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마티니를 잘 만드는 할머니 바텐더다. “우리 할머니, 힙하고 마티니도 완전 잘 만들어!”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몇 잔의 마티니를 더 만들어야 할까?
글 / 김서윤(바텐더, 바 칼럼니스트)
바의 춘추전국시대. 2023 <아시아 50 베스트 바> 시상식에서 역대 가장 많은 한국 바가 이름을 올렸고, 2023 <월드 50 베스트 바>에서도 최초로 한국 바가 순위에 올랐다. 유수의 바들이 국제적인 시상식에서 태극기를 날리며 국위선양하고 있으니, 세계 최고로 우뚝 설 날도 머지않았다.
F&B 업계에 몸담은 13년간 바 업계 역시 변화무쌍해졌다. 냉동 라임 대신 생라임을 쓰는 게 자랑거리였던 시절부터, 전국에 50여 개에 불과했던 클래식 바가 이젠 1천 곳이 훌쩍 넘는다. 지극히 남초 사회였던 바텐더 세계에 발을 들인 뒤 50여 명의 직원 중 홍일점을 담당한 시절도 있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바텐더’라는 타이틀이 좋지만 때론 시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요 근래 잦아진 지방 출장은 여성 바텐더들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기 좋은 기회였다. “부모님, 남자친구가 직업을 반대해요”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싫고, 왜 반대하는 걸까. ‘여성 바텐더’에 대한 인식이 전보다 개선되었다고 해도, 성별을 막론하고도 여전히 ‘바텐더’라는 직업을 이해하고 이해받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여전히.
한국 바의 역사를 빠르게 되돌아보면,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대불 호텔, 손탁 호텔에서 바가 최초로 등장했고, 지금은 조선 호텔이 명맥을 잇고 있다. 1953년 최초로 스카이라운지의 개념이 생겼고,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바 문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외국인 위주에 칵테일 역시 생소한 서양 문화일 뿐이었다. 그러다 88올림픽 개최 소식에 1984년 조주기능사 제도가 창설됐고. 1992년엔 TGIF가 한국에 상륙해 불쇼나 병 던지기를 하는 플레어 바텐딩이 유행했다.
2000년대 초반에 모던 바, 토킹 바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사실상 일반 음식점으로 영업신고를 한 룸살롱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이때가 현재 여성 바텐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시발점이었다. 여성 바텐더들은 수많은 편견과 시선을 견뎌야 했고, 오죽하면 문 앞에 “여자 바텐더 없음”이라고 붙이고 영업하는 곳도 있었다. 내가 바텐더가 된 건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다음 날 두통을 앓는 어머니와 주당 중의 주당, 진정한 풍류를 아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오롯이 아버지의 유전자만 쏙쏙 빼닮았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덕(?)에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혼밥’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피할 수 없어 즐겨버린 것에 가깝다), 홀로 처음 바의 문턱을 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맛있고 멋있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흠모하던 취향은 나를 곧장 칵테일의 세계로 이끌었고, 첫 방문에 호기롭게 외쳤다. “사장님, 아무거나 맛있는 칵테일 주세요!” 사장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마티니를 내주었고, 다행히 올리브가 취향에 딱 맞아서 세 잔의 마티니를 연거푸 마시고 나왔다. 하지만 칵테일은 보기와는 다르게 매우 독했다. 그다음에 방문한 다른 칵테일 바에서 피나콜라다의 보드카 버전인 칵테일 ‘치치’를 마시고는 칵테일의 첫인상은 새롭게 갱신됐다. 술맛이라곤 느껴지지도 않을뿐더러 꿀떡꿀떡 넘어가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 이런 게 칵테일이구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때를 시작으로 대학 시절엔 ‘로빈스 스퀘어’(바 ‘코블러’의 전신으로, 지금은 사라졌다)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밤새 과제를 했다. 아니 미쳤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
바텐더는 겉은 화려해도 업무 강도에 비해 초봉은 박봉이고, 손목건초염과 하지정맥류를 달고 사는 삶을 견뎌야 한다. 밤낮 바뀐 생활을 하면 대개 느즈막이 일어나는 줄 알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각종 주류 시음회나 행사 참석, 끝이 보이지 않는 술 공부와 체력 관리, 게다가 은행 업무라도 볼라치면 부지런해야 한다.
