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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구 “요동이 사라지고 불순물이 가라앉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2024.09.20박나나, 전희란

밤을 낚는 손석구.

프린지 울 스웨터, 지퍼 디테일의 체크 울 팬츠 가격 미정, 모두 버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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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1년 만에 만났는데 그사이 촬영을 더 즐기게 된 것 같더라고요?
SK 그래요?
GQ 좀 아까 이렇게 말했죠? “화보 촬영할 때 뇌는 카니발에 두고 내린다.”
SK 아하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되더라고요. 시스템을 익히고 나서는 너무 심각하게 안 하려고 해요. 다들 제가 잘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분들을 믿고 맡겨요. 잡지 타이틀, 사진가 이름을 걸고 촬영하는데 진짜 이상한 컷은 안 쓰겠죠. 아, 근데 간혹 내는 곳도 있더라.(웃음)
GQ 저는 평범하고 늘 봤던 것보다는 조금 이상하더라도 독특한 게 좋던데.
SK 사실은 저도 그래요. 늘 같은 포즈, 같은 얼굴, 같은 잘생김, 같은 예쁨···.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GQ 피사체가 본인일 때도요?
SK 사진에서 나름의 스토리나 표현하고자 하는 게 보이는 게 좋아요. 예술 작품이니까. 단순히 ‘잘생김’을 포착하려는 게 아닌 편이 저는 좋아요,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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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까만 선글라스 낀 컷에서 유독 자유로워 보였어요. 뵈는 게 없어선가?(웃음) 손석구가 천재라고 칭찬한 유튜버에게 아이디어 회의 방식을 물은 적이 있었죠? “누워서 한다. 서로의 눈을 보지 않고”라는 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고요.
SK 맞아요. 작가는 정말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늘 거절당하는 입장이고, 그러면서 외로움은 점점 더 커지죠. 자기는 자꾸 작아지고요. 시간을 두고 계속 들여다보면 사실 좋기만 한 아이디어는 별로 없어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안 되는 이유만 늘어가죠. 그때 당시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을 뿐이고, 그러니까 단호하게 밀고 나가야 할 때가 있어요. 열심히 하는 작가에겐 격려와 독려가 필요해요.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검열하면 밀고 나갈 수 없잖아요. 막 떠내려가 보는 것, 그게 창작의 시작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서로의 눈을 보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막 내뱉는 방식이 흥미롭다고 느꼈어요.
GQ 시도해봤어요?
SK 저기 농구대 보이죠? 저기에 골 넣으면서 중요한 결정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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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나의 연구일지’를 쓴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것처럼 쓰자”고 다짐할 거라고 했어요.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을 때 진짜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SK 그렇죠. 쓰다 보면 내가 가진 생각도 결국 남들이랑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누구 눈치 보면서 창피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GQ 솔직한 것이 손석구에게는 왜 중요해요?
SK 솔직하면 할수록 몸이, 일상이 가벼워져요. 거기서 오는 희열이나 설렘이 분명 있어요. 의외로 세상에 솔직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포장하고 솔직하지 않은 사람의 공기는 무겁게 느껴져요. 딱딱해요. 스스로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고요. 친구 간, 연인 간, 가족 간에 미안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못 했던 말을 뱉고 나면 가벼워질 때가 있어요. 사람이 1년 내내 솔직할 순 없지만, 그런 순간은 분명 필요해요. 그래야 정화가 돼요.
GQ 솔직해지는 과정이 연기에도 도움이 돼요?
SK 돼요. 저는 인터뷰에서도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려고 해요.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스스로 검열하지 않고 해요. 뱉다 보면 제 스스로 리프레시될 때가 있어요. 연기에서도 최대한 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물론 안 될 때도 많죠. 솔직한 게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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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김혜자 선생님과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찍고 있죠? 선생님 눈을 처음 본 순간 기억해요?
SK 기억나요. 물리적으로 눈동자가 크고, 눈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요. 그래서 선생님하고 연기하다 보면 몰입이 ‘어나더 레벨’로 잘돼요. 시청자분들도 그렇게 느낄 거예요. 선생님이 워낙 ‘사기캐’ 잖아요. 짧은 대사를 해도 그 안에 고저 장단이 다 있고요. 너무 재밌어요. 김혜자 선생님과 연기하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을 했어요. 그분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 그 자체예요. 너무 ‘진짜’예요. 리허설을 끊임없이 하시고, 리허설을 본 액션보다 더 열심히 하세요. 얼굴 보면 대사부터 할 정도로 캐릭터가 몸에 붙어 있죠. 여태까지는 ‘이 배우가 나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거겠지?’라고 상상하고 연기할 때도 있었는데, 김혜자 선생님 앞에서는 진짜 리액션이 저절로 나와요. 요즘 느끼는 건데, 대가들일수록 더 쉽게 쉽게 하고, 에고를 내려놓는 것 같아요. 계산하지 않고 생각을 비운 채로 감독이 원하는 것을 다 한 뒤, ‘나머지는 감독의 영역’이라고 맡기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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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아까 디지털 콘텐츠에서 최근 가장 잘한 연기로 <유브이 방>을 꼽았어요.
