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요리에 높은 평가를 할 때 무심코 내뱉는 ‘본연의 맛’이라는 건,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글 / 이정윤(다이닝미디어아시아 디렉터)
브루노 무나리가 그랬다, 자연스러움은 단순함의 미학이라고. 1960년대에 미니멀리즘이 본격적으로 예술과 건축 디자인을 중심으로 마음을 사로잡을 때, 오트 퀴진의 근원인 프랑스 요리도 큰 영향을 받았다. 신선한 식재료를 중심에 놓고, 밀가루 베이스의 묵직한 버터나 크림소스보다는 맑고 투명하며 가벼운 질감의 소스를 추구하며, 단순한 조리법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요리의 시대를 연 것이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식재료 조합도 환영받았다. 이후 미니멀리즘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기쁘게 접시 위에 표현해내는 패러다임으로 세계의 위대한 셰프들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요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셰프, 알랭 뒤카스나 피에르 가니에르의 스타일도 이런 세련됨과 고전의 절묘한 조화를 찾는 과정에서 탄생한 시대의 풍경이다. 건강, 햇살, 아름다움, 기분 좋은 바람 같은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간결하고 산뜻한 느낌으로 서로 연결되며 자연스러움의 풍경을 구축해왔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에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 본연의 – 좋은 맛은 오감으로 우리를 매료한다. 상하지 않은 신선한 식재료를 인지하게 하는 시각, 혀에 닿는 수분감 같은 촉각, 싱그러운 향기의 후각, 입에서 느껴지는 선명하고 생동감 있는 미각, 사각거리는 소리 같은 청각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이런 느낌이어야 할 맛’은 접시 위의 즐거움이 된다. 그래서 여전히 훌륭한 요리를 논할 때, ‘본연의 맛’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수식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소고기 본연의 맛은 무엇인가? 갓 도축해 근육이 불끈거리는 소고기를 썰어낸 생꾸리살의 맛부터 살짝 숯불에 구운 토시살, 양념에 재워 푹 찐 갈비찜, 한 달간 드라이 에이징을 거친 뒤 손질해 구운 등심 스테이크의 맛은 모두 다르다.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대체로 자극적인 양념 없이 순수하고 담백하면서도 ‘재료 본래의 맛’을 잘 살린 요리를 내는 곳들이다. 그런데 간결해 보이는 스시의 구성에서도 과연 네타가 원재료의 맛을 대표하는지는 의문이다. 횟감의 기초, 광어만 따져도 갓 잡아 숭덩숭덩 썰어 먹을 때와, 필렛으로 손질해 8시간 숙성한 뒤 다시마에 30분간 감쌌다가 자른 것과는 식감도 맛도 아예 다르다. 새끼 전어 코하다도 짧게는 이틀부터 3주까지 숙성을 거치는데, 시간에 따라 단백질 조직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며 생기는 특유의 감칠맛과 향미는 갓 손질한 때와는 사뭇 다른 맛의 지형을 펼쳐낸다. 대체 어느 쪽이 재료의 진짜 맛을 표현하고 있나? 셰프가 기술을 사용해 의도대로 변형하고 구성한 맛은 “인공을 가하지 아니한 본디 그대로의 자연, 생긴 그대로의 타고난 상태”라는 본연의 사전적 정의와는 이미 제법 다르다.
한편 본연의 맛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설탕과 소금, 마늘, 고춧가루를 잔뜩 넣은 양념도 따져보면 모두 자연에서 온, 각각의 요소가 갖춰야 할 ‘본연의 맛’이 아닐 이유가 없다. 사탕수수 즙으로 만든 설탕, 바닷물을 증발시킨 소금, 마늘을 그저 빻은 것. 이보다 더 자연 그대로의 맛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낙지볶음을 먹으며 “맵고, 짜고, 달고, 마늘 향이 가득한 걸 보니 역시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요리군요”라고 말할 수 있는 극도의 원칙론자는 흔치 않다.
