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됨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고유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길들이고 싶을 때 나만의 이름으로 그를 불러 유일의 존재로 만든다.
글 / 박정훈 (번역가, 작가)
이름은 곧 의미다. 김춘수 시인이나 생텍쥐페리가 일러준 대로 이는 문학적 진실이기도 하지만 이를 넘어 신경학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사실이다. 파란색을 뜻하는 단어가 없는 시대의 문화권에선 실제로 파란색을 초록색이나 회색과 구분하지 못했다는 조사 기록이 있다. 푸른 하늘과 파란 하늘이 우리에게 별개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우리말에서도 ‘푸르다’는 녹색과 파란색을 예리하게 가르지 않는다. 파랑이라는 단어가 우리 인식에 들어온 그제야 파란색이 다른 색과 구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별됨은 곧 서로 다른 이름이 주어져 고유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대량 생산을 통해 구입한 상품일지라도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길들이고 싶을 때 우리는 그 물건을 나만의 이름으로 불러 세상 유일한 존재로 만든다. 가까이 두고픈 누군가를 여러 다른 이들과 같은 무리로 대하지 않으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묻고 기억하고 부른다. 내 삶에 그의 의미가 더 짙어지길 바랄 때면 내가 새로이 달아준 이름으로 부른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기에.
우리는 형상을 갖추어 일정 공간을 점유해 존재하는 것들에게도 이름을 붙이지만, 그저 흘러가는 것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흘러가지만 아예 사라지지 않고 약속한 듯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일까. 흘러가는 세월을 마디로 나눠 각 시절에 이름을 주어 부르고, 거기에 의미가 스며들게 하는 것. 크게는 해에 붙이는 이름이 그러하고, 한 해의 네 계절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이름 역시 그러하다. 우리말 열두 달의 이름은 아직 생소하지만 무성의하게 번호 부르듯 12월, 1월이라고 하니 여간 서운한 게 아니다. 매듭달, 해오름달이라는 새 이름이 그래서 달갑다. 그 이름이 헛되지 않게 올해의 매듭을 허튼 데 없이 지어야 할 것만 같고, 새해 첫 해님을 마중하러 뒷동산에라도 올라야 할 거 같은 심정이 절로 인다.
겨울이다. 겨울에는 다른 계절과 마찬가지로 여섯 개의 다른 이름이 있다.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겨울의 여섯 이름에도 별칭이 있다. 물이 얼기 시작하는 날 수시빙水始氷, 호랑이가 교미하는 날 호시교虎始交, 고라니의 뿔이 떨어지는 날 미각해糜角解···. 이름이 많은 것은 겨울의 몸짓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까닭이다.(겨울의 이름이 많다고 하지 않고, 그 여러 이름이 겨울을 이루고 있다고 하면 어떨까.) 그러하니 겨울이 일어나 장성한 때를 거쳐 사라지기까지 오로지 하나의 이름, 겨울이라고만 부른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묘미와 세월의 의미를 놓쳐버리게 되는 셈이다. 세월의 유수에서 뜬 한 움큼의 의미가 새어나가지 않게 손바닥을 오목이고 손가락을 그러모으면 물이 손안에 담긴다. 그 한 모금은 내 마음 밭을 좀 더 비옥하게 적혀줄 것이다.
겨울은 북극의 찬 기운이 시베리아를 거쳐 우리에게 내려오면서가 아니라 저 깊은 땅 밑에서 올라오면서 시작한다. 입동立冬. 겨울이 일어서는 것이다. 올해의 겨울은 11월 8일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약 보름 전, 서리가 땅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상강霜降이 새 계절의 터를 닦아주고, 서리가 내릴 때 꼭 돌아온다는 신의를 지키려 상신霜信의 철새 기러기가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소소하게나마 소설小雪의 환영을 받아야 비로소 겨울이라 할 만하다. 간혹 소설이 작고 어설픈 눈이라고 어린 봄, 소춘小春이라 놀렸다가는 곧이어 당도할 큰 눈, 대설大雪이 하얗게 내지르는 건곤일색의 조용한 호통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잿빛 포도를 덮은 은빛 눈이 바지 밑단을 적시는 걸 성가셔 할 틈도 주지 않고 겨울은 절정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간다. 동지冬至. 겨울이 꼭대기에 올라앉아 우리를 기다린다. 어쩌면 우리가 동지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절기에는 웬만하면 볼 수 없는 ‘날’을 붙여 동짓날이라 부를 정도로 우리는 동지를 기다린다. 긴긴밤이 팥죽을 쑤어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모든 절정은 이울어짐을 동반한다. 겨울이라는 완숙한 음기가 시들기 시작하고 봄이라는 설푸른 양기가 발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를 아세亞歲라고도 부르는가 보다. 한 해의 시작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농가월령가>는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즐기리라. 새 책력 분포하니 내년 절후 어떠할꼬” 하고 노래한다. 그렇다고 겨울의 소멸에 애틋함을 지니지도, 봄의 탄생에 달뜸을 느끼지도 않을 일이다. 모든 시간은, 우리 인간이 그러하듯 사이의 존재이므로. 만물은 언제나 탄생과 소멸, 소멸과 탄생 그 사이에 있으므로.
