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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된 술

2023.11.14전희란

술은 언제나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먼 거리의 것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해왔다. 술에 문화와 맥락과 말이 담기는 이유다.

글 / 양유미 (이쁜꽃 양조장 대표)

“어이, 김 대리. 건배사 한번 하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젊은 사원들에게 건배사를 권하는 짓궂은 문화가 있었다.(아직도 있나요?) 회사원들은 윗분들이 좋아할 만한 멘트를 메모장에 적어두고 외웠다. 그렇다고 너무 잘하면 매번 하게 되니 적당히 상투적인 건배사를 고르는 것이 핵심. 인터넷에 건배사를 검색해보면 나오는 3행시들이 단물이 다 빠진 인상을 주는 이유다. 도대체 건배가 뭐길래.

건배는 마를 건 乾에 잔 배 杯 자를 쓴다. 일본에서는 칸파이를 외치고, 중국에서는 간베이를 부르짖는다. 속설에 따르면 중세 시대의 건배는 강하게 잔을 부딪치는 행위를 통해 서로의 술이 섞이도록 해서 독을 탔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독살이 걱정되는 상황에서도 잔이 마르도록 술을 비웠다니. 목숨을 걸고 마셔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술과 생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위스키 Whiskey의 어원이 생명의 물이라는 것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일컫는 말인 오드비 Eau De Vie 또한 생명의 물을 뜻한다. 동양권에서는 주백약지장 酒百藥之長, 즉 술은 백약 중 으뜸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한발 더 나아가 예수의 주요 기적 중 하나는 물을 술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술을 권하며 이런 건배사를 남겼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잔이다.” 이 말을 듣고, “아, 제가 오늘은 컨디션이 좀 좋지 않아서···.”라고 사양할 제자들은 없었을 터. 예수님은 의외로 노련하게 술을 강권하는 타입의 상사였을지도 모르겠다.

건배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불경한 상상에까지 이른 것은 음주는 꽤나 리소스의 소모가 큰 행위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려면 돈과 시간, 감정과 다음 날의 체력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국민건강보험에 따르면 의료비와 생산성 손실액 등 음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2019년 기준으로 15조원에 달한다. 2022년 주류 시장 규모가 약 9조원이니, 단순 계산해보자면 사회적으로 술은 득보다 실이 많다. 주류 라벨에 적힌 “지나친 음주는 치명적인 질병과 사고를 초래합니다”라는 엄중한 문구를 읽으면, ‘생명의 물’이 아닌 ‘죽음의 물’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인류는 유사 이래 중요한 순간마다 술과 함께해왔다. 결혼과 장례 같은 삶의 통과 의례에 술잔을 기울이고, 귀빈이 오면 그에 걸맞은 귀한 술을 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전쟁을 치르기 전에, 또 승리한 후에 다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신과 하늘에 술을 바쳤다. 술은 단순한 식품을 넘어 인류에게 문화로서 존재한다.

양조를 하기 위해서는 농경생활과 잉여 농산물의 발생이 선행되어야 한다. 발효는 식량을 오랫동안 저장하기 위해 찾은 다양한 방법 중 하나다. 발효과학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 일이나, 과실과 곡물이 술이 되는 기초 원리를 터득한 인류는 9,000년 전부터 술을 빚어왔다. 술은 허드렛일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다. 농산물을 다듬고, 술이 잘 만들어지는 공간을 찾고(당시엔 효모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발효조를 만들고, 세척과 청소를 하고,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고, 유통하기 위해 각 단계별로 적지 않은 인력이 투입됐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양조 행위는 문명을 만들기 시작한 인류에게 일자리와 유대감을 부여해 사회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문화의 요소에는 기술, 언어, 상징, 예술, 가치, 규범, 이 5가지가 있다. 현대에 이르러 술은 향정신성 물질로 분류되며 가치가 모호해졌지만, 인류에게 술이 가졌던 가치의 본질은 ‘매개체’로서의 기능이었다.

