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의 폼.
GQ 순수와 위험, 오늘 주제를 그렇게 정해봤어요. 순수한 위험, 순수하게 위험한, 순수해서 더 위험한.
BB 저는 순진하지는 않지만 영혼이 되게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에게도 솔직하고, 남한테도 그래요. 순수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본능이란 게 악이면 성악설 같고, 본능이 선이면 성선설 같아요. 절대적인 선이나 악은 없다고 생각해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가, 아닌가의 문제죠.
GQ 달라 보이는 두 가지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새롭게 보게 하는 비비의 워딩을 좋아해요. 가령 “조용한 소음”, “싫어질 만큼 좋았어요”, “두렵고 좋았습니다”, “다정하고 야한” 같은. 모순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BB 모순, 좋지 않아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가 너무나 많잖아요. 관계, 시간, 감정···. 이것들이 얽히고설켜 무한대의 숫자, 경우의 수를 만들잖아요. 가끔 “나에겐 모순이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뭐랄까, 즐거워요. 모순이 없다? 정말로?(씨익)
GQ 이런 생각은 언제 피어난 것 같아요?
BB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았어요. 궁금했어요. 좋고 나쁜 건 왜 존재하는 걸까? 왜냐하면 저는 자기 혐오가 되게 심했거든요. 일곱 살 때 할머니에게 물어봤어요. 할머니는 할머니 자신이 좋아? 저는 제가 너무 싫었거든요. 제 자신이 제일 큰 헤이터였어요. 그래서 누가 저한테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인생이란 게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끝낼 수 있는 게임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더 용감하게 살 수 있었고, 그래서 우울하고 불안했어요. 그런데 살다보니 생각과 다르더라고요.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하니까 또 벽인 거예요. 나갈 수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GQ 불현듯이요?
BB 정신이 퍼뜩 들었어요. 여기서 끝낼 수가 없구나. 이렇게 계속 살다간 평생 우울과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었어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살 거라면 행복해야 한다. 그 생각이 2년 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GQ 제 마음을 툭 치고 간 비비의 몇 가지 얼굴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거예요. <여고추리반 2>에서 멤버들이 예나에게 “네가 만만해 보여서 걔가 그랬나봐”라고 이야기할 때 비비는 용기를 내어 말하죠. “아냐, 예나가 얼마나 멋있게 생겼는데.” 떨리는 마음을 밟고 일어서는 얼굴이었어요.
BB 예나가 평생 귀엽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을 것 같았어요. 왜? 귀여우니까. 그런데 “만만하게 생겼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어요. 말하면서 저도 웃기더라고요. 예나가 너무 귀엽긴 하니까요. 그래도 예나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GQ 어쩌면 예나에게 본인을 투영한 걸까요?
BB 음···, 어쩌면요. 바보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싶지 않을 것 같았어요. 어릴 때부터 저를 모자라게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ADHD가 너무 심해서 어디에도 집중을 잘 못 했어요. 준비물도 못 챙기고, 물건도 잘 잃어버리고, 사람들 말도 잘 못 듣고요. 분명 나는 말한 줄 알았는데, 제 생각 속에서 이야기한 것일 때도 있었고. 저는 제 안에 살고 있었어요. 제 생각, 제 세상 안에 사는 사람이었고, 외부의 모든 것은 객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봐줄까 계속 궁리했어요. 그러면서도 사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영특한 사람이라는 걸.(미소) 늘 삶과 죽음, 우주 같은 고차원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GQ 얼마 전에 가방 속을 공개하는 영상 콘텐츠에서 ADHD 약을 소개했죠. 응원의 댓글들 보셨나요?
BB 요즘 댓글을 잘 못 읽어서.(웃음) 그런데 그게 왜요? 감기 걸려서 감기약 먹는 거랑 똑같은 건데. 그게 파격적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GQ 고백 자체로 용기일 수 있으니까요.
BB 제가 시대를 잘 만나 태어난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선배님들이 열어주신 것도 있고, 저는 ADHD 중에 진짜 잘 풀린 케이스예요.(공백) 저는 이제야 찾은 제 평화가 너무 소중해요. 지금의 삶이 좋고, 행복해요.
GQ 그럼에도 평화 안에서만 머물지는 않을 것 같은걸요. 좋은 의미에서요.
BB 맞아요. 인생이 저를 그렇게 두지 않더라고요.(웃음)
GQ 칭찬과 비판 중 어느 쪽이 더 동력이 돼요?
BB 칭찬요. 그래서 칭찬만 봐요. 저를 욕하는 댓글은 눈에 잘 안 들어와요. 악플에 상처받을 때도 있었죠. 이 일을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랬어요. 직업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리고 제 인생을 좋아하게 되니까 남의 의견이나 댓글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의 모양이 다 다르듯이 누구나 모난 부분이 있고, 사람들은 안쪽으로 숨기고 있었을 뿐이고, 나는 그 모난 부분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을 뿐이죠.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인데요. 여러분, 좋고 나쁜 것도, 맞고 틀린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 세상 안에서는 내가 다 맞을 수도 있는 거예요.
GQ 굉장히 건강한 에너지가 풍기는데요.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예요?