글자 뜻으로 보자면 큰 추위 대한大寒이 소한小寒보다 더 엄할 거 같지만,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라는 속담처럼 가장 매서운 추위는 소한에 기승이다. 부적을 붙여 액을 쫓듯 옛사람들은 소小 대신 사라질 소消를 써서 소한消寒, 또는 녹일 소銷를 써서 소한銷寒이라는 다른 이름을 주었다. 그 이름들에는 추위가 어서 가시기를 바라는 바람이 배어 있다. 그래서 유독 소한 때 소망을 담아 하늘 나는 새들을 올려다본 것인지도 모른다. 기러기가 다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안북향雁北鄕, 까치가 새 가족을 이루기 위해 보금자리를 짓기 시작한다는 작시소鵲始巢. 소한의 이 작은 이름들은 소한의 추위를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절심함을 전해준다.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기후라는 천지의 운행에 대한 겸허함까지 더불어 느껴지는 건 내 감상이 지나친 때문이려나.
동지, 소한과 비교해 그다지 춥지 않은 1월 20일 즈음에 큰 추위라는 과한 이름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보름 후 봄의 문턱에 당도하기 전 만나야 하는 마지막 추위를 향한 경의의 표현일까, 아니면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인사일까. 양력으로 한 해가 다한 지 스무 날이나 되었지만 대한이 되고서야 나이테의 한 바퀴가 그예 다 그려진 듯하다. 허만하 시인의 “천의 잎새가 하늘을 날지만 최후의 한 잎이 몸을 던지는 순간 숲은 비로소 한 해의 가을을 완성한다”라는 구절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계곡물 다시 흐름을 시작하지만 최후의 얼음 한 조각이 물방울로 녹는 순간 겨울은 비로소 한 해의 계절을 완성한다.”
겨울의 완성은 죽음이다. 죽어서 땅에 고이 눕는다. 땅에 누워 스스로 땅이 된다. 자신이 일어섰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땅을 딛고 다음 계절이 일어선다. 그러하기에 한 계절의 완성은 그 이후가 없는 종결이 아니라 다음 계절의 탄생을 위한 소멸이 된다. 탄생과 소멸, 소멸과 탄생은 나이테의 원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서로 맞물려 있다. 그렇게 겨울이 스러지고 봄이 일어선다. 입춘이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다. 윤동주의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유재하의 노래를 허밍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이름을 불러보는 것에 그 어떤 실질적인 효력이 있을까. 의미를 되새겨 잊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미덥지 않지만 어쩐지 그럴 것만 같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묵주 구슬 알알이 돌리듯, 백팔 번의 절을 올리듯 낭송하면 그 의미뿐만 아니라 의미의 실재까지 되돌아올 것만 같다. 달력 날짜 밑 작게 붙어 있는 절기의 명칭이 내 기분을 고이 담아내지 못한다면, 기후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에 문자적 상상력을 더해 전에 없던 이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새로운 학명을 붙여 자신이 발견한 미지의 식물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생물학자의 마음으로, 겨울철 어느 한 날에 이름을 달아 불러준다면 그날은 겨울의 여러 날과는 구별되는 하루, 새로운 의미를 덧입은 하루가 될 것이다. 유리창에 얼음꽃 핀 날 빙화소氷花笑, 덧버선 신어 발의 체온을 지켜주는 날 너널날, 엄동스럽지 않게 포근한 날 푹푹결···. 겨울의 이름들이 한 해의 끝과 시작을 넉넉하게 해주고, 한 계절의 의미를 매만져주었듯이 우리가 겨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들을 다시 불러준다면, 새로 마련해준다면 날로 왜소해지는 겨울과 겨울의 의미는 우리를 향해 다시 웅크렸던 몸짓을 틀고 닫았던 눈짓을 보내기 시작하리라.
- 이미지
-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