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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부터 홍콩까지 여섯 명의 셰프가 전하는 도시의 아침

2024.01.04전희란

가장 눈부시던 그날의 아침.

아라곤 ARAGÓN

오렌지 피처, 앵커 호킹 at 도도기프트스토어. 은곡 도마, 하몽은 모두 이새봄 셰프의 것.

이새봄 at 레에스티우
“발렌시아 근처 비르헨 데 라 베가의 6월, 아직 쌀쌀하던 그 아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오전 6시쯤, 해는 뜨고 있었지만 아직 그늘진 우리 별장은 베이지 빛 회색이었어요. 비르헨 데 라 베가는 아라곤의 아주 작은 마을인데, 겨울철에 스노보드를 타는 젊은이들로 잠시 붐빌 뿐 비시즌에는 적막해요. 전등 하나 켜 있지 않은 산속 유럽 마을의 새벽은 도시에 길들여진 저에게는 아직도 신비로워요. 아라곤의 산속을 거닐다 보면 야생 타임을 찾을 수 있어요. 땔감을 부지런히 모으다 보면 이슬 맺힌 세이지나 월계수 잎, 가을에는 버섯도 딸 수 있죠. 이따금 사슴이 눈앞으로 지나갈 때는 쿵, 설레고 맙니다. 장작으로 구운 마을 할머니의 빵, 이베리코 베요타 하몽과 강판에 쓱쓱 간 토마토, 아라곤 올리브, 발렌시아 오렌지로 착즙한 신선한 주스가 차려진 아침은, 언제 떠올려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지죠. 그곳에서는 알람 없이도 새벽에 눈을 떠요. 새소리가 귀를 울리거든요. 남은 장작이 탁탁탁 소리를 내며 마지막 힘을 다해 열기를 내요. 두꺼운 스웨터를 대충 두르고 고양이 세수를 한 후 커피를 내려 창 밖을 바라보면 느껴요. 아, 내가 살아 있구나. 여유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아주 조금 알려준 곳이 아르곤이에요. 제가 너무 들뜨게 했나요? 참, 싱코 호타스 하몽이 궁금하면 저희 레스토랑으로 놀러오세요. 마침 스페인에서 프라이빗 셀렉션해서 가져온 하몽이 있거든요.”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 모마 노트, 잼, 텀블러, 모두 샌프란시스코 관광청. 카라페, 드리퍼, 타이벡 쿨러 백, 모두 블루 보틀.

손종원 at 이타닉 가든
“서울을 제외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도시가 샌프란시스코예요. 따뜻한 봄날, 캘리포니아의 하얀색 햇살이 내리쬐던 오전 10시 즈음이 기억나요. 바닷가 도시라 봄바람이 쌀쌀한데, 그 차가움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기분 좋은 도시죠. 책임감, 걱정거리가 많은 지금과는 달리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처럼 단순하고도 충실히 살던 어린 시절이 가끔 조금 그리워요. 페리 선착장이자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큰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페리 빌딩’ 앞의 나무 벤치에 앉아 방금 내린 싱글 오리진 드립 커피 한잔, 아침에 구운 사워도우 한 개를 앞에 놓고 뜯어 먹고 싶네요.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간단해 보이지만 멋진 조합이죠. 사워도우의 바깥쪽 바삭한 크러스트 부분과 쫄깃한 속살 부분을 3:7 비율로 잘 뜯어 안쪽에 버터를 듬뿍 발라서 한입에 넣으면, 빵의 새콤 구수한 맛과 버터의 풍부한 풍미를 함께 즐길 수 있어요. 그러다 입 안이 조금 텁텁해질 때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셔줍니다. 그 도시의 아침이 제게 선물한 것? 요리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라 많이 혼나기도 했고 화려함이나 멋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젊음만으로 빛나는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일까 고민도 많이 했고, 그로부터 저를 사랑하는 법도 배웠어요. 2024년의 첫 아침은 감사하게도 레스토랑 예약이 꽉 차 있어요. 평소처럼 일어나 간단히 운동하고, 팀원들과 인사하고, 요리해서 손님들과 나눌 거예요. 꾸준히 요리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브리즈번 BRISBANE

라운드 플레이트 에스 3종, 더블 노드. 화병, 박대현 작가 모두 at 로파서울. 보쿠 화이트 시계, 렘노스. 컵은 에디터의 것. 단새우 타르타르와 요리가 담긴 접시, 배경에 깔린 사진은 이원석 셰프의 것.

