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는다. 소음을 내지 않는다. 숨소리마저 낮춘다. 무대에 몰입하면 가능할 관객의 자연스러운 집중이 언젠가부터 객석을 긴장시키는 송곳이 됐다.
글 /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공연 칼럼니스트이기 전에 공연 애호가인 나는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듣기 전, 관객들은 상당히 많은 공지와 마주해야 한다. 허가되지 않은 촬영과 녹음은 금지합니다. 휴대 전화의 전원을 꺼주시길 바랍니다. 음식물의 반입 및 섭취를 금합니다. 등받이에 등을 붙인 바른 자세로 관람 부탁드립니다. 사회적 재난이 발생한 후에는 비상구 위치 안내가 추가됐고, 스마트워치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시리’와 ‘빅스비’가 반응하니 극장 모드로 전환해달라는 내용도 생겼다. 작품에 따라서는 함께 온 아이들의 관람 태도를 지도해달라는 보호자를 향한 부탁과 커플들의 애정행각 자제 문장도 있다. 볼 캡과 똥머리 금지, 과도한 리액션과 다양한 소음 자제 등 비공식적인 부분까지 살피면 공연장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수십 가지에 달한다.
몇 달 전, 한 뮤지컬 공연장에서 메모하는 기자와 이를 제지한 관객 사이에 설전이 오갔다. 해프닝으로 지나갈 일이 논란이 된 것은, 기자가 ‘취재 비하인드’라는 명목의 기사로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을 작품과 제작사, 관객의 좌석까지 구체적으로 명기해 폭로했기 때문이다. 기자의 업무를 방해한 관객의 행동도 잘못됐지만, 이를 기자라는 권위를 내세워 공격한 점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하는 관람 문화는 공연계 내부의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온라인상에는 수많은 맥락이 삭제된 채 ‘시체관극’이라는 자극적인 단어에 각자의 불쾌한 경험을 덧붙인 비난으로 가득했다. 공연예술 관객은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눈에 보이는 존재를 비난하는 일은 쉽다.
공연장에서는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을까. 휴대 전화 사용이나 촬영 금지 등 공지의 대부분은 공공장소에서 모두가 지켜야 할 기본 에티켓이다. 다른 게 있다면, 공연예술이라는 매체와 물리적 공간의 특수성에 기반한 관람 문화가 더해졌다는 점이다. 공연예술은 순간의 예술이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다시 찾아볼 수 없다는 특징이 ‘유별나다’라고 비난받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시간과 공간이 고정적인 데다 휘발되는 매체라, 공연예술은 희소성을 갖는다. 특히 한국의 공연예술 시장은 일정한 기간에 공연되는 리미티드 런이 다수다. 관용구가 아니라 지나간 공연은 정말로 돌아오지 않는다. 초연으로만 마무리되는 작품도 상당하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재공연되기까지는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렵게 리바이벌이 돼도 작품의 캐스팅이 그대로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배우가 같은 역을 연기해도 같은 공연이라고 말할 수 없고, 멀티 캐스팅이 일반화되면서 원하는 배우를 보려면 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고정적이되 유동적이라는 특징은 공연예술의 가장 큰 매력인 동시에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하다.
평균적으로 뮤지컬은 1백 회, 연극은 40회 정도 공연된다. 코로나19 이후 비상업적 연극은 10회 미만 공연 후 폐막하기 일쑤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을 몇 명의 관객이 볼 수 있을까. 2023년 11월에 서울 공연을 끝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천2백30석의 샤롯데 씨어터에서 총 1백61회 공연했다. 19만 8천30명만 공연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팬텀 역의 배우가 조승우, 최재림, 김주택, 전동석까지 넷이라 조승우의 팬텀을 볼 기회는 1/4로 줄어들었다. 더블 캐스팅인 크리스틴과 라울, 칼롯타까지 원하는 배우들로 조합을 모두 맞춘다면, 한 회차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경쟁률을 뚫어야 할까? 어느새 1층의 2/3가 VIP석으로 배치되어 좌석 등급은 무의미해졌고, 물가 상승을 핑계로 티켓 가격은 19만원까지 치솟고, 할인율은 줄었으며, 티켓 예매 플랫폼 수수료마저 올랐다. 적은 기회, 높은 티켓 가격, 다시 보기가 불가능한 현장성을 이유로 공연장에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온전히 즐기려는 관객이 다수를 이룬다.
