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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차 안에서 함께 듣던 노래로 쓴 이야기 5

2024.05.09신기호, 전희란

그리고 그들의 플레이리스트.

아버지가 자주 들려주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LAND ROVER DISCOVERY

박찬휘 자동차 디자이너, 작가
당신과 나 사이에는 푸른 도나우가 영원히 흐른다.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강이 있었다. 일상의 분주함에 그 강의 이름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이 산 지 한두 해쯤 지났을까. 그 강이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의 주제, 음악 교과서에서 숱하게 등장했던 <아름답고 푸 른 ‘도나우’> 강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도나우’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어느 해 내게 잠시 들른 아버지와 나는 함께 도나우강을 지났다. 아버지가 강을 보며 말씀하셨다. “음악 수업시간에 등장했던 곡의 배경. 환상에나 있던 ‘도나우’를 아들 덕분에 만나게 되었다”며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어진 강처럼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클래식이라는 교감이 늘 존재했다.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는 읍내에서 할아버지가 구해온 장롱 위 낡은 라디오 덕분에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게 되었다 한다. 어린 소년이던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들려오는 노랫말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감동한 나머지 그 마음을 붙잡아두려 옆에 있던 못을 급히 들고선 할머니가 아끼던 장롱에 제목을 새겼다. “돌아오라 -소-련-토로”. 있는 힘을 다해 깊게 새겼다. ‘소렌토(Sorrento)’가 아닌 ‘소련’토라 잘못 듣고 이미 해체되어 없어진 소비에트 유니언, 구소련으로 이해한 것이다. 우연인지, 아버지가 내게 자주 들려주던 곡은 ‘소련’ 출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도이체 그라마폰 엘피판 커버의 무뚝뚝한 표정의 소년. ‘소련’ 출신 피아니스트 ‘키신(Evegeni Kissin)’이라 했다. 그리고 젊은 카라얀의 지휘와 함께 건반을 호령하는 키신의 녹화된 영상도 종종 보여줬다. 한결같이 그는 무표정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여러 차례 취소된 키신의 공연을 작년 이곳 뮌헨에서 마주했다. ‘소련’ 출신의 영상 속 소년을 만나는 데 정확히 31년이 걸렸다. 곱슬머리는 여전했지만 그때 본 앳된 소년이 아니었다. 희끗해진 곱슬의 중년, 키신이었다. 어릴 때와는 달리 그의 표정엔 미소가 가득했다. 31년을 기다려온 나를 드디어 만나서인지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그리 착각했고 31년의 공백은 그 밤의 음악으로 한숨에 채워졌다. 그건 아버지와 나 사이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영 원히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 Piano Concerto No.1 in B-Flat Minor, Op 23: I.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 Piano Concerto No.1 in B-Flat Minor, Op 23: II. Andantino Semplice – Prestissimo
🎵 Piano Concerto No.1 in B-Flat Minor, Op 23: III. Allegro Con Fuoco – Molto Meno Mosso
🎵 4 Pieces, Op. 51: I. Fragilte
🎵 4 Pieces, Op. 51: II. Prelude
🎵 4 Pieces, Op. 51: III. Poeme Aile
🎵 4 Pieces, Op. 51: IV. Danse Ianguide
🎵 8 Etudes, Op. 42: No. 5 in C-Sharp Minor

아버지와 함께 다시 듣고 싶은 그때의 플레이리스트

KIA EV9

가성문 영화감독
고향이 유독 싫었다던 내 아버지는 가출을 결심하고 제주 가는 배를 탔다. 같이 간 친구는 석 달 만에 부모님의 간절한 부름을 좇아 육지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부름도, 돌아갈 차비도 없었던 아버지는 음악다방 디제이로 취직한 후 2년을 제주에 살았다. 그곳이 고향처럼 느껴질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입영 통지서를 피할 수 없었다. 입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육지로나온 아버지는, 이후 30년을 정보기관의 직업 군인으로 살게 된다. 내가 아버지를 군인으로 소개하면 동정 섞인 말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억압받으며 자랐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하지만 흔히 상상하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상은 내게 영화 속 상투적인 연출과 같다. 내 아버지는 뼛속까지 자유주의자였다.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당신만의 방식이었을까. 일상이 침묵이었던 아버지 곁에는 언제나 음악이있었다. 좁은 거실엔 거대한 AV 시스템이 자리를 차지했고, 차량 수납함에는 케이스 뚜껑이 부서진 CD 음반이 가득했다. 아버지의 음악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보다 저항적 표현이 가득한 하드록, 헤비메탈, 민중가요 같은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곡들을 나와 함께 듣는 걸 경계하지 않았다. 특히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 알란 파커가 연출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장편 뮤직비디오는 어린 내게 강한 정서적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런 자유롭고 불만 가득한 음악들이 유독 나를 매료했다. 제 발로 음반 숍을 드나들며 그 아티스트의 다른 앨범을 찾아갔다. 스스로 저항정신을 조기교육한 셈이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 곡들이 주는 감동은 여전하다. 분명 내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준 음악임을 부정할 수 없다.

