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영의 흰 밤.
GQ “나는 아침을 ___.” 빈칸을 채운다면요?
BY ‘아침을’이에요, ‘을’? 저는 그냥, 아침 루틴이 생겼어요. 일어나서 딱 하는 것들이 좀 생겼어요. 중구난방이었는데 지금은 일어나면, 예전에는 침구 정리를 그렇게 잘 안 했거든요? 이제는 일어나면 침구를 거의 호텔처럼 깨끗이 정리하고, 물을 한 잔 마시고, 조금의 스트레칭을 해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조금 돌보려고 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GQ 나를 돌보는 일환으로 아침에 루틴을 만드신 거군요.
BY 오래되지 않았어요. 몇 달 전부터. 더 정확히는 올해 시작했어요.
GQ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캐스팅 소식이 작년 여름쯤 들려왔죠.
BY 크랭크업을 올해 1월 중순에 했어요. 작년 여름부터 7개월 정도 촬영했죠.
GQ 촬영을 마친 시점과 아침 루틴이 생긴 시점이 비슷하네요.
BY 어, 그렇죠. 어떻게 보면. 보셨어요, ‘정신아’?
GQ 울면서요.
BY 저도 많이 울면서 봤어요. 제 드라마지만 많이 울면서 봤어요, 저도.
GQ 매 화마다 병원을 찾은 이들에게 공감 가서 나도 한번 가봐야 하나 싶었어요.
BY “꼭 병원에 가보세요”보다 “정신과라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곳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려는 게 저희에게도 컸던 것 같아요. 그 문턱을 낮춰드리면 좋겠다는 마음. 생각하신 것처럼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고 체크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만들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GQ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선택했던 이유는 뭐예요?
BY 제 필모그래피에 힐링 휴먼 장르가 많이 없어서 꼭 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좋게 이 작품을 받았고,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중 하나는 꼭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을 꼭 완성시켜서 보여드리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어요.
GQ 보영 씨의 눈물을 터트린 건 어떤 이야기였나요?
BY 저는 생각보다 ‘워킹맘’ 이야기에서 많이 울어서. 저랑 좀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니까 (김)여진 선배님이 연기를 너무 잘하시기도 했지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라는 말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모든 사람한테 해주는 말 같은 거예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거기서 눈물 버튼이 눌려서 그 에피소드에 많은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만약 몰랐다면 (작품에서 언급되는) ‘자서전 써보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이미 저는 자서전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찾아 노란색을 칠해보는 다음 과정을 아니까 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말을 덜 쓰려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대신 뒷부분에 나오는 ‘칭찬 일기’를 좀 썼어요.
GQ 썼어요? 그렇잖아도 궁금했거든요.
BY 제가 다은이(극 중 역할)랑 맞닿아 있는 부분이 조금 있는데, 저도 그걸 잘 못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조금 박한 편이고 누구의 칭찬을 잘 믿지 않는 편이에요. 후에 다은이가 하얀병원에 가서 선생님과 상담할 때 ‘나랑 되게 비슷한 친구구나’ 느낀 부분이, 친구의 취향이나 주위 사람의 취향은 더 잘 알아요, 제 취향보다. 먹을 게 딱 하나 남았을 때 나도 먹고 싶지만 누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냥 그 사람이 먹는 게 내 마음이 편해요.
GQ ‘다은쌤’이네요?
BY 약간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다는 아니지만. 그래서 다은이가 받은 솔루션처럼 나도 칭찬 일기를 써보면 좋겠다, 그랬어요. 처음에는 너무 힘든 거예요. 대단한 칭찬 거리가 있어야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드라마 안에서도 다은이가 쓴 거 보면 그냥 “실내화를 가지런히 놓은 나를 칭찬한다” 이런 거거든요.
GQ 사소한 것에도 말이죠.
BY 네, 정말 작은 것에도요. 그러면 늦잠을 자지 않는 나를 칭찬하고, 너무너무 가기 싫지만 운동을 하러 간 내 자신을 칭찬하는 것부터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고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자존감이 많이 올라가는 것 같아요.
GQ 그 칭찬 일기를 쓰는 다이어리는 어떻게 생겼어요? 묘사해주세요.
BY 저는 되게 심플한 걸 좋아해서 평소에 쓰는 다이어리도 늘 똑같은 브랜드에서 나오는 걸 사거든요. 표지에 아무것도 없고 매년 색만 달라요. 내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른 것들도 보면 다 그런 식이에요. 겉으로 볼 때는 잘 모르겠는, 거진 무지에 가까운. 가끔 선물로는 그런 걸 주세요. 꽃이 만발한. 다음에 칭찬 일기를 또 쓰게 되면 그때는 그런 화려한 것들도 사용해보고 싶기는 해요. 그리고 전에 친한 동생이 선물해준 게 있는데, 그건 좋은 일이 있을 때 적어서 하나씩 뜯어서 접어 통에 넣는 거예요.
