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핀 종원.
GQ 밤 좋아해요?
JW 굉장히 좋아해요.
GQ 집에 커튼을 달지 않을 정도로 햇살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JW 낮과 밤을 다른 이유로 좋아해요. 저는 생각이 많아요. 낮에는 어떤 재밌는 일을 펼칠까 창의적인 궁리로 바쁘다면, 밤에는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것이 기분 탓인지, 어둠 때문인지, 나에게 더 집중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밤은 늘 더 차분해요. 술 마시러 밖에 나가는 밤이 아니라면, 집 안의 테이블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요. 재즈나 가사가 없는 앰비언스 사운드의 LP를 틀어두고요. 앰비언스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마법의 음악 같아요. ‘이종원’이라는 광산이 있다면, 주로 밤에 캐는 것 같아요. 그 편이 효율적이에요.
GQ 밤의 향기를 떠올린다면 어때요?
JW 우디한 향을 좋아하는데, 그 향은 밤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농도 짙은 나무들이 내어주는 향기, 흙을 향기로 표현할 때의 축축하고 향긋함···.
GQ 이종원은 왠지 어린 시절에 그런 향기를 곁에 두고 자랐을 것 같아요.
JW 순천에서 태어났고, 하동 옆 구례에서 자랐어요. 옆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곁에는 지리산이 있었어요. 배산임수의 환경에서 완전히 자연에 파묻혀 살았어요.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초·중·고를 모두 걸어서 등교했어요. 노래 들으면서 걸어 다니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굉장히 조용한 아이였어요. 하교하면 집에서 컴퓨터 켜고 좋은 음악과 옷을 디깅하는 게 일상이었고, 저녁에는 영화광인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보고, 형들과는 음악 이야기를 했어요. 영화, 패션, 음악. 제 학창 시절은 그 세 가지가 전부였어요.
GQ 과시하지 않는 것, 덜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은 어떻게 형성되었어요?
JW 어머니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과시하는 순간 멋이 없어진다.” 가령 제가 멋있는 옷을 입었는데 내가 먼저 ‘이거 멋있지 않아?’ 하는 것과 누군가 먼저 알아보고 멋있다고 칭찬해주는 건 천지 차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자랑할 만한 게 생겨도 절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인정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반드시 당장 알아봐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젠가 누군가는 알아봐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편이에요. 그래서 저도 되도록 상대를 알아봐주고 칭찬해주려고 노력해요.
GQ 알아봐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예쁘게 느껴지네요.
JW 그렇게 해야 관계에 상호작용이 생기더라고요. 기다릴 줄 알고, 기다려줄 줄도 알아야 관계가 순환되고요. 뫼비우스의 띠처럼요.
GQ 주변에도 그런 성향의 사람이 많은가요?
JW 비슷한 것 같아요. “끼리끼리 만난다”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 말이 너무 소중하고 좋은 것 같아요. ‘끼리’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잖아요. 제 주변에는 굉장히 밝다가도 별안간 깊게 성찰할 수 있는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과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멋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아요. 반드시 비싼 브랜드가 아니라 1만원, 2만원짜리 옷도 멋있게 입을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끼리끼리 모여 취향을 공유해요.
GQ 작년에 인터뷰로 만난 노상현 배우가 떠올라요. 이종원은 직접 배우를 인터뷰하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첫 인터뷰이로 노상현을 정했죠. 당시 노상현은 이종원이 찍어준 자신의 포트레이트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JW 정말요? 나에겐 내색 안 하더니.(웃음) 그 결과물은 저도 굉장히 만족스러웠어요. 사진은 오래 찍었지만 인물은 잘 찍지 않았어요. 포토샵을 하지 않아서 인물 사진은 겁이 나기도 하고, 기피했어요. 그러니까 저로선 새로운 도전이었죠. 매거진처럼 스타일링부터 촬영, 인터뷰까지 전부 제가 했어요. ‘이 형이 내 옷을 입으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제 옷을 네 벌 챙겨갔는데, 머릿속에 구상했던 이미지를 직접 보는 순간이 굉장히 짜릿하더라고요. 아, 이거 좀 아찔한데?
GQ 내심 그 아찔한 작업을 계속해주었으면 했어요.
JW 저도 아쉬워요. 본업이 배우인지라 작품에 들어가면 맥이 끊기더라고요. 저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 앉아 노트북 켜놓고 늘 메모장에 하고 싶은 걸 적어요. 그걸 실행할 생각에 늘 설레요. 지금 구상해놓은 것들이 있는데 언제 실행할지 타이밍을 보고 있어요.
GQ 힌트를 준다면요?
