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새롭게. 거듭 피는 지창욱.
GQ <최악의 악> 2회까지 보고 든 고민. 얼른 다음 시리즈가 열리길 기다릴 것인가, 아예 참았다 몰아서 볼 것인가.
CW 쉽지 않네요. 뭐가 됐든 즐겁게만 봐 주세요. 많이들 재밌다고 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GQ 요즘 엄청 바쁘다고요. 지금 하고 있는 작품만도 서너 개 되죠?
CW 뮤지컬 <그날들>, 영화 <리볼버>는 막 끝났어요. 지금은 제주도에서 <웰컴투 삼달리>라는 JTBC 새 드라마 촬영하고 있고요. 동시에 <우씨왕후>라는 드라마도 찍고 있어요.
GQ 바쁜 거 맞네요.
CW 저도 이렇게까지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영화 <리볼버>나 드라마 <우씨왕후>는 욕심이 나서, 무리한 스케줄인 거 뻔히 아는데도 하자고 했어요.
GQ 원하는 작품이라면 내 몸이 부서져도 기꺼이.
CW 겁을 내지는 않는 것 같아요. 또 요즘 새로운 모습들도 좀 찾고 싶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GQ 이전의 모습들이 대체로 비슷한 것 같아서요?
CW 글쎄요. 그간에 보지 못했던 내 표정이나 말투,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들을 새롭게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때 오는 즐거움이 크더라고요. 그 뒤로 ‘아, 이거 계속 좀 찾아봐야겠다’ 싶었고요.
GQ 그렇게 발견되는 모습들은 얼마큼 반갑던가요?
CW 너무요. 그냥 재밌어요. 놀라움도 있고요.
GQ 그럼 지금 이렇게 새로 발견되는 모습들로 과거의 작품들을 다시 해본다면 어떨 것 같아요? 이를테면 <기황후>의 타환이라든지, <무사 백동수>의 백동수라든지.
CW 음, 그런데 저는 왜인지 그때보다 더 못 할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얼마 전에도 뮤지컬 <그날들> 10주년 기념 공연을 했거든요? 꼭 10년 만에 같은 역할로 무대에 서게 된 건데, 개인적으로는 ‘예전이 훨씬 좋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이건 오로지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물론 연기가 전에 비해 별로였다는 건 아녜요. 느낌이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당시의 풋풋함이나 처음이 주는 감정들은 쉽게 넘을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지나고 보면 결국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한 기억이고, 경험인 것 같아요.
GQ 어때요, <최악의 악>에서도 지창욱의 새로운 모습들을 좀 발견했나요?
CW 물론요. ‘박준모’를 연기하면서도, 작품의 무드나 스토리, 완성도를 따라가면서도 ‘새롭다’라는 느낌은 정말 자주 받았어요.
GQ 왜 물었냐면, <최악의 악>이 가진 언더커버라는 장치. 또 거기에 누아르라는 장르는 어쩌면 이제는 좀 뻔해 보일 수 있는, 공식 같은 구성이잖아요. 그렇다면 배우는 과연 여기에서 어떤 새로움을 보았는지 궁금했어요.
CW 맞아요. 저도 그런 염려는 있었어요. 누아르 속 언더커버라는 스토리가 상대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기시감을 더 불러오지 않겠나, 하는 걱정들, 고민들. 그럼 우리 작품이 가져갈 수 있는 새로움은 뭘까?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됐고요.
GQ 어떤 답이 보이던가요?
CW 차별점요. 기존의 언더커버물, 누아르라는 장르와는 달리 보일 수 있는 차별점들이 곳곳에 존재해 있어요. 시나리오 속에서 그런 차별점들을 하나둘 발견하면서 확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충분히 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는 확신.
GQ <최악의 악>을 본 이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살피기엔 ‘댓글’만 한 게 없죠. 대부분의 댓글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언더커버는 뻔해서 안 보려고 했는데, 안 봤으면 큰일 날 뻔” 같은.
CW 감사하죠. 그런데 뻔한 소재는 어느 장르에서든 대입하고,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슷한 구성을 어떻게 달리 만드느냐, 얼마큼 더 새롭게 표현하느냐 이 차이인데, 맞아요, 이 차이를 두는 게 쉽지는 않죠.
GQ 좀 더 묻겠습니다. 그럼 창욱 씨가 느낀 <최악의 악>이 다른 점은 어떤 걸까요?
CW 우선 누아르라는 장르만 두고 봤을 때, 작품이 젊다는 거.
GQ 젊다는 건 작품의 배경이 그럴 수도, 출연 배우의 구성이 그럴 수도 있겠고요.
