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art

가깝고도 먼 한국 영화 흥행 공식

2023.12.16신기호, 전희란, 김은희

잘 만들면 관객이 알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유효할까. 더 이상 사람들에게 극장 영화 관람은 가성비 좋은 취미 생활이 아니다.

글 / 임수연(<씨네21> 기자)

영화 잡지사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가장 위기의식을 느낄 때는 극장 영화는 더 이상 사람들의 주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때다. 13년 만의 속편 <아바타: 물의 길>이 1천80만 관객을 동원하고 <엘리멘탈>(7백23만), <스즈메의 문단속>(5백56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4백75만) 등 애니메이션 영화는 어느 때보다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고비는 한국 영화에 국한된 것처럼 보인다.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영화는 단 4편, <범죄도시3>(1천68만), <밀수>(5백14만), <30일>(2백4만), <잠>(1백47만)뿐이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한국 영화계의 위기를 진단하는 글이 올라오면 재미없는 영화를 만드는 업계를 되레 질타하는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린다. 이 모든 게 단지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라 볼 수 있을까? 프로야구는 관중수 7백만을 돌파하며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K리그는 사상 처음으로 유료 관중 2백만을 돌파했다. 지난해 공연시장 총 티켓 판매액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보다 43퍼센트 증가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그냥 한국 영화만 안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잘 만들면 관객이 알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유효할까.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완성도 면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몇 편의 드라마를 떠올리다 보면 그리 매력적인 가설은 아니다. 다만 티켓값 상승 이전 극장 영화는 통신사 할인을 받아 8천원 정도면 그럭저럭 2시간 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가 생활이었다. 2014년 여름 <명량>(1천7백61만), <해적: 바다로 간 산적>(8백66만), <군도: 민란의 시대>(4백77만) 등이 연달아 관객 몰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해 기록적인 폭염 덕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극장은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적당히 놀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1만원(CGV 주말 기준)이었던 티켓값은 지난 10년간 1만5천원까지 상승했다. 팬데믹 시기 사람들은 집에서 유튜브와 OTT를 열성적으로 소비했고, 그사이 대중들은 굳이 극장에 가지 않고도 비슷한 효용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영화 티켓값보다 저렴한 구독료를 내면 넷플릭스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고, 유튜브에서 15분짜리 요약본을 보거나 더 재미있는 다른 콘텐츠를 즐기는 데 드는 비용은 0원이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극장 영화 관람은 가성비 좋은 취미 생활이 아니다. 밥값까지 포함하면 2인 기준 6만원이 훌쩍 넘는 비용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계산해야 한다. 비슷한 돈을 들여서 KBO 경기를 보러 가면 옆 사람과 수다를 떨며 동시에 취식도 가능하다. 다른 선택지를 포기하고 극장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미 관람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너무 높아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 등에 올라온 밈을 이해하는 공동체에 속하고 싶게 한다거나.

영화 <잠>

문제는 영화가 기획부터 공개까지 최소 수년이 걸리는 상품이라는 점이다. 코로나19로 극장가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개봉이 연기된 작품들은 코로나19 이전에 기획된 것들이 대다수이며, 그 당시만 해도 창작자들은 타 분야와 경쟁해야 할 만큼 시장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극한직업>이 수익률 1천2백87퍼센트를 기록한 2019년 극장 관객수는 역대 최다인 2억 2천6백68만 명을 기록했다. 그해 12월 <백두산>은 평단과 대중 양쪽에서 모두 혹평을 받았지만 8백25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때만 해도 스타 배우가 출연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느 정도 흥행한다는 공식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극장 영화는 성공했을 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으면서 대중 반응이 아주 좋지 않아도 높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산업이었다. 이러한 기대치를 안고 기획된 작품들이 바로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 영화들이다. 그중에는 물음표를 떠안고 본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듯 안일한 기획이 투자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지? 이렇게 개연성이 떨어지는데 아무도 이게 이상하다는 지적을 안 했다고? 심지어 팬데믹으로 인해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까지 개봉이 연기된 작품들이기에 지금 시대 소비자들의 취향과 정서를 읽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때는 그 정도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데이터를 믿고 안일하게 만든 영화들이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렸다.

그렇다면 2024년 극장가는 지금보다 상황이 호전될 수 있을까. 영화 투자 계약은 통상 5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봉을 미루고 미뤘던 영화들은 2024년 반드시 시장에 나가야 한다. 이에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미개봉 한국 영화 1백10편 중 순제작비 30억원 이상 규모의 작품을 지원하는 ‘개봉 촉진 투자 조합’ 결성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영화계는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내부 반응이 긍정적이어서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을 만하다고 점쳐진 굵직한 작품들은 이미 총대를 메고 시장에 먼저 나간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앞으로 공개될 영화들은 따끈따끈한 신작보다는 여러 이유에서 기약 없이 개봉이 밀렸던 작품이 대다수다. 산업이 위축되면서 올해 제작에 들어간 영화 편수 자체가 많지 않았고, 최근 만난 영화인들은 대부분 OTT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검증된 소재, 기획, 배우들을 찾는 등 투자가 더욱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관객이 극장에서 만날 작품들은 대체로 익숙한 그림을 담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지난해 크랭크인해서 올해 개봉한 정유미 주연의 <잠>이 손익분기점을 넘고 흥행한 것은 영화계가 희망을 걸어볼 법한 몇 안 되는 긍정적인 시그널이다. 작품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신선한 기획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관객층이 분명 존재하고 돈까지 벌어다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존 흥행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뚝심 있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밀어붙여 치열하게 영화를 만들었다면, 극장가에 작지만 큰 활기가 찾아올 가능성이 남아 있다. 2024년 영화계가 그리 장밋빛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 한국 영화에 애정이 있는 절반의 관계자로서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다.

이미지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