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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 코에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식이 아니다

2024.03.12전희란

향이 코에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별한 미식 경험이 될 수 없다. 친절한 서비스나 아름답고 기하학적인 플레이팅으로도 부족하다.

글 / 이정윤(다이닝미디어아시아 디렉터)

나이가 들수록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현명함으로 포장된 무던함에는 그림자처럼 권태가 따라온다. 감정의 기복이 낮아진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일들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기억은 반드시 감각적인 경험과 느낌이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이킨 모든 순간은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놀랍거나, 지루하다. 매일을 살아내며 쏟아지는 보고, 듣고, 만진 모든 감각은 특별한 감정이 없다면 기억의 서재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망각의 쓰레기더미로 사라진다.

삶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첫 번째(?) 결혼식이나 부모님의 칠순 잔치처럼 때로는 평생 잊고 싶지 않은 날들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 음식이 빠질 수 없다. 활기찬 사람들과 가득 차려진 음식은 문화를 막론하고 어떤 원형적인 이미지로 우리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듯 하다. 중요한 날이니, 특별한 음식을 먹고 기억을 남기라고. 평소 선뜻 가기 힘든 파인 다이닝은 기억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아무튼 보통 날과는 좀 다른 순간이다.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요리에 대한 탐닉이, 영원히 남을 추억에 대한 기대와 어우러진다. 셰프는 테이블에 앉아 설렘으로 반짝이는 눈들을 바라보며 고민하게 된다. 강렬한 행복함과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할 만한 좋은 요리로, 권태로운 삶에 자극을 달라는 미션, 성공 가능할까?

수준 높은 미식은 무엇인지, 과연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요리가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미학적 고찰과 같다. 사실 ‘맛있음’이란 개인의 경험으로만 존재한다. 당신이 아무리 맛있게 느껴도, 내가 맛이 없다고 느끼면 다 무슨 소용이랴. 꼬투리를 물면 아름다움도, 좋은 맛도,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내 입에 맞으면 그만’이라는 허무함으로 빠지기 쉬운 이유다.

답이 없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우리의 흥미로운 감각인 ‘후각’에 집중해보자. 인간의 감각 중 ‘느낌’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유일한 감각이 바로 후각이다. 시각이나 미각, 촉각 같은 다른 감각은 시상을 거쳐 대뇌로 정보가 전달되고 기존의 기억과 비교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해진다. 짧은 순간이지만 먼저 인식을 하고 판단해야 좋은지 나쁜지 감정이 뒤따른다는 의미다. 그런데 후각은 대뇌 피질을 거치는 중간 과정 없이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로 돌진한다. 그래서 어떤 향을 맡을 때, 도무지 이해할 겨를도 없이 이미 강렬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주인공이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다가 행복의 강렬한 소용돌이와 함께 유년 시절의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묘사가 있다. 이 구절은 너무 핵심적인 후각의 역할을 설명해서 뇌과학에서 “프루스트 현상 Proust effect”으로 통용될 정도다.

맛을 느끼는 건 향을 맡는 것과 아주 밀접하다. 맛이란 미각과 후각의 오케스트라다. 코를 막고 먹을 때 대부분 양파와 사과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험은 유명하다. 딸기나 복숭아 같은 과일을 떠올리면 단맛이나 신맛의 실체보다 ‘향’의 중요성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향을 찾아 기꺼이 지갑을 연다. 한 병에 수천만 원에 달하는 와인은 결국 향이 전부다. 시거나 떫고 달콤한 맛의 조합만으로는 세계 최고의 와인이 탄생할 수 없다. 강렬한 향의 화이트 트러플이나 특유의 기품 있는 송이버섯도 향이 없다면 1천원짜리 새송이버섯과 다름없다.