🎵 정태춘 : 우리들의 죽음
🎵 Pink Floyd :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 Metallica : No Leaf Clover (Live with the SFSO)
🎵 Iron maiden : Fear of dark
🎵 Alice cooper : Lace and Whiskey
🎵 Dire Straits : Sultans Of Swing
🎵 Renaissance : Ashes Are Burning

언젠가 나의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플레이리스트

AUDI A8

김지우 MBC 예능 PD
유럽풍의 세련된 전투기 말고, 1990년대 현대엔 소나타가 있고 대우엔 로얄 프린스가 있었지만 가장 뻣뻣하고 세련되게 각진 기아 콩코드는 우리 가족을 매혹시킨 드림카였다. 추석과 설 일 년에 최소 두 번, 명절이 올 때마다 네 식구는 가장 막히는 시간에 기약 없는 귀성길을 떠났다. 명절 당일엔 온 가족이 반드시 모여야 하는 아버지였기에 막히지 않으면 3시간이 걸렸던 서울-옥천 길을 13시간을 꽉 채워 떠나야 했다. 네 식구가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며 떠난 귀성길, 테이프에선 시골길에 어울리는 온갖 팝송이 흘러나왔다. 음식 호불호도 없고 술도 못 드시는 아버지지만, 당대의 명곡으로 꽉꽉 채워 반복으로 재생됐던 아버지의 팝송 테이프. 그 시절 테이프가 대부분 그렇듯 앞뒷면에 꽉꽉 눌러채운 음악들은 온갖 장르를 포괄하고 있었다. 존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부터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n D ream’,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도 이때 처음 들었다. A면부터 B면을 꽉 채운 테이프가 여러 번 재생될 때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나와 누나는 어느새 함께 후렴구를 합창하고 있었다. 내용도 가사도 낯설지만 시골길과 제법 잘 어울리던 명곡들. 종종 ‘칠갑산’이 포함된 트로트 테이프가 불청객처럼 재생되기도 했다. 그때는 진절머리를 치며 아버지의 취향을 구박했지만 꿈쩍 않고 열창하던 아버지 덕에 가사를 줄줄 외워야 했고, 대학에 가 장기자랑을 해야 할 때면 요긴하게 써먹으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렇게 긴 거리를 운전하면서도 한 번도 불평이나 짜증 없이 묵묵히 귀성길을 향했던 아버지. 그 덕에 우리 가족의 명절은 언제나 시끌벅적 에피소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하염없이 지루한 시골 풍경과 한참을 달려도 변함없는 능선들. 13시간의 지루함을 견딜 때마다 반복됐던 노래들이 유년기의 감수성을 풍부하개 채워줬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꼭, 아버지의 인생 곡으로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고 싶다. 13시간은 무리지만 2시간 정도는 무한 반복 재생도 괜찮지 않을까? 트로트만 빼고.

🎵 John Denver : Take Me Home Country Road
🎵 Louis Armstrong : What a Wonderful World
🎵 Carpenters : Yesterday Once More
🎵 Andy Williams : Love story
🎵 Nat King Cole : Misty
🎵 Edith Piaf : La vie En rose
🎵 주병선 : 칠갑산

수십 년째 그립고 또 그리운, 아버지와 듣던 노래들.