술은 사람과 사람, 시대와 시대, 그리고 문화와 문화를 연결한다. 과거에는 공동체가 양조를 함께하며 생산 과정에서도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현대의 고도화된 분업의 결과로 제품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분리됐다. 이제 사람들은 오직 ‘마시면서’ 연결된다. 술의 리추얼은 다양한 ‘음주’ 리추얼로 대체됐다. 한국의 경우에는 집단 음주가 그랬다. 회식이라는 제의에서 소주와 맥주를 그 공동체만의 레시피로 섞어 한 번에 입에 털어 넣는다. 이 리추얼을 통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오직 성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건배사는 이 퍼포먼스의 잔재다. 우리가 하나됨을 위한 거룩한 기도 의식. 2017년, 국민 소득이 3만 불을 넘어서며 사람들은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에 눈을 떴다. 그리고 이때 홈술, 혼술 키워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집단 음주 문화가 사적 음주 문화로 전환되는 서막이었다.

COVID19가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2019년 주류 시장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주류 음용 상대의 변화가 드라마틱하다. 동성 친구(17.9퍼센트)나 회사 동료(16.6퍼센트)와 친목을 다지기 위해 마셨던 술을, 혼자서(38.9퍼센트) 마시기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음주 상황이 변했다고 응답한 이들은 73.7퍼센트에 달한다. 동시에 건배사도 슬쩍 자취를 감추고 있다. 시류가 이러하다 보니 기업의 중역들도 신입사원에게 건배사를 강요하기는커녕 술자리를 제안하기도 어려워졌다. 통행시간 제한을 통해 사람들은 회식이 없는 삶, 저녁이 있는 삶에 익숙해졌다. 퇴근 후 음주 행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순간이어야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게 됐다. 홈술, 혼술은 이제 키워드가 아니라 문화다.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주류 시장의 성장률은 지난 5년간 0퍼센트에 가깝지만, 다양성을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 2019년부터 2024년 까지 전 세계 무알코올 음료 시장은 연평균 23퍼센트로 성장이 예상되고, 한국의 경우 긴 시간 성장이 정체되었던 프리미엄 위스키와 전통주가 급성장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다소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고가의 술이더라도,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공부하고 나의 취향에 맞는 술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득템한 술을 부장님과 회식 자리에서 먹을 수는 없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혹은 더욱 소중한 나 자신과 함께, 즉 혼자 마신다. 회식처럼 혼술의 리추얼에도 대략적인 문법이 있다. 주로 집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인테리어가 중요하다. 조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은은한 조명 혹은 촛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듣고 싶었던 음악. 혼자 집에 있는 날, 혼술할 생각에 들떠 이 모든 것을 차례로 준비하다 보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 이거 진짜 리추얼 같네. 뭔가 소환될 것만 같아.’

For Me, Meconomy, That’s me, Love myself. 소비 트렌드 키워드는 오직 나다. 사람들은 이제 소비를 통해 철학하고, 신념한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사이트를 제시하는 바이브 컴퍼니 부사장 송길영은 “핵개인”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그는 핵개인은 온전히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 삶의 의사 결정권을 본인이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한대의 책임과 마주한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되어야만 한다. 개인에게 주어진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기회를 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혹하다. 유튜버 과나의 노래,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 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다들 자기가 누구인지 아나 봐,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데 그대로의 나는 아무도 안 좋아할 거잖아”. 다시 술로 돌아가자면, 술은 언제나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먼 거리의 것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해왔다. 혼술이 주요 문화로 자리 잡은 지금, 어쩌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7년째 술을 빚어오면서, 술은 한 사회를 더도 덜도 없이 반영한다는 걸 배웠다. 3년 전 독립해 양조장을 만들면서 우리가 만들 술에 깃들어야 할 핵심 가치 3가지를 ‘Love, Faith, Fantasy’로 정했다. 사회가 개인으로 파편화되는 시대에 가장 나다운 음주 생활을 가이드하는 도구를 만든다는 소명의식을 담았다. 건강한 ‘나’로서 있어야,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동안 우리는 다소 고독한 시대를 지나게 될지 모르지만 사랑, 믿음, 환상을 매개체로 마침내 연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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