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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대신 홋카이도에 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

2024.01.09김은희

눈 덮인 일본의 홋카이도, 그곳에 수세기 동안 깊이 뿌리내려온 아이누의 전통과 창의적 관습.

홋카이도 시라오이 Shiraoi의 포로토 호수에 자리한 온천 료칸 호시노 리조트 카이 포로토 정경

아라노 요코 Arano Yoko의 양말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여든아홉 살인 이 여성은 단정한 팬츠부터 목에 두른 호박색 비즈 목걸이까지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잉크가 튄 특이한 양말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힌트를 건네는 것 같다. 아라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캘리그래피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우리를 서로에게 소개해준 현지 갤러리스트 호소카와 키요에 Hosokawa Kiyoe와 함께 나는 지금 그의 스튜디오에 서 있다. 홋카이도 니세코 Niseko에 자리한 스튜디오 창문 너머로는 눈이 만화처럼 두껍게 쌓인 풍경이 보인다. 벽에 걸린 예술품, 접어둔 신문지, 바닥에 튄 잉크 자국 등 아라노의 공예 흔적이 가득한 이 아늑한 공간에서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간다.

아라노가 옷 위에 오버올을 입고 목걸이를 풀어놓은 후 바닥에 종이를 깔자 히터가 부드럽게 소리를 낸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아라노의 공연이 시작된다.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다리를 접고 등을 구부린 채 무릎 높이까지 올라오는 크기의 붓을 원초적인 힘으로 양동이에서 꺼내자, 시럽 같은 검은 먹물을 머금은 말총 덩어리가 들어 올려진다. 종이 위로 튀어 오른 붓은 흰 바탕을 가로지르며 춤을 추다가 부드럽고 흐릿하게 일본어 모양이 된다. 몇 초 후 아라노는 잠시 멈추고 마지막 신음 소리와 함께 붓을 다시 물통에 넣는다.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의 거친 추상화를 살펴본 다음 이내 부드럽게 대화로 돌아왔다. “오늘은 ‘공손하다’는 뜻의 한자 ‘丁寧 테이네이 Teinei’를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니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많은 사람에게 홋카이도는 한 가지 의미만 가진 도시로 알려져 있다. 바로 눈(雪, 일본어로 ‘유키 Yuki’, 아이누 Ainu 원주민 언어로는 ‘우파스 Upas’ 그리고 일본어 단어에 파우더를 더한 합성어 ‘자포우 Japow’ 등 원하는 대로 부를 수 있다)이다. 홋카이도는 일본 열도 최북단에 위치한 섬으로 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적다. 도쿄보다 시베리아에 더 가까운 곳이지만 매년 산을 하얗게 덮는 가볍고 푹신한 눈에 이끌려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로 붐비고는 한다.

어쩐지 별로 트렌디해 보이지 않기는 해도 나는 겨울철에 스키장을 찾지 않는다. 대신 홋카이도의 창조적인 정신을 찾아 다른 길을 떠난다. 홋카이도의 미적 감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극적인 풍경과 관련 있다. 스카이라인을 완성시키는 강렬한 검은 나무, 산봉우리의 날카로운 햇살, 눈 위에 교차하는 숲 그림자, 화산토 유약을 바른 도자기부터 엄숙한 눈과 하늘 사진, 그리고 아라노 선생과 함께 본 시적인 캘리그래피까지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자연과 예술의 시너지 효과는 홋카이도의 복잡한 역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섬은 19세기 후반에야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천 년의 세월 동안 이곳은 원주민 아이누족의 영토였다. 고대 조몬족의 후손으로 이 땅과 깊은 영적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 아이누족이며, 그들은 낚시, 사냥, 채집 관습부터 의식, 신화, 장인정신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강제 동화에 대한 잔인한 초창기 역사로 인해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 바로 눈에 띄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서 그 영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민가, 전통 농가를 뜻하는 일본어 코민카. 시구치 코민카 빌라의 하이라이트인 조각 돌 온천탕

“홋카이도 예술은 정말 신선한 느낌입니다.” 아라노의 스튜디오를 떠나 서예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니세코의 아리시마 다케오 기념 박물관 Arishima Takeo Memorial Museum에 당도했을 때 호소카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자유롭죠.” 호소카와는 수백 년 된 기술과 스타일을 보존하기 위해 장인들을 훈련시키는 교토의 도자기를 예로 들었다. “라쿠 차 사발 제작자 가문과 달리 저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예술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시구치 Shiguchi는 이러한 자유를 상징하는 곳이다. 광활한 숲이 우거진 계곡에 자리한 이 호텔 겸 휴양 장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힘들게 옮겨온 수백 년 된 전통 목조 농가 ‘고민카(古民家, Kominka)’가 모여 있다. 마치 서까래 아래 둥둥 떠 있는 듯한 다다미방에서 환영의 다도를 즐긴 후 나는 얼른 목욕을 하고 싶어 별장으로 향했다. 아보카도를 반으로 잘라놓은 것처럼 생긴 커다란 돌 욕조에 턱밑까지 몸을 담그고 있으면 시간이 녹아내린다. 오목한 내부를 가득 채운 화산 온천수가 수도에서 마치 붓글씨처럼 우아하게 흘러나왔다. 뻥 뚫린 유리벽을 통해 눈발이 날리고, 뾰족한 나무와 딱따구리의 주홍빛 다리만이 새하얀 풍경을 뚫고 지나간다. 시구치의 설립자인 쇼우야 그리그 Shouya Grigg는 바로 이런 순간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욕조에서 겨우 빠져나온 후 그와 함께 갤러리 겸 레스토랑이자 이벤트 공간인 소모자 Somoza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소모자에서 즐기는 일본식 다도