관람 문화의 또 다른 변수는 바로 공연장이다. 2천 석 규모의 대극장이라 하더라도, 공연장은 관객의 퍼스널 스페이스가 제대로 지켜지는 공간은 아니다. 열과 열 사이의 좁은 간격과 객석의 낮은 경사도로 인해 관객의 시야도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 콘서트처럼 곳곳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거나 영화처럼 클로즈업이 되는 것도 아니라, 최대한의 효과를 누리고 싶은 관객들은 더욱더 무대 컨디션에 예민해진다. 좁은 공간에서는 작은 움직임으로 인한 각종 마찰음과 의도치 않은 접촉이 문제가 된다. 장마철에는 우산을 담은 비닐이, 겨울에는 패딩이 주로 컴플레인의 소재다. 최근에는 관객의 물리적 불편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극장의 노력이 눈에 띈다. 해외 공연장의 코트 룸까지는 아니어도, 소극장에서는 자율 물품 보관소를 적극 활용하는 중이다. 대학로극장 쿼드에서는 모든 관객의 우산을 따로 보관해 소음으로 인한 관객의 불만을 사전에 차단하기도 했다.(이 방법이 과연 효율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관객의 수가 정해져 있다 보니, 공연예술은 상당 부분 폐쇄적인 면이 있다. 소극장 창작 뮤지컬은 특히 그렇다. 작품에 대한 정보는 적고 공간은 협소하다. 잘 알려진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처럼 ‘이벤트’로 접근하는 데도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결국 소극장 창작 뮤지컬은 배우나 창작진,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관객이 찾는다. 소극장 창작 뮤지컬이 ‘쇼’보다는 ‘드라마’ 중심이라는 점도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온전한 관극을 위해 스스로의 자극을 최소화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체관극’이라 불리는 행동이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배려라는 점이다. 그러나 소극장 창작 뮤지컬 시장이 다회차 마니아 관객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 과정에서 움직임을 최소화한 태도가 표준처럼 여겨졌다. 강요의 의도가 없고 직접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위압적인 공기를 형성한 것만은 사실이다. 공연장에서 마주하는 것이 공연예술이라는 이름의 ‘엔터테인먼트’임을 떠올렸을 때, 관객의 자율성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의 공간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에티켓은 필수다. 촬영하지 않기, 휴대 전화 켜지 않기, 일행과 이야기하지 않기. 이것만 지켜도 충분하다.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과는 무관하게, 나는 ‘시체관극’을 향한 비난이 일종의 혐오 메커니즘으로 읽힌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 대신 일정한 틀에 밀어 넣은 채 비난하는 일 말이다. 논란이 되는 관람 문화가 어떤 이유와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난의 중심에는 몇몇의 극단적인 사례를 앞세운 채 만들어진 ‘우월감에 사로잡힌 유별나고 예민한 연뮤덕’이라는 프레임이 있었다. 실제로 그런 관객이 존재하느냐와는 상관없다. 자신의 불편함을 선명하게 정리한 듯한 잘못된 프레임이 비난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됐다. 논리와 소통의 빈자리를 채운 적개심이 서로를 향한 조롱과 배척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문제의 핵은 휘발되고, 혐오라는 게임만 남았다. 물론 세상의 모든 논란에서 구조상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맥락을 짚어내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표현의 자유’가 혐오 표현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이것이 과연 ‘시체관극’만의 문제일까? ‘김치녀’와 ‘맘충’을 거쳐 ‘페미 검증’에 이르는 여성 혐오, 장애인 이동권 선전전을 향한 날 선 말과 행동, 진돗개는 모두 다 사납다는 편견과도 맞닿는다. 지금의 공연예술 관람 문화가 불쾌하거나 싫을 수는 있다. 감정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합적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혐오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시체관극’이라는 논란에서,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불편함의 원인을 살피고, 내가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고, 특별한 프레임 없이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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