GQ 마치 학을 접어 모으듯이.
BY 네. 좋은 일이 있으면 종이에 적은 다음 뜯어서 접어 통에 넣어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날, 약간 조금 그런 날, 통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펼쳐보면 ‘맞다, 나 이런 기분 좋은 일이 있었구나’ 하게 되는데, 그것도 참 좋더라고요 저는.
GQ 현재진행형인 수집인가요?
BY 많이 쌓이지는 않았는데 한 번씩 써서 넣어요. 나중에 조금 웅크리고 있는 나한테 조금이나마 ‘맞아, 그때 이런 좋은 일이 있었어’라는 걸 상기시켜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더라고요. 좋아요, 그거. 한번 해보세요.
GQ 세 가지가 궁금해지는데 먼저, 가장 마지막에 쓴 칭찬 일기는요?
BY 그건 진짜 일기를 봐야 알 것 같은데, 음···. 왜냐하면 처음에는 막 찾아서 썼거든요. 누가 봐도 칭찬할 만한 걸 해야 될 것 같아서 엄청나게 찾았던 거고, 제일 많이 쓴 건 아무래도 운동에 대해서 같아요. 너무너무, 매일매일 가기 싫거든요. 그런데 늘 이겨내고 운동하러 가서 그 칭찬을 제일 많이 써요.
GQ 적어서 병에 넣은 좋은 일은요?
BY 기분이 좋아서 써서 넣은 건 그냥 정말 매일매일 행운처럼 있었던 일 같은데, 마지막에 뭘 썼을까요? 다은이 역할을 끝내고 쓰지 않았을까요? 이런 거죠. “길고 길었던 촬영이 끝났다. 야호.”
GQ 다시 좋은 일을 꺼내본 적은요?
BY 최근에는 꺼낸 적 없어요. 요즘은 되게,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다은이랑 같이 성장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 이후로 제 자신을 돌보는 방법도 많이 알았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되게 힘든 감정은 전혀 못 느끼고, 그냥 하루하루 행복하고 감사하면서 살고 있어서 만족도가 엄청 높아요.
GQ 그래서 괜찮다고 한 거예요? ‘정신아’ 이재규 감독님이 말하길, 박보영 배우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인데도 화를 안 내더라고 하더군요.
BY 그래서 제가 그다음 날 다른 인터뷰에서 정정했어요. “7개월 동안 일을 하면서 화를 한 번도 안 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다음에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대안이 있을 땐 그 부분을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GQ 현장에서 부딪혀오면서 장착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인가요?
BY 그런가요? 그냥 주인공을 하게 되면서 책임감이 더 생겨서 그런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주어지는 환경이구나’ 하고 넘어갔다면, 지금은 내가 나서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고 느껴요. 아, 내가 이야기해야 하는구나. 그걸 깨달아가나 봐요. 그런데 저의 말이 와전되거나 모든 현장이 힘들고 부당하다고 느끼실까 봐 조심스러워요. 너무 좋은 현장이 있거든요. 이번 ‘정신아’ 역시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한 현장이었어요. 만나면 저희끼리 서로 고생했다고 안아주는 걸 진짜 많이 했어요. “고생하지, 언니” 하고 안아주고, 안김 받고, 응원하는 말들도 많이 하고. 서로 온기도 나누고, 정신적으로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촬영 끝나고 지금까지도요.
GQ 매일 오는 아침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는 대상은 무엇인가요?
BY 온전히 저로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떠오르는데, 집이 제게는 그런 존재예요. 저한테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에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잖아요. 제가 어떠한 행동을 하든.
GQ 그 집은 어떤 풍경이에요?
BY 화이트랑 우드, 딱 이 두 가지가 끝이에요. 집이 집 같고 따뜻함이 있었으면 좋겠고, 나무가 많으면 그런 게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런 나무 바닥과 나무 문, 나무가 많아요.
GQ 집 안에서도 좋아하는 공간은요?
BY 집 자체. 그냥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너무 느껴져요. 모든 게 다 풀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저는 제가 운전하는 차도 좋아해요. 아무도 없고 저만 탄 차. 거기서 제가 너무 듣고 싶은 노래 들으면서 목적지 없이 한 바퀴 돌고 오는 시간도 좋아해요. 온전히 저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저는 제일 솔직해지는 것 같아요.
GQ 요즘 박보영 씨 차에는 어떤 노래가 흐르고 있어요?
BY 최유리 씨의 ‘숲’이라는 노래에 엄청 꽂혀서 계속 듣고 또 들어요. 쉬운 가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이 분석해놓은 해석이 재밌더라고요. “나는 내가 보여”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게 고개를 숙이는 거래요. 나는 내가 보여. 고개를 숙여야 내가 보이겠죠? 앞을 볼 때는 내가 안 보이니까.
GQ 보영 씨는 숙이면 뭐가 보여요?
BY 숙이면요? 이제 조금 자란 제가 보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