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사이 홍경이 바치는 것들.
HK 올라프손 리사이틀 다녀오셨어요, 혹시?
GQ 어, 맞아요.
HK (에디터 가방에 꽂힌 프로그램북을 보며) 마침 눈에 띄어서. 전 못 갔어요.
GQ 가려고 했어요, 공연?
HK 네. 그런데 시간이 안 맞아가지고. 어떠셨어요? 좋았어요?
GQ 너무. 레코딩보다 연주 현장이 더 좋았어요.
HK 맞아요. 클래식은, 클래식뿐 아니라 무어든 직접 보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클래식 좋아해요, 저도. 올해는 좀 많이 보자 이러고 있어요. 노리고 있어요.
GQ 마침 이번 <지큐>에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물었어요. 슬플 때 듣는 한 곡을.
HK 진짜요? 궁금하다. 이번 책에 나와요? 읽어봐야겠어요.
GQ 홍경 씨에게도 물어봐야겠어요. 그런 곡이 있나요?
HK 좋은데요? 너무 많은데 음···, 이 질문 마지막에 답해볼까요? 조금 생각하다가.
GQ 좋죠. 지난 두 번의 사전 만남처럼 오늘도 자유로운 대화가 되길 바랐어요. 화보를 만들기 전에 먼저 만나보고 싶다는 청은 드문데, 즐겁기까지 했거든요.
HK 감사해요. 저도요. 그냥···, 일취월장한 배우들만큼 화보 작업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하면서 느낀 게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것 같았어요. 순식간에. 과정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번 화보 직전에 기회가 닿아서 발리에서 좋은 사람들과 작업을 하고 왔는데 좋더라고요. 그 결과물이 물론 중요한 게 이 산업이겠지만, 그걸 떠나서 재밌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갑자기 든 생각인데, 저는 일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일을 하며 그런 걸 내비치면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좀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거든요. 그게 좀 못나 보이더라도. 나를 여감 없이 드러내 보이는. 그 짧은 두 번의 만남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냥 그렇게 작업하고 싶었어요. 일만 하고 바이 바이? 재미없잖아요. 너무 재미없잖아요.
GQ 홍경 씨와 대화를 나눈 후 남은 잔상이 있어요.
HK 그래요? 오.
GQ 가령 거리감. 기억하시려나? 스치듯 한 말인데, 이런 자리를 통해 낯섦을 풀기도 하지만 너무 가까워져서도 안 된다는 얘기였어요. ‘이 사람, 거리 두는 사람이군’ 싶던 순간이었달까.
HK 결국 서로가 궁금해야 이 일을···, 그러니까,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새로운 작품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궁금증과 호기심이 일어야 하는 거고, 또 제가 에디터의 직업 특성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찌됐든 이 사람에게 궁금증이 독려돼야 어떻게 찍어볼까 혹은 어떤 질문을 해볼까 싶잖아요. 그런 의미였던 것 같은데 어땠을까···,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말해놓고, 솔직하게.
GQ 그 맥락이었어요. 너무 친해져서 오히려 놓치는 게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런 건 경계하고 싶지만 나는 당신과 친밀해지고 싶다, 종국에는 그렇게 느껴졌어요.
HK 맞아요, 맞아요. 그 거리감이라는 게 저는 중요한 것 같아요. 연애할 때도, 일하는 사람들과도, 모든 것에 다 그래요. 어제 저희 피아노 선생님과 그런 얘기를 나눴는데, 요즘은 뭐든 너무 빠른 것 같아요. 뭔가를 되새김질하는 여유나 시간 없이, 어느 것의 문제라기보단 제가 느끼고 냄새 맡기에는 사회나 콘텐츠라 부르는 것들이 모두 그런 형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너무 빨리 휘발돼버린다는 거죠. 너무 빨리 다 직접적으로 쏘아버려요. 그게 저는 거리감이랑 연관 있다고 생각해요. 적당한 거리감을 갖고, 이 사람이 궁금해야 하고, 이 사람이 한 행동에 빈틈이 있고 이해가 안 돼서 이거를 이렇게 이해해보려고 하고 저렇게 이해해보려고 하고, 저는 어찌됐든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절대 불가능하고, 다만 어떻게 일말에나마 발견해보자는 주의거든요. 연기할 때도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얘기가 좀 ‘와아아앙’ 이러지만···, 그에 대한 고민이 짙어요.
GQ 실상 그때 홍경 씨는 그 누구보다 제 인생에 대해 궁금해했어요.
HK 흐흐흥. 궁금했어요.
GQ 왜 에디터가 됐어요? 첫 인터뷰이는 누구였어요? 아주 촘촘한 질문들이 오랜만이라 반가웠어요. 그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발견하고 싶었던 흔적 같아요.
HK 정말. 그리고 저는 더 그러려고 노력해요. 내가 집에 가서 쓰러지더라도, 그러자고 노력해요.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책을 쓰신 작가의 인터뷰를 봤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사는 게 아니라 그 의미가 있어야지 사는 거라는 말에 공감했어요. ‘내 삶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있어’ 이런, 어떤 의미나 아주 일말의 빛이 있어야 어둠을 견디는 거잖아요. 저만 해도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많이 물어보려고 하고, 남의 일에 온전한 진심이야 못 느끼더라도 혹은 내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찌됐든 꾸역꾸역 물어볼 것이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라고, 그러려고 노력해요.
