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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국내외 영화제 육성’ 예산이 50퍼센트 삭감된다

2023.11.15김은희

사라지는 절반과 남을 절반, 이 미치광이 같은 사랑에 대하여.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제 지원 예산이 50퍼센트 수준으로 감액될 것이라고 한다. 국내와 국제영화제 지원이 기존 40여 개에서 20여 개 수준으로 축소될 예정이라는 것. 이 소식에 뜬금없이 한 문장이 떠올랐다. 예전에 단편영화를 찍은 후 국제 우편물 겉면에 수없이 적어왔던 문구다. “상업적 가치 없음, 오직 문화적 목적으로만 사용됨.” 관세에서 자유롭기 위해 기록하던 우편용 문장이 묘한 위로를 건넨다. 영화제가 지닌 험블한 매력을 너무 오래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지난 9월 13일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정동진독립영화제 등 국내 개최 영화제들이 연대를 맺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화제 지원 예산 삭감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이었다. 이 상황은 언뜻 극장의 관객수 감소에 따른 나비효과처럼 느껴지지만, 세수가 줄어든 현재의 상황에서 발생한 피치 못할 반작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산 50퍼센트 삭감. 무시무시한 숫자만큼 큰 영향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라지는 절반과 남을 절반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1955년 칸 영화제를 방문한 후 ‘하나의 등급으로 간주되는 영화제에 관해서’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당시 축제에는 예술영화가 대거 초대됐는데, 당연히 일반 관객이 보기에는 난해한 작품들이었다. 평론가들이 해석했고, 이 진지한 현상이 바쟁이 보기에는 아이러니했던 것 같다. 이 풍경을 종교에 빗대 그는 영화제 조직위를 “신학 연구생”, 영화제를 “의례의 장소”로 칭했다. 이 비유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상황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설립 초기에 시네마테크가 지닌 별명은 ‘대성당’이었다. 매주 사람들이 모였고, 비평가들은 영화를 설교했다. 이러한 바쟁의 유머는 일종의 사회학적 관점에서 영화제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영화제란 행사는 그 자체로 종료되지 않고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영적 능력에 필적하는 기능을 분명 지니고 있다.

<배드 럭 뱅잉>(2022)

같은 작품이라도 영화제에서 본 느낌과 일반 개봉의 감상은 조금씩 다르다. 그랑프리 수상작이라고 해서 반드시 평단의 좋은 평가를 얻는 것도 아니다. 작년에 개봉한 <배드 럭 뱅잉>(2022)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 영화는 2021년 영화제 순회 당시 전 세계 시네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개봉 이후에는 그다지 좋은 별점을 얻지 못했다. 너무 난삽하고 직설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했다. 확실히 영화제는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 에드가 모랭의 언급처럼 “영화제의 진정한 스펙터클은 영화관 내부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외부에서 열리는 것”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2021년 발표된 영화제연구네트워크(FFRN)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 존재하는 영화제의 수는 8천 개 이상이다. 칸과 베를린, 베니스 이외에 수많은 이름 모를 영화제가 존재한다. 그들 영화제의 60퍼센트 이상은 지난 20년간 발생했다. 그리고 그 증가 비율의 절반 이상이 최근 10년간 생겨났다. 혹자는 영화제의 난립으로 수상 가치가 훼손된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이 역시 전 세계적 현상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 영상 촬영의 디지털화는 영화 제작의 일반화를 부추겼다. 영화 제작 편수가 늘어나며 작품을 소개할 쇼케이스가 부족하단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니 영화제가 다양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들은 창의적인 제스처를 발견하길 원하고, 재능 있는 제작물은 자신들의 능력을 전시하길 원한다. 사실 영화제는 여타 문화 행사와 구분되는 특수한 이벤트다. 일단 방문객의 참여도가 월등하게 높다. 소위 ‘독립영화제, 단편영화제, LGBT 영화제’ 등 특수한 꼬리표가 붙은 행사들이 흥행하는 것은 관객 스펙트럼이 넓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문화 예술 전체에서 아마추어리즘이 가장 성행하는 분야가 바로 필름 페스티벌이다. 비견컨대 뮤직 페스티벌의 경우 비전문가의 참여 이벤트에서 이처럼 높은 호응을 끌어내긴 어렵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축제는 명예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지만 영화제는 다르다.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에서 어느새 대체 배급 시스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상업적 기능이 아니라 영화제가 주는 문화 교류의 기능 자체가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영화제의 비용은 비가시적이다. 이 점이 영화제가 가진 경제성의 한계다. 영화제의 문화적인 성과는 널리 알려졌지만, 경제 효과로 환산되기는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 영화제는 대부분 공공 보조금으로 운영된다. 해외의 거대 영화제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칸 영화제의 경우 예산의 절반 정도를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가 지원한다. 그다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칸시의 보조금이다. 그 내용은 대개 행사 기간에 발생하는 경제적인 영향으로 상쇄되고 있다. 요컨대 영화제는 영리사업이 아니다. 다만 부가적인 가치를 생성하며 성장하는 매개가 될 수는 있다. 그리고 영화제가 배출하는 또 다른 부가가치가 있다. 바로 인적 자원이다. <잠>(2023)의 유재선 감독, <다음 소희>(2023)의 정주리 감독, 넷플릭스 시리즈의 한준희 감독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단편영화제나 독립영화제 출신 연기자나 감독들은 영화제가 배출하는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아쉽게도 경제적인 측량은 이 역시도 곤란하다.