영국에서 태어나 약 30년 전에 니세코로 이주한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인 쇼우야 그리그는 “고독을 좋아해서 이곳에 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소박한 식탁은 종이처럼 얇은 예루살렘 아티초크부터 아이누 야생 두릅 만두를 곁들인 사슴고기까지 현지에서 채취한 식재료로 완성한 요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갔다. “인간은 고독을 필요로 하면서도 종종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손목에 나무 구슬을 늘어뜨린 채 말을 잇는다.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혼동하죠.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숲속에 혼자 앉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날 나는 반짝이는 설경을 가로지르며 시구치에서 몇 시간을 달려 후쿠시마 다테 Tate시의 외딴 변두리에 도착했다. 자연스러운 질감을 내는 도자기로 유명한 은빛 수염의 아티스트 마나부 코치 Manabu Kochi를 만나러 온 곳이다. 마나부 작가가 직접 만든 나무 가마와 그 근처에 자리한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유약이 가득 담긴 선반 아래 나무 물레가 놓여 있는 곳을 지나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찻잔과 그릇, 꽃병 등 그의 작품이 가득한 방이 나타났다. 이 작품들은 유행을 타지 않는 단순한 형태로 러스트 레드, 차콜 그레이, 초크 화이트를 섞는 캔버스 역할을 한다. 바닥에 앉아 먼지를 머금은 햇볕을 느끼며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20대 시절 인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 내게도 무언가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났다. 이야기는 곧이어 그의 도자기 순례로 이어졌고, 몇 달 동안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텐트에서 잠을 자며 일본 전역을 여행한 끝에 마침내 와카야마 Wakayama의 야생에서 도예가 모리오카 나리요시 Morioka Nariyoshi라는 스승을 만나는 순간까지 왔다. 이제 그는 홋카이도의 산에서 화산토를 캐고 기술을 연마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시젠 Shizen’은 항상 저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는 자연 自然을 뜻하는 일본어를 인용해 설명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도자기 기술이 아니라 하고 있는 모든 일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설경을 연상시키는 작은 흰색 그릇 하나를 손에 들고 나는 남쪽으로 내려가 시라오이 Shiraoi 마을의 포로토 Poroto 호수로 향했다. 그곳의 호시노 리조트 카이 포로토 Hoshino Resorts K AI Poroto에서 며칠 밤을 보낼 예정이다. 일본 건축가 나카무라 히로시 & NAP Nakamura Hiroshi & NAP에서 설계한 이 깔끔한 새 호텔은 자작나무 줄기와 같은 천연 소재, 전통 직물 모티프, 원뿔형 목욕탕 등 아이누 문화를 보여주는 디자인 요소로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바깥으로 하늘로 치솟는 흰 증기가 보인다. 아이누의 오두막에서 영감 받아 만든 원뿔 모양의 목욕탕에서 나오는 입김이다. 가장 먼저 그곳으로 향했다. 어둑함 속에서 실내 목욕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삼각형의 터널을 지나면 호숫가에 자리한 노천탕이 나온다. 여기가 바로 2020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국립 아이누 박물관인 우포포이 Upopoy를 개관하기로 결정한 곳이다. 이는 아이누 문화를 다시 활성화하고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 중 하나였다. 동화 정책은 아이누족의 이름과 헤어스타일, 의상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동시에 낚시, 사냥, 타투와 귀고리부터 고대 의식에 이르기까지 주요 의식이나 관습을 금지했다. 이 정책은 아이누족에 대한 광범위한 차별을 낳았고 오늘날에도 일부 아이누족은 여전히 자신들의 유산을 숨기고 있다. 2019년이 되어서야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을 일본 원주민으로 공식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당시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음 날, 포로토 호수를 끼고 있는 우포포이로 걸어가니 웃는 얼굴의 백합 모양 전구 마스코트가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한다. 전통 방식을 재현한 집은 물론 낚시용 카누와 활 쏘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마을 전체에 걸쳐 세밀하고 세련되게 꾸민 아이누족의 전시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후 동쪽으로 몇 시간 더 이동해 4백여 명의 인구 중 아이누족이 약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니부타니 Nibutani로 향했다. 캐나다 국립미술관, 대영박물관 등이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아티스트 가이자와 토루 Kaizawa Toru의 목공 스튜디오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일상생활은 물론 제사나 제의식에도 사용되는 원형의 납작한 나무 쟁반 니부타니타 Nibutani-ita를 발견했다. 니부타니타는 호두나무와 단풍나무 숲을 배경으로 물고기 비늘, 흐르는 강물, 부엉이와 곰 등 정교한 자연 모티프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이자와가 순수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열여덟 살 때부터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아이누 작품을 만드는 걸 거부해왔어요.” 그가 커피를 홀짝인다. “힘들었거든요. 제 마음이 갇혀 있었어요.”