사실 ‘본연의 맛’은···, 남자들이 흔히 말하는 ‘자연 미인’ 같다.(미안하지만 그건 거의 상상 속 관념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과일처럼 식재료가 곧 음식인 경우조차 종자 개량을 거쳐 최상의 상품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제멋대로 자란 야생 딸기와 설향, 죽향, 메리퀸 같은 상품 재배 딸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요리를 거치면 더 복잡해진다. ‘본연의 맛을 살린 요리’는 “중년의 자연 미인”이라는 말과 똑같다. 시술이나 화장 없이 드러낸 자연 그대로의 주름은 나이 들어 보인다고 불편해하고, 팽팽하게 채워 넣은 필러는 어색하다며 거부한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환상 속 이미지는 진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호감을 주면서도 쉽게 알아채기 힘들 만큼 임계점까지 꽉 채워 관리와 시술을 반복한 고도의 완성물’인 셈이다.(이효리를 보고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는 소리나 똑같다.) 요리도 마찬가지. 원재료의 맛과는 사뭇 다른, 머릿속의 표상이다. 쌀의 맛을 떠올릴 때, 익히지 않은 생쌀의 식감과 풍미를 연관 짓기는 쉽지 않다. 아무도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밥’의 형태로 요리된 모습과 경험을 상상하며 이것이 쌀 본연의 맛이라고 느슨한 연관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아마 쌀의 맛을 떠올리라고 할 때 바삭하고 고소하게 구운 누룽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저마다의 경험 속에서 가장 익숙하고 표준화된, 혹은 이상적으로 따지는 맛에 가까운 느낌을 모호하게 연결 짓는 단어가 ‘본연의 맛’이다. 그러니까 쌀 아이스크림, 쌀 음료 같은 것들이 느슨하면서도 이해할 만한 경계 안에서 고리를 만들며 사람들을 설득한다. 소금도, MSG도, 숙성이나 발효도 좋지만 딱 ‘머릿속의 자연스러움’이 성역처럼 지켜지면서도, 맛있을 때. 정확한 기준은? 당연히 없다. 본연의 맛이라는 느슨하고 모호한 이미지가 심각하게 침해받지 않으면서도, 왠지 좋은 맛이 날 때 누군가 외친다. “셰프가 본연의 맛을 참 잘 살리는군요!”
이 일에 빠져들던 2013년경, 내게 요리와 레스토랑에 관한 셰프들과의 대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건 없었다. 대부분의 파인 다이닝 셰프들이 누가 가르쳐준 정답을 읊듯 ‘식재료’가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던 때였다. 가장 좋은 식재료를 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고, 그 재료가 품은 맛을 잘 살려내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당시 TV에 출연하는 유명 셰프였고, 지금도 여전히 수십억 매출 레스토랑으로 회자되는 곳을 디렉팅하며 현업에서 활동하는 김 셰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범한 재료에 기술을 더해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짜 셰프의 능력이라고 봐. 식재료가 좋으면 맛있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요리를 직업으로 삼았다면 별맛 없는 재료로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해.” 꽤 신선하게 들렸다. 다른 이들은 계절에 맞춰 나오는 최고의 송이버섯을 구해 그 향을 접시 위에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고심할 때, 마트에서도 구할 수 있는 감자로도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는 그 말이. 단순하게 생각하면 전자는 본연의 맛을 추구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식재료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와 요리 테크닉이 중요하다는 셰프가 결국 같은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현이 달랐을 뿐. 요리는 바로 먹기 힘든 자연을 ‘맛있음’으로 바꾸려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다. 소금을 치고 숙성을 하고 굽고 찌는 모든 과정, 어떤 다른 재료와 매치해야 맛의 균형이 맞는지 수십 년간 귀납적으로 완성한 방대한 아카이브다. 모든 출발점은 자연이었고, 그 도착점은 인간의 혀와 코였다. 같은 재료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자연 자체 – 식재료의 종자를 개량하고, 주방에서는 이것을 다양한 조리법으로 다루어낸다. 그 과정에서 요리 트렌드건, 셰프의 개성이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식재료 원물의 맛이나 향을 얼마나 잘 살려낼지는 정도와 선택의 문제다. 잘 익은 토마토를 썰고 그 위에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 바질 잎 몇 장, 소금과 올리브유만 뿌려도 요리가 되지만 이 요리를 구성하는 치즈도, 올리브유도 그냥 소 젖이나 올리브 열매 본연의 식감, 맛과는 차이가 크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랍스터를 아무리 핥고 깨물어도 우리가 갑각류에서 기대하는 고소하고 진한 감칠맛은 느낄 수 없겠지만, 잘 뽑은 비스크 소스는 랍스터와 새우, 꽃게를 모두 연상시키는 달큰하고 폭발적인 바다의 풍미로 자연을 표현한다. 누군가에게 비스크 소스는 ‘본연의 맛’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당신이 들기름 메밀국수를 먹으며 ‘본연의 맛’을 좋아한다고 할 때, 누군가 “과연 본연의 맛이 뭔데?”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며 메밀과 들깨를 한 움큼 입에 넣고 씹어보라고 하거나, “나 또한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 낙지볶음이 최애 음식”이라고 할 때 놀라지 말기를. 아마도 이 글을 먼저 읽은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