BB 아니요. 음악은 저를 더 심연으로 빠지게 해요. 문장 실력과 상관없이, 글 쓰는 사람은 다 그런 것 같아요. 글은 만져지는 게 아니라 내용 그 자체잖아요. 잘 아시죠? 창작과 창의는 다른 영역이죠. 없는 것을 만드는 창의의 영역은 불안이 작용하는 원리와 똑같은 것 같아요. 지금 당장 글을 쓴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지는 않죠. 심연의 멜랑콜리함을 끌어올려 폼을 올리고 머릿속의 동력을 팽팽 돌린 다음 과열되었을 때에야 겨우 툭 나오잖아요. 그리고 과열된 것을 어디 던져놓아도 바로 꺼지지도 않고, 차갑게 식지도 않죠. 그 잔열이 일상생활에서도 이어지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거기서 에너지가 낭비되고요. 결국 없는 것을 만드는 작업은 불안과 우울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불안, 우울을 없애고 싶은 분들, 당장 글 쓰는 일을 관두세요.(웃음)
GQ 어떤 사람이 섹시하다고 생각해요?
BB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 직업을 잘 해내는 사람,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 누군가는 하찮게 보는 일이라도 스스로가 ‘나는 누가 뭐래도 이 일을 X나 멋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섹시하다고 느껴요. 누가 뭐래도 내가 제일 잘한다, 난 다르다,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다, 나는 쓸모 있고 정말로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최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총기가 있어요. 사실 ‘최고’인 사람은 별로 없어요. 저도 최고가 될 수 없어요. 애초에 예술에서 등급을 매기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1, 2위를 정하기는 너무 어렵죠. 저는 최고가 아니지만, 이런 제 자신을 최고로 만들었어요. 굉장한 무언가가 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쨌든 다르잖아요 저는.
GQ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고 작업물만으로 느끼기도 해요? 이 사람은 섹시하다.
BB 작업물이 섹시하다면 아티스트로서 섹시한 사람은 분명히 맞죠. 실제로 만났을 때 작업물과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굉장히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이 분노와 광기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사람 안에 있는 분노를 다 뽑아내어 굉장한 음악이 나왔을 테니까. 사람에게는 되게 많은 모순이 있잖아요. 겉으로는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나쁜 놈일 수도 있고, 사람은 좋은데 자기 일을 하나도 못할 수도 있고요. 그래도 저는 그들을 존중해요.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니까요. 저는 객체를 인식하되,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봤다, 끝. 이 사람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고 인지하는 건 더 관계가 깊어졌을 때부터예요.
GQ 쉽게 판단하지 않는 건, 쉽게 판단 당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BB 그런 것 같아요. 남을 계속 판단하다 보면 나에게도 판단의 잣대가 오잖아요. 그래서 세상에 어떤 필름을 대지 않고, 색안경을 끼지 않고 인식하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판단하지 않기가 쉽지 않죠. 또 금세 나쁜 XX 하면서. 에헤헤.
GQ 지금의 비비를 만든 장면 중 선명하게 떠오르는 찰나가 있어요?
BB 제가 꿈을 진짜 많이 꿔요. 중학생 때 꿈을 꿨는데 드넓은 곳에 저 멀리까지 물이 차 있었어요. 마치 노을 지는 우유니 사막 같았어요. 발목까지 찬 물이 찰랑찰랑하는데, 굉장히 큰 물고기들이 제 다리 사이에서 팔자를 그리면서 헤엄쳤어요. 꿈에서 그 광경을 본 후로 제 인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 안의 어떤 것을 풀어내는 계기, 예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GQ 요즘은 어떤 꿈을 꿔요?
BB 제가 원래 원룸에 살았는데, 1년 전부터 살던 집에서 점점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꿈을 꿔요. 집은 계속 다른데, 어쨌든 계속 커져요. 처음에는 되게 외로웠어요. 6~7층 높이의 300평 집으로 이사 가서 혼자 우두커니 있는 거예요. 그러다 점점 더 커져서 친구들도 초대하고, 최근엔 필굿 뮤직 식구들과 같이 사는 꿈도 꿨어요. 외로움으로 시작한 감정이 꿈을 꿀수록 안정되고 평화로 바뀌어요. 꿈은 선명하고, 오히려 현실이 흐릿해요.
GQ 운명을 믿는 편이에요?
BB 운명과 의지 중에서 고른다면 운명에 가깝지만, 많은 의지가 모여서 운명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가 맞물리기도 하니까요. 저는 늘 시간과 인생이 배틀의 실로 직조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이 도넛 같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보세요. 여기 안쪽 작은 부분과 가운데 큰 부분이 연결되어 빙글빙글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베이글이 나왔을 때 소리 질렀어요. 와아! 나도 저 생각했는데!
GQ 언젠가 정말로 영화 감독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누군가의 뮤즈가 되고 싶다고 꿈꾼 적도 있어요?
BB 전에는 그런 적 없는데, 지금은···. (눈썹을 찡긋한다)
GQ 눈으로 읽혔습니다. ‘홍대 R&B’부터 지금까지는 ‘사랑의 에라’라고 명명했죠. ‘밤양갱’의 다음 장이 벌써 몹시 궁금해요. 다음 에라는 언제쯤 도래하나요?
BB 다음은 ‘드라마의 에라’예요. 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게 될 것 같아요. 사실은 이것도 모순이에요. ‘에라’를 정해둔 것도 제 생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말이죠. 어쩌면 제가 기존에 쓴 곡이 한 곡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어요. 최초로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데뷔하고 5년 동안 너무 달리기만 했거든요. 편안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음악 만들 때의 스파크! 다시 느껴보고 싶고요. 사람들이 뭘 살지, 뭘 들을지 신경 쓰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그런 거 있잖아요. 세상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프로듀서랑 앉아서 가사 쓰고 곡 쓰고. 다음 앨범은 그렇게 구상하고 있어요. 이 프로젝트 끝나고 나면 7년 차가 될 텐데, 그때쯤이면 저 은퇴해도 되겠죠?(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