GMC SIERRA DENALI

황욱 영화감독
운전석에는 아버지, 그 옆 간이 보조석에는 형, 보조석에는 어머니와 나. 트럭을 운전하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갈 때의 우리 가족 모습이었다. 차 안에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트럭 운전기사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한 행운이었다. 여름 나들이 드라이브 장소는 항상 남한산성 아니면 무주구천동이었다. 아버지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주로 올드 팝 모음집이거나 조용필 노래 모음집, 김건모 정규 3집이었다. 어느 날, 일명 ‘길보드’ 차트 카세트테이프를 즐겨 들으시던 아버지가 내 작은방으로 들어오셨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두리번두리번 방 안을 훑다가, 이리저리 책상에 꽂혀 있는 음반들을 살피다가 김건모 정규 3집을 꺼내셨다. “이번에 나온 거지? 요즘은 김건모 음악이 제일 듣기 좋더라”. 아들이 용돈 모아 구매한 김건모의 정규 3집 카세트테이프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트럭에서 재생되었다. 아버지의 또 다른 플레이리스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아버지와 나는 주말마다 <토 요명화>, <주말의 명화> TV 편성표를 확인하고,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다. 부자지간의 일주일 루틴이었다고나 할까. 함께 듣던 오프닝 시그널 음악은 얼마나 심장을 뛰게 했는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나는 가슴 뛰는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 전 주말에 본 영화음악들이 아버지와 달리는 차 안의 라디오에서 나오면 차 안의 공기는 일순간에 바뀌었다. 녹음이 짙은 숲을 가로지르며, 같은 높이 같은 위치에서 같은 풍경을 보며 듣던 노래들. 가족 다 같이 계곡에 발 담그고 수영했던 그 여름날. 집으로 돌아와 브라운관 TV 앞에 모여서 본 영화들. <13일의 금요일>, <양들의 침묵>, <폴터가이스 트>, <에어리언> 시리즈. 무더운 여름날 우리 가족에게 공포를 선물해주었던 특집 영화들. 트럭 안에 흐르던 공기, 음악, 시간들까지 수십 년이 지난 그 시간은 여전히 내 앞에 생생하게 현현하고, 그래서 더 그립다.

🎵 조용필 : 헬로우
🎵 김건모 : 아름다운 이별
🎵 넥스트 : 해에게서 소년에게
🎵 Richard Anthony : Aranjuez Mon Amour
🎵 Exodus OST : Ari’s Theme
🎵 The Silence Of The Lambs OST : Main tile
🎵 Ben E King : Stand by me
🎵 Alien ost : Main tile
🎵 Beatles : I’ve Got A Feeling

아버지의 반짝이는 젊은 시절과 나의 취향을 담은 플레이리스트

BMW 320I M SPT

서다희 여행 컬럼니스트
우리 아빠는 음반 제작자이자 작사가다. 시작은 대중가요였는데 1990년대 초 잼, 서태지와 아이들 등 가요계 격변의 새 역사가 시작되며 자연스레 아빠의 시대에 맞는 성인가요(구분이 좀 우습다만), 즉 트로트로 자리를 굳혔다. 아빠는 1980-1990년대 대중가요 호황기로 국내 방방곡곡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출장을 빙자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네 살 터울 오빠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춘기에 갓 접어든 나는 아빠처럼, 오빠처럼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때마침, 당시 좋아했던 라디오 공개방송이 동해안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빠, 동해 가자!” 아빠는 전라도 출신의 무뚝뚝한 남자이지만 딸이 하고 싶다는 건 뭐든 하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차를 타고 동해안으로 향하며 라디오를 틀었다. 아마 룰라, 김건모, 박진영의 노래가 나왔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뮤지션이자 디제이는 김현철이었다. 아빠가 직접 사인을 받아다 준 시디가 내 보물 1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이라 플레이리스트를 챙겨갈 여유도 없이 “그래! 가자!” 하고 떠났다. 아빠와 동해로 향하며 전에는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차창 밖 풍경 속에 담긴 추억부터 전국 구석구석 출장 다니며 찾아낸 맛집 이야기, 파리며 리우데자네이루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마도 그때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가 나를 여행기자로 만들고 베를린에 살게 해준 것이 아닐까. 아빠랑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번엔 내가 운전을 해야겠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원래 꿈은 문학소년이었던 아빠의 감성에 맞는, 빛나던 아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여기에 내가 듣고 싶은 노래까지 섞은 플레이리스트를 챙겨서.

🎵 남진 : 님과 함께(남진 매니저로 시작. 솔라/엑소 버전으로도 준비 가능)
🎵 심수봉 : 올가을에 사랑할거야
🎵 방미 : 사랑도 추억도
🎵 김현식 : 골목길
🎵 인순이 : 광주광주
🎵 김현철 : 동네
🎵 아이유 :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포토그래퍼
    김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