이런 이유로 좋은 요리를 판단할 때 향은 절대적이다. 뇌과학적으로 감정을 촉발하고, 감각적으로 맛을 완성하니까. 하지만 좋은 향을 접시 위에 올리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대체로 자연의 향이란 휘발성의 것들이다. 갓 수확한 바질 잎과 오래도록 플라스틱 팩에 담겨 유통된 바질은 같은 허브인가 싶을 만큼 차이가 크다. 늘상 먹는 쌀도 도정일이 지날수록 점점 향이 옅어진다.(그래서 어떤 레스토랑에서는 매일 직접 쌀을 도정한다!) 조리하는 과정에서도 향은 끊임없이 소실된다. 재료에 열을 가할 때 일시적으로 강렬한 향이 뿜어져 나오긴 하지만 이 또한 급격히 사라진다. 그래서 이 사라지기 쉬운 자연의 향들을 보석 다루듯 정교하게 세공해 식탁 위에 올리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봄나물을 주제로 한 코스 요리를 먹은 적이 있다. 한국의 봄나물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알기에 굉장히 기대한 자리였다. 그런데 음식을 다 먹고 나니 봄나물을 하나도 먹은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어떤 봄나물의 향도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요리가 나왔고 식감이나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봄에 나는 갖은 초록빛 풀들의 영혼, 그 향을 담아내지 못한 요리는 미식의 범주에 들기 어려웠다.

셰프들은 향을 내기 위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바나나 없는 바나나 맛 우유처럼 산업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음식은 이미 인공 향에 지배되었다.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샐러드에 트러플이 스치지도 않은 트러플 향 오일을 쓰거나, 불맛을 내는 화유를 섞어 요리하는 중국집이 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최상의 요리를 내겠다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라면 인공 향은 좀 부끄럽다. 자부심 강한 셰프들은 대부분 제철 식재료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오롯이 자연이 만들어낸 섬세한 ‘진짜 향’을 다룬다. 쉽지 않고, 돈도 많이 든다. 해산물 육수를 오래 끓이면 향이 날아가고, 향을 살리기 위해 짧게 끓이면 맛이 진하게 우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셰프는 향이 진하고 화려하면서도 맛까지 풍부한 육수를 위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재료를 넣어 맛의 농도를 올린다. 때로는 요리를 서빙하는 방식으로 향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다양한 허브를 태워 향을 입힌 스테이크를 낼 때, 고객의 테이블 앞에서 태운 허브와 스테이크가 담긴 박스를 열어 향이 먼저 코끝을 자극하게 하는 것처럼. 미국 시카고의 3스타 레스토랑 알리니아 Alinea에서는 라벤더 향을 추출한 공기를 비닐팩에 주입하고 리넨 베개 커버를 씌워, 누가 봐도 흰색 호텔 베개 모양으로 고객 테이블에 올렸다. 이 베개를 바늘로 찔러 속에서 흘러나오는 라벤더 향을 느끼며 버섯 요리를 맛보는 창의적인 메뉴였다. 셰프의 선택이 모여 일상과는 아주 다른 요리가 완성되고, 그 덕에 드물지만 몇몇 레스토랑에서는 요리를 쳐다보기도 전에 기분 좋게 올라오는 은은하고 좋은 향에 “맛있겠다!”는 감탄이 터져 나온다.

이토록 미식 경험에서 중요한 후각이지만 다른 감각에 비해 그 중요성은 쉽게 잊힌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 반면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면 불편하긴 해도 대부분 그럭저럭 살 수 있다. 즉각적으로 일상을 인지하고 경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보고,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향을 표현하는 말도 거의 없다. 촉각을 표현하는 말이 따갑다, 간지럽다, 차갑다 등 다양한 반면 향에 대한 서술어는 장미 향, 낙엽 향, 빵 냄새처럼 모호하게 대상을 지칭하는 말에 기댈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기억의 감각 비율은 후각이 압도적이다. 매일 생성되는 모든 감정의 75퍼센트가 냄새로 인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정밀하지도 않고, 어딘지 소외된 감각 같지만 놀랍도록 삶의 기억을 채우는 후각의 메커니즘을 안다면, 다음 식사에서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며 먼저 향을 음미해보자. 과연 평생 추억할 식사가 될까.

향이 코에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별한 미식 경험이 될 수 없다. 친절한 서비스나 아름답고 기하학적인 플레이팅으로도 부족하다. 주방에서 갓 나온 특별한 날의 음식에 향이 없다면 어떻게 가슴에 남겠는가. 섬세하고 미려한 향이 잔잔한 선율처럼 이어지며 기억의 베틀에 실을 넣을 때, 드디어 아름다운 직물이 짜이는 셈이다. 감정과 기억, 욕망을 자극하며 지루해진 삶에 색채를 더할 수 있는 접시 위의 향을 찾아내는 즐거움으로 음식을 바라보면 어떨까. 삶의 숨겨진 본능을 두드리는 가장 유혹적이고 도발적인 감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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