이원석 at 매튜
“2015년 5월, 봄이었어요. 8시쯤이었나···. 여하튼 구름이 굉장히 많은 날이었어요. 바탕색은 회색, 흰색인데 쨍한 해가 가려져 외출하기 좋은 날이었어요. 당시 살던 아파트가 초고층이라, 통유리로 된 거실로 아침마다 밝은 햇살이 매일 오는 손님처럼 들어왔거든요. 상쾌하고 쨍한 아침, 무엇보다 출근하지 않아서 더 상쾌하고 행복한 날이었어요. 단새우로 만든 타르타르, 사워도우와 버터, 호주산 울월스 인스턴트 커피와 폴스 우유가 놓여 있었죠. 브리즈번은 해수 온도가 높아서 갑각류의 천국이에요. 가장 유명한 식재료는 모어튼 베이 Moreton Bay에서 나는 ‘모어튼 베이 버그’인데, 한국에서는 부채새우라고 불러요. 호주에서 ‘커피’ 하면 우유가 들어간 라테가 기본이에요. 유지방 함량이 높아 진하고 풍미가 좋은 폴스 우유는 커피와 섞으면 더 탁월하죠. 요리의 레시피를 간단히 소개할게요.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부채새우 대신 단새우로 대체해 껍질을 제거하고 다진 후, 선드라이 토마토와 다시마로 만든 잼, 차이브를 버무려 만들었어요. 프레시한 끝맛을 위해 레몬으로 만든 콩피, 백다시마 튀김으로 바삭한 식감을 살렸죠. 호주에서는 그 곁에 프랑지파니 꽃을 꽂았어요. 언젠가 아침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을 차린다면, 갓 구운 사워도우에 단새우 타르타르를 곁들여 브루스케타를 시그니처로 내고 싶어요. 브리즈번의 아침이 제게 일주일을 버텨내는 마음과 휴식을 선물했듯이, 2024년도 그렇게 아침 같은 힘을 내고 싶어요.”

코펜하겐 COPENHAGEN

휘낭시에, 아뜰리에 폰드. 드리퍼, 에이프릴. 빅 스포티 램프, SIUP 스튜디오. 투 핸들 럼피 머그, 주. 모두 at 로파서울.

김유정 at 아뜰리에 폰드
“어느 누가 코펜하겐의 아침에 대해 묻는대도, 저는 여름 아침이라고 대답할 거예요. 매일 아침 6시에 문밖으로 나서 30분 정도 걸으면 제가 일하던 레스토랑 ‘제라늄’이 있었어요. 그 길에서 본 하늘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하늘을 떠올리면 지금도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어요. 새벽 1~2시쯤 퇴근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눈부시게 예쁜 아침은 저를 설레게 했으니까요. 그 아침의 풍경에는 거창한 요리보다 간단하고 따뜻한 식사를 놓고 싶어요. 갓 구워 모락모락 김이 나는 빵, 고소한 밀가루 향기,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 한잔···. 상상만 해도 따뜻해지는 것들 있잖아요. 코펜하겐은 집집마다, 거리마다 주황빛 전구 알이 달린 디자인 조명이 놓여 있는데, 그 조명 덕분에 늘 포근했던 것 같아요. 아침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자전거. 작은 도시고, 환경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거든요. 색색의 자전거가 줄지어 가는 코펜하겐의 아침 활기에 피가 도는 것 같았어요. 코펜하겐에서 보낸 아침들이 제게 선물한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그땐 매일 아침을 버텨 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거든요. 마침 2024년에는 코펜하겐에 돌아갈 계획이에요. 새해에는 제가 살아온 도시를 주제로 디저트 팝업을 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반대로 코펜하겐에서 서울을 떠올리면서요.”

홍콩 HONG KONG

알레시 벽시계, 코카콜라 솔트 앤 페퍼 홀더, 모두 도도기프트스토어. 모자이크 손잡이 컵, 이스트스모크 at 로파서울. 딤섬 찜기, 홍콩 무드 식기, 젓가락, 모두 스튜디오 로쏘.

