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200분을 향해 가던 흐름에서 다시 100분대 아래로 지향하는 영화계의 호흡세에 돌아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길이인가, 너비인가.
글 / 이지현(영화평론가)
<체인소 맨>의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 원작 애니메이션 <룩백>(2024)이 지난 6월 말 일본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개봉 직후 일본 내에서 2주 연속 흥행 1위를 차지하며 빠르게 총수익 10억 엔을 돌파했다. 본래 애니메이션이 인기있는 일본이지만 유난히 돋보이는 흥행세였다. 이를테면 <명탐정 코난> 시리즈처럼 캐릭터 팬층이 두터운 만화도 아니었고, 극장판 <하이큐!!> 시리즈처럼 인기 연재물도 아니었기에 <룩백>의 성과는 더 놀라웠다. 작가성이 강한 독립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흥행한 사례는 일본에서도 매우 드물다.
일본에서 이룬 성과 덕분인지 국내 관객들은 예상보다 이른 시기인 9월에 < 룩백>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지난달 일본을 여행하면서 조금 일찍 접했다. 많은 영화 중 굳이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원작을 읽은 덕분에 내용을 가늠할 수 있단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짧은 러닝 타임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관람시간 57분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다.
확실히 러닝타임 57분은 애매한 길이다. 장편이라기엔 지나치게 짧고, TV용 각색이라고 말하기엔 광고를 넣을 자리가 부족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티켓 가격에서도 흥미로운 면을 보인다. <룩백>의 일본 프로모션은 균일가 정책으로 진행되었다. 할인이 적용되지 않는 1천7백 엔의 티켓 가격은 여행자인 내게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아마도 대다수 관객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일본 영화관의 입장료는 대략 2천 엔 수준인데, 대다수 관객은 할인율이 적용된 1천3백 엔에서 1천1백 엔 사이 비용으로 영화관에 입장하게 된다. 그러니 이 영화의 티켓은 평균보다 비싼 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짧은 길이와 비싼 비용의 위험을 모두 뛰어넘었다. 아무리 마음을 두드리는 정도가 강하다 해도, 그것만으로 성공의 이유를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이 사례는 작년까지 이어진 ‘고비용의 긴 영화’ 전략과도 정확하게 반대된다.
<플라워 킬링 문>(2023)의 206분과 <오펜하이머>(2023)의 180분, <듄>시리즈와 <아바타: 물의 길>(2022)의 웅장한 길이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 그 트렌드는 바뀌었다. 실제로 <룩백>을 보고 나서 SNS를 살피니 “1시간 미만의 짧은 애니메이션이지만 마음에 깊게 남는 작품”이라는 관객평이 다수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극장가에서도 꽤나 많은 영화가 100분 이하의 수준에서 소개되고 있다. 7월에 개봉한 <탈주>(2024)는 94분이었고, 그보다 일찍 개봉한 <하이재킹>은 100분이었으며, 작년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던 <잠>(2023)은 고작 94분에 불과했다. 특이한 점은 <하이재킹>과 같은 시대극이나 <탈주>와 같은 추격전 테마의 영화들도 기존보다 훨씬 짧게 소개된다는 데 있다. 단언컨대 편집 과정에서 다수의 장면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영화 <잠>에 대해 프랑스 매체 <트랑스퓨즈>가 설명한 내용이 떠오른다. “단순하고 효과적인 콘셉트와 정확한 내레이션”이라는 평가. 어쩌면 대다수 영화가 이러한 평을 타깃으로 정했던 것 같다.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한때 예외였던 많은 것이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극장을 찾는 관객은 감소하는 추세이고, 시청자의 소비 패턴은 요동치며 바뀌어간다. 한편에서는 우아한 장편영화보다는 화려한 웹드라마 시리즈가 더 나은 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영화관은 스펙터클의 확대를 꾀했지만 실패했다. 할리우드 파업 등의 상황과 맞물려 영화계는 얼마간 잠잠했다. 그 사이에 관객들은 스트리밍 플랫폼에 정착했으며, 영화산업의 고민은 더 커졌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뒤돌아보자.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1930년대부터 2022년 사이에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장편영화의 길이는 1시간 21분에서 1시간 47분으로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2023년 박스오피스의 상위에는 2시간 이상인 영화가 10편 중 6편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그 긴 영화들의 절반 이상이 2시간 30분이 넘는 러닝타임을 가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한마디로 OTT와 구별되는 거대 프로덕션의 전략이 영화계를 주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빠른 호흡의 영화들이 시장에 나타났다. 이들의 경쾌한 템포와 짧은 리듬은 플랫폼이 제공하는 영상 콘텐츠들과는 다른 질감이다.
지난 4월 미국의 설문조사 업체 토커 리서치가 내놓은 조사 결과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미국인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당 내용의 결과는 ‘영화의 이상적인 길이’에 대한 답변으로 ‘92분’이라는 수치를 제시했다. 약 90분, 어쩌면 영화의 길이가 짧아진 것은 관객들의 요구에 맞추어 수행한 결과인 것 같다. 콘텐츠 시장의 수요 변화와 맞물려 이제 관객들은 시장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 있다. 그러니 극장용 영화는 아주 길고 풍성하거나, 혹은 불필요한 장면을 잘라낸 날씬한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해야 한다.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거쳤던 TV 드라마와의 차별화 전략을, 우리는 다방면에서 다시금 실험하는 중이다.
<룩백>의 몇몇 장면을 떠올린다. 주인공 후지노가 등을 보이는 것만으로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장면들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계속 팬이었다”고 말하는 상대방에게서 돌아서서 후지노가 뛰어가는 장면도 생각난다. 둘 다 복잡한 설명을 접어두고 단순하고 생략적인 기법을 취한다. 이것을 순수한 존재감의 영역이라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 만일 우리의 상상력이 순수와 불순의 두 가지 방향 모두를 추구한다면, 스펙터클의 긴 서사시는 보이지 않는 영역의 두려움을 내포하며,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이 심플한 장편영화는 순수한 상상의 영역과 근접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단호하고 직설적인 발걸음이 스크린에서 느껴졌다.
어두운 극장에서 일부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감정에 완전히 동요되지는 않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초월의 힘은 역시 강했다. 세상의 잔혹함에 대해 의문을 가진 예술가들은 여전히 창조를 통해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 창작의 영역은 짧거나 혹은 길거나, <체인소 맨>처럼 마니아적이거나 간혹 <룩백>처럼 평범한 외양을 갖출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하느냐다. 만화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영화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터의 손을 통해 내용을 선보인다. 그리고 숏폼은 크리에이터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한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형식이 되어야 한다. 영화는 스크린을 거쳐서 상영되며, 어떤 간결한 상황에서도 최상의 경험치를 제공해야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꿈의 통로, <룩백>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본다. 후지노의 뒷모습이 새로운 크리에이터의 출연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 애니메이션을 영화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내 대답은 단호히 부정적이다. 여전히 미완의 길 위에 있지만 시네마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형식들, 영화는 영화이기에 의미를 가진다. 어떤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 수용될 때 그 질감이 더 짙어진다. <룩백>이 영화관용 영화라는 점에 수긍한다. 길이가 아니라 그 체험의 정도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