바텐더는 술에 해박해야 하지만, 사실 ‘사람’에 더 능해야 한다. 바의 핵심은 쉼터다. 90센티미터 너비의 널빤지 같은 바를 사이에 두고 낯선 이에게 근황부터 때로는 삶의 고민까지 털어놓기도 한다. 바텐더는 새로운 맛을 고민하는 것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어우르고 때론 도전을 즐겨야 한다. 또 바의 매력을 모르는 이들을 계몽해 빠져들게 하는 것도 우리들의 역할이다. 본격적으로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불특정 다수가 우연히 뒤적거린 잡지에서 우연찮게 읽게 된 나의 글이 어쩌면 한 사람의 인식을 바꿀지도 모르니까.
한데 ‘바텐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생각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좋은 선례가 없어서 그렇다. 아마도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저 사람 바텐더로 성공해서 건물샀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냉정히 바라보면 이런 정도의 파급력은 있어야 누군가 기꺼이 이 업계에 뛰어들지 않을까. 하물며 여성 바텐더는 사정이 더하다.
씁쓸했다. 결혼과 동시에 쌓았던 경력을 뒤로한 채 업계를 떠나는 선배들을 여럿 마주했고, 결혼 후에도 바텐더 생활은 잘할 수 있을지, 아이는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 이도 많다. 업계인들은 다 알지만, 내가 가진 ‘세 아이의 엄마’라는 타이틀은 여성 바텐더로는 이례적이다. 또 결혼과 이혼의 경험이 있다는 것. 숨길 이유도 없지만 사실 그런 경험들은 이 직업에 오히려 보탬이 되었다.
엄마 바텐더의 장점이 뭐냐고? 아이가 아파 병원에서 타온 물약 제조할 때 프리푸어링으로 적량을 잘 맞춘다는 것? 농담일 것 같지만 진짜다. 그리고 한국의 여성 바텐더로서 지닐 수 있는 이점이 분명히 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쓴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나는 비터스윗 타입의 칵테일을 만들 때 유독 까탈스럽게 굴기도 하며, 맛의 역치가 올라가지 않게끔 평소 식습관에도 신경 쓴다. 또 접객 시 동일한 상황에서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한 부분을 캐치할 때가 있어 성별의 조화를 중요하게 느낀다. 거기다 한국 바텐더는 무엇이 다를까? 스펀지 같은 흡수력은 물론 응용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 바텐더들은 고전적이며 음료 한 잔 한 잔에 집중하는 ‘오센틱’한 일본 스타일부터 빠르고 역동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의 장점을 적절히 잘 섞어내 각자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 거기다 여성 바텐더라는 타이틀이 지닌 잠재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인가.
“전문적인 남자 바텐더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주니어 시절, 한 남성 고객이 내가 만들어준 칵테일에 입도 대지 않은 채 하는 얘길 듣고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모른다. 나도 이런데 다른 후배들은 어떤 경험을 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될까? 그저 버티는 것? 그럴 리는 없다. 지구 반대편 멕시코만 봐도 한국보다 훨씬 성차별의 이슈가 많고 인식이 낮은 나라이지만, 바 업계에선 아예 사정이 다르다. 바 ‘Speakeasy Handshake’는 여성 바텐더를 적극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전문 프로그램을 마련해두고 있고, 실제로 직원들의 성비도 5:5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게다가 바 ‘Kaito & Diego’는 아예 전 직원을 여성으로 구성했다.
사실은 궁극적으로 ‘여성 바텐더’가 아닌 그냥 ‘바텐더’이고 싶다. 바위 같은 커피 시장에 비하면 달걀 크기밖에 안 되는 바 산업에서 몸집을 불려 제대로 맞붙고 싶다. 나아가 업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후배들에게 우리만의 리그가 아닌 더 나은 목초지를 깔아주고 싶다.
나의 꿈은 여전히 마티니를 잘 만드는 할머니 바텐더다. 미래의 손자, 손녀들이 “우리 할머니 된장찌개 맛있어”라는 말을 하듯, “우리 할머니, 힙하고 타투도 멋있고 마티니도 완전 잘 만들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가 ‘바텐더’란 타이틀을 달고 <유퀴즈> 같은 프로그램에 나갈 때쯤이면, ‘여성 바텐더’라는 말은 더 이상 쓰지 않는 해묵은 단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나는 몇 잔의 마티니를 더 만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