30대가 되자 가이자와는 아이누족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예술적 표현에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의 대표작이자 지퍼를 열면 전통 의상이 드러나는 아이누 외투를 묘사한 목조 조각을 비롯해 자신의 문화유산과 현대적인 주제를 결합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긴 여정에서 나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마지막 온천욕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수증기가 밤하늘로 솟아오르고, 그 눈보라가 내 얼굴을 향해 소용돌이쳤다. 절묘하고 찰나적이며 초현실적인 이 장면으로부터 홋카이도를 이끄는 창조적 힘은 언제나 자연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인사이드재팬 투어 <홋카이도 패키지>

호시노 리조트 카이 포로토의 로비 라운지

홋카이도 전역을 맞춤형으로 여행할 수 있는 인사이드재팬 투어 InsideJapan Tours와 함께했다. 이 여행사는 세츠 니세코 Setsu Niseko에서 3박, 호시노 리조트 카이 포로토에서 1박, 재두루미로 유명한 외딴 마을인쓰루이 Tsurui와 삿포로에서의 숙박, 그리고 여행의 시작과 끝에 도쿄에서 2박을 포함하는 총 12박 홋카이도 여행 ‘스노위 아일랜드’ 상품을 제공한다. 2인 1실 기준 1인당 $4,175부터(국제선 항공료 제외). 모든 국내선 교통편과 삿포로와 쓰루이에서의 조식 및 개인 가이드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 세츠 니세코
니세코의 번화가인 히라후 지구에 위치한 리카 스파 Rikka Spa는 1백90개의 세련된 벙커 룸을 보유했으며 스키 후에 온천욕과 고요한 휴식을 즐기기 좋다. 호텔 내 5개의 레스토랑 중 사토 히로노리 Sato Hironori 셰프가 이끌며 미쉐린 1스타를 받은 멜리 멜로 유키노 코에 Méli Mélo Yuki No Koe의 요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로비에 걸려 있는 예술가 나와 코헤이
Nawa Kohei의 유리구슬 사슴 머리와 가와카미 리에 Kawakami Rie의 금속 조각, 아라노 요코의 캘리그래피 등 예술 작품 컬렉션이 놀랍다.

📍 호텔 시구치
홋카이도의 또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는 호텔 시구치는 니세코 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로 아주 가까이 있지만, 우거진 숲을 깨끗한 계곡이 가로지르는 광활하고도 새로운 풍경과 함께 도시의 인파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바위 욕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도 레스토랑, 갤러리, 숍의 역할을 갖춘 소모자에는 즐길 거리가 많다. 전통 다도를 체험하거나 구내 갤러리를 둘러보고, 마나부 코치가 만든 도자기를 비롯한 홋카이도 지역 공예품과 예술품을 구입할 수 있다.

📍 아이누 문화
홋카이도 남서부 호시노의 포로토 호수 기슭에 자리한 현대적인 료칸인 리조트 카이 포로토는 아이누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전통 가옥을 모티프로 한 객실 42개를 갖추고 있다. 노천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하이라이트다. 배 모양으로 데커레이팅해 보기에도 멋있고, 게가 맛있는 부야베스 전골 등 아이누에서 영감을 받은 절묘한 저녁 식사도 맛볼 수 있다. 바로 옆의 우포포이 국립 아이누 박물관에는 전통 마을과 첨단 기술 박물관, 요리나 양궁 등의 체험 액티비티가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인 니부타니 아이누 문화 박물관에서는 일상적인 아이누 유물을 친근한 느낌의 옛날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다.

📍 호소카와 키요에
홋카이도 현대 미술계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인 호소카와 키요에는 회화, 서예, 조각, 직물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대표적인 예술가다. 아리시마 다케오 기념 박물관에서 종종 열리곤 하는 호소카와 키요에가 기획하는 전시회는 정부가 지정한 일본의 살아있는 국보급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젊고 재능 있는 신예들과 아이누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우리가 방문한 당시에는 호소카와가 세심하게 기획한 아라노 요코의 캘리그래피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DANIELLE DEMETRIOU
포토그래퍼
AARON JAMIE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