GQ 책을 더 좋아하세요, 영화를 더 좋아하세요? 홍경 씨가 물었죠. 홍경 씨는요?
HK 저는 요새는 책 같아요.
GQ 아까 작가 인터뷰를 읽었다던 건 무슨 책이에요?
HK 한강 소설가의 <검은 사슴>. 이것만 읽으면 이제 그분이 쓰신 책을 완주해요. <검은 사슴>은 반 자락 정도 읽었는데도 깨달아지는 게 많은 책이에요.
GQ 그 지점이 궁금해지는데···, 둘러 걸어볼까요? 사실 요즘 홍경 씨 덕분에 이 책을 읽거든요. 한강 작가의 <여수의 사랑>. 요만큼밖에 못 읽었지만.
HK 오하하하. 이거 진짜 좋아요. 괜찮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GQ 홍경 씨가 그간 추천한 많은 책 중에서도 이걸 먼저 봐야겠다 한 이유는, <여수의 사랑>은 작가가 만 스물네다섯 살쯤인 1995년에 낸 소설집인데, 그래서 20대의 홍경이 택한 책이었죠. 작가가 내 나이랑 비슷할 때 쓴 옛날 책을 선택한 그 시선이 흥미로웠어요.
HK 제가 되게 놀랐어요. 원초적인 이유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20대에 이걸 할 수 있는 거지? 이런 문체로 쓸 수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랑은 문체가 달라요. <작별하지 않는다>나 <흰>과는 또 다른 느낌이 강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놀라워요. 이 사람은 20대 때 도대체 무얼 느꼈길래 이렇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빛을 좇아가는 거지?
GQ 공감해요. 좋았던 부분을 읽자면···, 저는 이렇게 끝을 접거든요.
HK 좋죠.
GQ 이러면 중고서점에 팔 때 가격이 확 떨어져요. 하지만 또 접고 말았습니다.
HK 그건 또 몰랐네요. 저도 표시해놓은 거 되게, 되게 많아요.
GQ 홍경 씨는 책을 팔지 않을 것 같네요.
HK 네, 팔지 않습니다.
GQ 이런 문장 있잖아요.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지껄였다는 것이 쓸쓸하다는 듯이”. 이 감각을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까?
HK 아무 말 아닌 것 같은데 잔향이 깊게 남는 말들. 이런 게 힘이 있다고 느껴요. 제가 요새 책이 더 좋은 이유와 같아요. 얼마 전부터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고 작업해보고 싶다 해서 손 내밀어서 손짓하고 있는 감독님이 계신데, 감사하게도 좋아해주셔서 감독님이랑 그런 얘기를 했어요. 물론 직선의 형태를 띤 작품도 많아야 하는데 요즘은 직선이다 못해 떠먹여주는 형태 같은 거예요. 내가 느끼는 감정이란 대화를 하다 어떤 말들 속에서 자연스레 발현되고 그걸 상대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서 느끼는 거잖아요. 해석까지는 안 해도 몸이 반응을 하는 거죠. 제가 못 견디겠는 건 자기의 감정을 말로 설명하는 거거든요? 어느 인간이 아주 격분했을 때 말고 자기 감정을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 그러면서 좀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제가 아직 해놓은 것도 많이 없지만. 그런데 분명히 그런 빈틈이 있는, 틈이 있는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GQ 어떤 작품의 감독님인가요?
HK 그건 제가 작업이 이루어지면 알려드릴게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보여드려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항상 갖고 있어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에 대한 것이, 무슨 장르나 줄거리가 아니라, 어떤 느낌적인 것이 저한테 항상 있는데 그게 지금 분명해요.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요. 그래서 이걸 잘 갖고 있자 생각해요. 호들갑 떠는 것 같지만 그냥···, 그냥 어떤 느낌이에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는 것 같고,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지금은 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작품에 있어서 찾아 헤맬 때 느꼈던 예로는 순수함이 좋았어요.
GQ 순수함···. 첫 만남 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싶다”던 말이 오래 남았어요. <더 킹: 헨리 5세> 이야기도요. 홍경 씨 시선대로 다시 보니 갑옷을 두른 왕이라고 해서 더 강인하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 없이, 가령 신체적으로도 일부러 몸집을 키운다든지 하는 설정 없이 완성된 게 보이더라고요.
HK 그런 생각을 가진 지는 꽤 됐는데, 강인함이라는 것은 몸에서도 나올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지조나 신념에서 나올 수도 있잖아요. 카리스마라는 것은. 아무튼 감독이 어떤 면을 보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정이 재밌는 거죠. 몸이 울끈불끈한 사람이 나와서 했으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았겠지만 많이 봐온 것과는 다를 바가 없었을 테니, 어떤 연대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더 킹’은 왕위에 오르는 작업 같지만 제게 그렇게 읽히지는 않고, 수많은 매뉴얼과 고착화된 것과 싸우는 젊은이로 보였어요. 그래서 너무 재밌는 거죠. 기성의 것과 부딪히고 싸움을 회피하지 않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잖아요.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젊은이의 무언가가 보여서 좋더라고요.