CW 맞아요. 작품 속 ‘강남연합’이라는 조직도 이전의 누아르에서 보던 조직폭력배, 깡패와는 또 다른 색이고요. 그래서 ‘강남연합’은 그동안 봐오던 익숙한 모습의 조폭들과는 좀 달라요. 노란색으로 탈색한 친구들도 곳곳에 배치해놓고, 조직원들의 스타일도 좀 독특하고, 세요. 검은색 수트가 아니고요.
GQ 그간의 누아르와는 작품의 장치 면에서 다르다?
CW 네. 무채색 느낌의 누아르와는 좀 다르다. 조명, 미술을 포함한 장치들도 굉장히 화려하고요.
GQ 연기한 ‘박준모’는 매회 감정선이 요동쳐요.
CW 맞아요. 그래서 그런 감정선을 잘 표현하려고 인물의 빌드업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어요. 여러 감정이 엉켜 있는 인물이니, ‘준모’가 많은 이야기를 설명하기보다 보여줘야만 하는 것들,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들에 더 집중하기로 했죠. ‘준모’의 뒤틀리는 상황들, 무너져 내리는 모습들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GQ ‘준모’의 몰입을 위해 덜어낸 것과 살린 것은 각각 뭘까요?
CW 덜어내다 보면 남는 게 분명해지더라고요. ‘준모’의 경우에는 경찰로서의 사명, 정의감 같은 감정들은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도덕적인 잣대는 모든 상황이 엉켜 있는 이 친구한테 어쩌면 불필요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명감, 정의감, 도적적인 사고, 도덕적인 판단, 이런 것들을 전부 빼니까 남는 건 결국 본능이더라고요. 선한 감정들을 들어낸 자리에 본능적인 욕망, 이기심, 갈등, 이런 번뜩이는 감정들로 채웠어요. 이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GQ 판타지가 아닌 이상 캐릭터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어야 맞죠.
CW 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준모’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솔직한 감정들, 날것에 가까운 욕심들을 들여다보면 이건 결국 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나.
GQ ‘박준모’를 투명하게 이해했군요.
CW 네, 극적인 건 작품이, 장르가, 영화적인 장치가 이미 잘 보여주고 있으니, 캐릭터는 좀 더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GQ 호평이 쏟아지는 이유가 분명 있었네요. 주변에서 전해온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거 있어요?
CW 지훈이 형. 주지훈 형이 이런 말을 해줬어요. <최악의 악>, 딱 세 명만 더 봤으면 좋겠다고.
GQ 오호.
CW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한 명이라도 더 봐 준다면 너무 좋잖아요. 감사하죠.
GQ 지금 돌아보면 촬영하던 때가 어떻게 기억될까요?
CW 저는 잊고 있었어요. 내가 촬영장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GQ 그간 바빠서 잊고 있었나요?
CW 아뇨. 제가 촬영하면서 정말 힘들어했거든요. 그런데 또 너무 즐겁게 일하기도 했어요. 감독님, 함께한 스태프, 배우들 모두 너무 친해졌어요. 아직도 단톡방이 시끌시끌해요. 일단 너무 즐거워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러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 정말 힘들었어요. (혼잣말) 맞아. 와, 나 진짜 힘들었어.
GQ 어디서 들었어요. 사람은 나쁜 기억은 빨리 잊는다고.
CW (웃음) 맞는 것 같아요. 저 나름대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정말 치열하게 노력했거든요. 감독님하고도 수없이 얘기하고,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그랬는데, 잊었어. 그사이에 그걸 싹 잊어버렸어···.
GQ 그럼 작품은 어떻게 기억되는 것 같아요?
CW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하게?
GQ 네, 솔직하게.
CW 제목이 너무 거창하지 않나.(웃음)
GQ 어느덧 15년 차죠. 배우로서 요즘 느끼는 가장 큰 변화라면요?
CW 태도나 사고의 변화는 정말 없는 것 같아요. 변화라면 책임감의 모습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예전에는 작품을 잘하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거나 무얼 배운다거나 했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 더 가까워요. 사실 그때도 아등바등했고, 지금도 여전히 아등바등하고 있거든요. 나이를 먹고 경험치가 더 생겼다고 해서 편해지는 거,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연기에 있어서는 더 그렇고요. 연기는 여전히 어렵고, 아직도 모르겠어요.
GQ 지창욱은 욕심이 많은 배우인가요?
CW 배우로서의 욕심,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배우라면 다 가지고 있는 숙명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저요? 저도 욕심 많죠. 여전히 욕심나고, 아직도 더 보여주고 싶고 증명하고 싶고 그래요. 다만 늘 경계하면서요. 내 욕심이 작품에 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분명 있고요.
GQ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라면요? 그게 배우로서든, 사람 지창욱으로서든.
CW 경험에서 오는 아주, 아주 작은 여유? 그거 말고는 없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