JW 비밀이에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기똥찬 아이디어라서.(웃음) ‘사진’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GQ 이종원은 어떤 때 카메라를 들어요?
JW 혼자 툭 떨어져 있는 것을 주로 찍는 것 같아요. <나혼자 산다>에서 기안84님이 제 사진을 보고 “소외된 것을 주로 찍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저를 굉장히 유연한 눈빛으로 꿰뚫어보는 느낌이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밝고 장난도 잘 치고 에너지를 무한으로 내어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외롭고 쓸쓸한 면도 분명 있어요. 혼자 있는 피사체를 보면서 저를 투영해 찍기도 하는데, 그렇게 찍은 사진을 보면 종종 울컥해요. 가끔은 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피사체를 찍음으로써 그는 혼자가 아니게 되잖아요. 그를 기억해주고, 위로해주는 마음으로 찍으면서 결국 제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죠. 사진은 저에게 해소의 창구예요.
GQ 최근엔 뭘 찍었어요?
JW 이탈리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쭉 돌려 보는데 굉장히 외로운 사진들이더라고요. 아름다운 나라에서 따뜻하고 바람 솔솔 부는 날 와인 한잔 마시고 걷기만 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는데, 왜 사진은 다 우울하고 쓸쓸하지? 그 사진은 아직 아무 데도 올리지 않았어요. 제 감정이 깊게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공개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사진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어요.
GQ 배우 이종원과 인간 이종원은 여전히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JW 예전에는 배우와 인간 이종원의 밸런스를 5:5로 고수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배우 이종원 쪽에 무게가 더 실려요. 인간 이종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배우 이종원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는데, 요즘은 곁에 두려고 해요. 인간 이종원이 더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배우라는 직업이 저에게 더 소중하고 책임감을 느껴요. 평생 이 밸런스는 완벽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생각은 가변적이고, 1분 1초,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이 계속 다르니까. 그 변화에 적응하고 나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은 더 크고 넓게 생각하는 법을 공부하고 있어요. 늘 배우고, 생각하고, 들여다봐야 제가 변하는 속도에 저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을 놓아버리면 저를 놓쳐버릴 것 같아요. 제가 저를 따라잡으려면 늘 움직여야 해요.
GQ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하군요. 곧 공개되는 <밤에 피는 꽃>의 정명인 작가가 이종원에 대한 인상으로 “삶에 대한 성실함”을 언급한 것이 마음에 남았어요.
JW 삶을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해요. 저의 본래 기질은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편인데, 기질은 그렇더라도 성향은 바꿀 수 있잖아요. 제가 제 안을 깊게 들여다보거나 상대를 기다려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게으른 나를 성실한 내가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거죠.
GQ <밤에 피는 꽃>의 이샘 작가는 “회차가 지날수록 이종원이 연구하고 연기하는 수호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수호를 애정하는 만큼 이종원의 성장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라고 하더군요. 스스로도 성장한 자신을 감지하나요?
JW 처음에는 여유가 없었어요. 처음으로 맡은 ‘단독 주연’이라는 타이틀이 굉장히 큰 도전이기도 하고, 큰 압박이기도 했어요. 그 부담감이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스스로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죠. 어떻게 하면 더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많은 선배님들과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지, 촬영하며 조금씩 조금씩 깨달으면서 5개월쯤 지났을 때에야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때야 “현장에서 놀아라”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어요. 저를 조금은 내려놓고 수호라는 인물을 받아들이면서 현장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저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 현장에 숨 쉬는 모든 사람과 같이 즐기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도요. 촬영이 끝날 때까지 못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GQ 선배들의 어떤 말이 기억에 남던가요?
JW “네 맘대로 해라”라는 말요. 저는 자기 검열을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인데,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 중압감이 저를 가로막아 과감하게 표현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뻔뻔하게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풀어봐”라는 말이 저를 해방시키는 느낌이 들었어요. 실제로도 좀 뻔뻔해졌어요.(웃음)
GQ 수호와 닮은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JW 저와 수호가 지닌 중요한 키포인트는 하나의 가면이 있다는 거예요. 수호는 굉장히 비범하고 싸움도 잘하고 책임감도 강하지만 속 안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아요. 저도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저의 좋은 면을 잘 봐주고 칭찬해주면 그 모습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것이 솔직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굉장히 솔직하지 못한, 저의 하나의 페르소나를 만든 것 같아요. 저와 겹치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때부터 수호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이제까지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 저와 완전히 다른 인물 같아 보여도 늘 닮은 부분이 있었어요.
GQ 인물을 만나는 일이, 이종원이라는 밤의 광산에 자꾸 플래시를 비추는 거군요.
JW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늘 생각해요. 내 안에 진짜 뭐가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