지를 연구해요.” 기후 위기를 가만히 느낄 수 없다면 찾아서라도 그 흐름을 알아야 한다. 기후 위기를 말하는 자료에 관심을 가진다. 논문이 어렵다면 강연이나 책, 잡지, 유튜브 영상도 좋다. 위험을 감지했다면 그다음엔 들어본 모든 해결책을 실시한다. 모든 게 지금과 같길 바란다면 모든 걸 바꿔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천천히 적응하며 바꿔나가고 오늘은 어려우니 다음 번에 실천할 여유는 없다. 최선을 다해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한다. 알려진 지식과 정보를 통하면 이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무엇에 맞서 어디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지 결정한다. 이는 내가 어떻게 죽고 싶은지 결정하는 과정과도 같다. 옛날엔 잘 죽는 일을 오복의 하나로 여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참혹한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그나마 단정하고 품위를 지키며 마무리하길 원한다면 지금 행동하고 실천해야 맞다. <유퀴즈>에서 윤순진 교수는 스스로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밀어내지 말자고 했다. 최후에 기회가 내게 주어졌고,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자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오늘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문제를 심각하게 성찰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기후 행동을 넓히고 늘려 나간다면 마주해야 할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폭염과 혹한은 계절마다 계속될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 축구팀은 실내에서 풋살을 하거나 올해처럼 방학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의 바람은 어찌 되었든 지금의 축구팀 친구들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공을 차는 것이다. 이 칼럼이 한 명의 마음이라도 더 흔들어 우리가 무사히 이번 세기에 노인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