GQ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궁금해하는 홍경 씨의 호기심을 스스로에게 돌려보자면 어떤가요? 자신에게 어떤 물음표를 던져요?
HK 결국 ‘어떤 걸 남길 것인가’ 같아요. ‘일을 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보다 ‘내가 그 순간순간에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것들을 부끄럽지 않게 해나가며 남길 것인가’에 대한 게 제일 큰 불안이에요. ‘그러면 뭘 해야 하지?’라는 게 강하고, 그렇지만 제가 선택해왔고 이제 나올 2024년의 것들은 저 스스로에게는 ‘단순히 휘발될 것을 하지 않았어’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런 믿음이 다음에도 이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 불씨를 키워줄 수 있는 결과가 필요할 수도 있고, 더 많이 나라는 사람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자질이 있었으면 일찍이 잘됐을 것이고 저는 그럴 놈은 못 되는구나 느끼고 있어서 되레 좀 조급한 게 많이 사라진 상황이고, 지금은 어떻게 내가 의미 있는 것들을 해나가며 내 20대의 초상을 남길 것인가, 그거 하나예요. 어떻게 내 호기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면서 의미 있는 것을 남길 것인가.
GQ <정말 먼 곳>에서 강길우 배우를 만나자마자 껴안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그 팔의 감정이 충격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훅 덮치는. 평가는 아니고요.
HK 아주 감사하네요. 평가해도 되죠. 평가받는 사람인데요, 저는. 그 작업 있잖아요, 그 역시도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고 중요한가 느끼게 해준 현장이에요. 한 달 동안 화천에서 팀원들이랑만 생활했거든요. 길우 형이랑 얼마 전에도 연락했는데 형이랑 딱 이 정도 크기에 이렇게 눕고 여기 화장실 있는 방갈로에서 한 방을 썼어요.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산 밑 방갈로들에서 아침이면 감독님, PD님, 기주봉 선배님 다 나와서···, 아무튼 뭔가를 찍는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고, 감독님도 그냥 존재해 있길 바랐고, 뭐를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럼에도 그때 당시에 어려웠고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했냐 물으신다면 저도 잘 모르지만 그런 환경 안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작업을 해나가는지, 그게 얼마나 재밌는 건지 느꼈죠. 축복이었던 것 같아요. 재밌다는 게 항상 웃고 허허 이건 아니지만, 힘든 순간에도 일종의 변태 같은 즐거움이 있어요. 저한텐 그게 재미있는 거거든요.
GQ 지난번에 추천한 영화 <블루 발렌타인> 영향도 있나요? 그 영화도 미셸 윌리엄스, 라이언 고슬링이 촬영 전에 한 달 동안 같이 생활했다 했죠.
HK 아, 그건 감독님의 몫이었고 그것과는 무관했어요. 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만은 아니고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어떤 힘이 있어서. 그러니까 오만 가지 감정을 현미경으로 뜯어보잖아요. 아주 끔찍할 만큼. 그런 사람들 좋아해요. 끔찍하게 뭔가 보여주거나 아니면 새롭게 내가 몰랐던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들. 저는 이게 항상 감수성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장르도 저한테 중요하지 않고 그 안에 어떤, 그러니까 아까 어떤 걸 좇느냐는 질문의 답과도 같은데, 중요한 건 어떤 종류의 감정 같아요. 저는 그걸 찾는 게 대본 보면서 재밌는 지점이고, 책을 읽으면서 재밌는 부분이거든요.
GQ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HK 책은 <검은 사슴>이 있고, 영화는 <외계+인 2부>를 고소한 팝콘 큰 거 하나를 다 먹으면서 아주 재밌게 봤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아워>가 러닝타임이 5시간 30분인가, 아무튼 감기 걸린 상태에서 진땀을 흘리면서 봤는데 너무 좋았고, 또 미야케 쇼라는 일본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넷플릭스에 있더라고요. 지금 일본도 N포세대라고 하나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바라본 지금 20대들을 아주 희망차게 또 재미있게 그리고 매혹적으로 그려냈더라고요. 제가 아주 사랑하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천국의 그림자>, 최근 개봉한 <사랑은 낙엽을 타고>도 봤어요. 피아노는 오늘도 치고 왔고. 주로 피아노로 푸는 것 같아요. 피아노도 잡식하고 있어요.
GQ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혹시 떠올랐나요?
HK 아, 그런데 슬플 때라기보단 그냥 지금 제가 좋아하는 곡이 있어요. 슈만-리스트의 ‘헌정’. 슈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클라라를 위해서 말 그대로 헌정하듯 쓴 가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연주로 듣고 있는데 정말 좋아요. 와 너무 좋다, 몰랐다, 이러면서 요새 듣고 있어요. 제목도 좋지 않아요? 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