오준탁 at 남영탉
“홍콩의 아침은 눈이 부시다 못해 뜨거워서 눈이 멀 것 같은 날이 많았어요. 그나마 선선하던 11~12월의 오전 6~7시. 습기가 몽롱하게 낀 짙은 남색에 가까운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있던 어떤 아침을 기억해요. 전날의 숙취였는지, 잠이 덜 깬 건지 인적 드문 거리에서 기분도 무척 몽롱했어요. 아침마다 수시로 드나들던 홍콩식 죽 ‘콘지’집, 밀크티 가게, 새벽에 여는 딤섬 가게가 생각나요. 생선살, 돼지 간이 들어간 콘지를 즐겨 먹었는데, 특히 콘지에 곁들이는 꽈배기처럼 생긴 튀긴 빵을 ‘겟’하려면 서둘러야 했죠. 그래서 콘지는 제게 홍콩의 아침의 다른 말이에요. 가는 생강채가 들어간 콘지를 한 입 두 입 먹을 때마다 씹히는 생강 향이 너무 절묘하게 아름다워서, 아직도 죽에 생강채를 넣어 먹어요. 콘지를 먹은 뒤의 코스는 홍콩 부부가 운영하던 홍콩식 토스트 가게였어요. 빵 속에 피넛 버터를 바르고 달걀물을 입혀 프라이팬에 굽고, 그 위에 시럽, 연유, 버터를 올리는 게 전부인데 어쩜 그런 맛이 나는지 늘 미스터리였어요. 거기에 홍콩식 밀크티를 곁들이면 화양연화가 아닌 금상첨화였죠. 새벽 3시에 여는 딤섬집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허기를 채우러 들르는 저 같은 취객과 아침을 일찍 여는 택시 기사들이 기묘하게 아침을 공유하는 공간이었죠. 시그니처인 크리스피 포크번은 제가 여태 먹은 홍콩 음식 중 톱 3 안에 들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제게 홍콩의 아침은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였네요.”

뉴욕 NEW YORK

플러피타임클락, 라이프앤콜렉트. 라운드 플레이트 에스, 더블 노드. 모두 at 로파서울. 플레인 필로우 커버 샌드, 마시멜로트램펄린.

김호영 at 주아
“뉴욕의 가을, 오전 7시 23분. 회색빛으로 물든 새벽 무대에 시작을 알리는 듯한 붉은 조명이 켜진 것 같은 아침. 제가 기억하는 가장 눈부신 뉴욕의 아침이에요. 아침은 항상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아요. 눈부셨던 그 아침을 떠올리면 새로움, 처음, 설렘, 상쾌함, 햇살, 희망···. 이런 성질의 긍정적인 감정과 열정이 느껴져요. 그 순간에는 ’서니 사이드 업 Sunny Side Up Egg’를 놓고 싶어요. 너무 일차원적인가요?(웃음) 그렇지만 서니 사이드 업이야말로 붉게 떠오른 아침, 일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요리인 것 같거든요. 사워도우 토스트, 서니 사이드 업으로 요리한 달걀, 루콜라 아보카도 샐러드, 베이컨을 접시에 올리고, 거기에 아메리카노 한 잔. 뉴욕에 살고 있지만 뉴욕의 아침을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곳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뉴욕 타임스> 뉴스 페이퍼, 센트럴 파크의 산책로, 꽉 막힌 도로 위를 성난 얼굴로 달리는 노란 택시, 바쁜 뉴요커 손에 들린 스타벅스 종이컵. 뉴욕의 아침들이 제게 알려준 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아침이 주어진다는 점, 이민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품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그리고 내일 아침은 또 다른 해가 뜬다는 사실. 언젠가 아침 식사를 전문으로 팝업을 한다면 한식의 쌀과 죽을 모티프로 재미있게 디벨롭하고 싶어요. 메뉴의 힌트는 주아 인스타그램(@jua.nyc)에서 찾으실 수 있어요. 2024년에는 아들 이름이기도 한 ‘Siwoo(때 시, 비 우)’라는 새로운 한식 다이닝을 준비 중이에요. 많이 찾아와 주실 거죠? 비록 좌석은 8개뿐이지만.”

*사진 속 요리는 에디터의 상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포토그래퍼
김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