클레르몽 페랑에 본사를 둔 지역 언론사 <라 몽타뉴>는 2019년에 흥미로운 기사를 내놓았다. 지역의 대표 영화제인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의 경제적인 영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사의 부제는 ‘1천1백만 유로의 경제적 이익’이었다. ESC 클레르몽 그룹의 연구에 따르면 보조금 1유로는 무려 22유로의 경제 효과로 되돌아온다. 물론 이 계산 방식은 상당히 포괄적이다.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의 의류 판매량, 주변 신발 매장의 판매 상승률 등이 포함된 수치다. 너무 광범위하다며 한숨 쉬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제가 지니는 진짜 가치이기 때문이다.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의 경우는 그나마 그 결과를 가시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쓴 드문 사례에 속한다. 흡사 종교 단체의 과세가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되듯, 영화제의 효용 또한 눈에 띄지 않기에 더 논쟁적이다. 페스티벌 디렉터 로랑 크루제의 말을 빌리면, “비용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 Richesse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역할이다. 우리나라 영화진흥위원회의 구조화된 지원 정책은 프랑스의 지원 모델과 매우 흡사하다. CNC의 지원 정책은 영화제 운영을 마커 삼아 나머지 정책들을 순환시킨다. 영화는 다양해야 하고, 그들이 제작 지원한 작품들은 광범위하게 드러나야만 한다. 간혹 영화제에서만 소비되는 영화들이 있지만 이 역시 성과의 일부다. “칸 스타일의 영화”나 “선댄스 스타일의 작품”은 결코 모욕적인 평가가 아니다. 문화적인 여유를 유통시키며 프랑스는 침착하게 비용의 회수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기는 어렵다. 완벽하게 머리를 장식한 신인 배우들의 행렬, 화려한 드레스를 장착한 스타들의 모습, 승자의 이름이 새겨진 황금빛 트로피의 문양은 잠시 기억 속에 접어두어야 할 것 같다. 큰 영화제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50:50의 확률로 그들은 변신하고 생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난 세기 세대를 초월하고 전쟁을 통과한 시네필의 영향력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의 깊은 연대는 영화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왜 영화관에 가는가, 그리고 왜 영화제를 찾는가. 시네마가 스스로 자신의 빛을 드러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루이 스코레키가 1960년대에 외친 “미치광이 같은 사랑 L’amour Fou”은 여전히 유효한 표현처럼 들린다. 영화를 향한 미친 사랑의 시네필리아 현상,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닌 일종의 현상임을 알고 있다. 타노스, 아니 영화진흥위원회의 핑거 스냅은 또 다른 영화 생태계를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모든 영화제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작지만 다양한, 겸손하지만 강인한 소규모 영화제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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