SK 진짜 잘하지 않았어요? <유브이 방> 처음 나왔을 때 너무 좋았어요. 미국에 실제로 맷 데이먼 같은 대 배우가 나와서 디바처럼 현장에서 소리 지르고 그러는 콘텐츠가 있는데,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려요. 그래서 보게 돼요. 보면 이상한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만약 제가 지금 길거리 나가서 옷 벗고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해봐요. 다들 볼 거 아니에요.(웃음) <유브이 방> 콘셉트를 완벽히 이해하고 대사도 몇 가지 준비해갔어요. “백상 이야기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울기 시작할게요” 이렇게 말했죠. 티어 스틱도 준비해갔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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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코미디 좋아하죠? 김석윤 감독처럼 코미디를 했던 연출자가 드라마, 슬프거나 깊은 이야기를 할 때 울림이 큰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왜일까요?
SK 김석윤 감독님은 선택과 집중이 명확하고, 목표가 뚜렷해요. ‘내가 믿는 배우들을 데려와서 이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현장에 미술이나 조명, 소품이 다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배우가 준비되었으면 슛 들어가요. 연출자에 따라 연기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는데, 어떤 연출자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찍을 테니 딱 여기까지만 하세요”라고 하는 반면, 김석윤 감독님은 한 번에 쭉 찍고 끝이에요. 유기적인 것에 집착하시고, 현장감을 굉장히 잘 캐치하세요. 그래서 결과물이 토속적이고 리얼하죠. 아마 코미디, 예능을 많이 해서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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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그런가 하면 자동차 카메라로 찍은 <밤낚시>는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 의식하지 않고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했죠. 기획자이자 연출자 문병곤 감독과 오랜 시간 친구일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요.
SK 병곤이는, 집요해요. 영화의 퀄리티에 대해서 타협을 안 하죠. 저는 그런 집요한 사람 옆에 있고 싶어요. 그래야 작품이 잘 나오니까. 감독이 습관적으로 미쳐 있지 않으면 결과물이 잘 나올 수 없다고 봐요. 오랫동안 집요하게 하다 보면 여유도 생기겠지만, 병곤이도 저도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니까요. 한 예로 <밤낚시>에서 제가 차에서 내려 허리에 장비를 차고 펴는 장면이 있는데, “촥” 한 번만 펼 것인지, “촥 촥” 두 번 펼 것인지로 일주일 동안 얘기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요원 대사에 어떤 대사를 덧붙여 이 인물에게 캐릭터를 심어줄 것인지를 놓고도 한 달은 고민한 것 같아요. 같이 작업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 집요한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집요할 줄은 몰랐어요.(웃음) 같이 작업해보고 알았죠. 아주 작은 부분까지 오랜 시간 고민하는 걸 보고는 ‘얘도 내 과구나’ 느꼈죠. 저는 일에서 그런 집요함을 보면, 최대한 맞추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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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밤낚시>는 문병곤 감독이 영감을 기다리는 시간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요. 고요한 기다림 끝에 몸을 내던지는 맹렬한 몸부림. 손석구도 그래요?
SK 저 역시 솔리튜드(고독)가 있어야 영감이 채워져요. 그렇게 채운 것으로 세상에 나가서 막 쓰는 거죠. 20대, 30대 초반에 한참 자기 혐오에 빠져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를 채웠고, 그것으로 10년을 썼어요. 지금은 느껴져요. 바닥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바닥을 긁어서 쓰고 있는데, 이제 다시 채워야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영감을 잘 못 받아요.
GQ 텅 빈 시간을 만들 생각이에요?
SK 만들어야죠. 스님들이 명상하러 산에 들어가면 어떤 스님이 그런다고 하잖아요. “사람들하고 섞이면서 명상을 해야지 바보 같은!”이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러지 못해요. 수면이 자꾸 출렁대면 흙이랑 섞이면서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아요. 요동이 사라지고 불순물이 가라앉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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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지금의 손석구의 욕망은 뭐예요?
SK 연기적으로 변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늘 제 것만 고집하면 똑같잖아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찍으면서 가끔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나홀로 집에> 케빈 표정을 하며) 이렇게 과하게 놀라는 콩트 같은 연기도 하고요. 같이 출연하는 배우 한지민 씨가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석구 씨, <힙하게> 찍을 때 저도 그랬는데, 그냥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저는 <힙하게>가 한지민 씨의 인생 캐릭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마 석구 씨도 그렇게 될 거예요.” 첫 촬영 때 김석윤 감독님도 그러셨어요. “김혜자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이번에 됐다”라고. 감독님이 이 작품 하는 큰 목적 중 하나가 손석구를 배우로서 샤워시켜주는 거래요.
GQ 배우로서, 샤워를?
SK 손석구를 깨끗이 씻어서 여태 보지 못한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내가 너를 만지면 좀 달라”라고, 엄청난 자신감을 갖고 계세요. 저는 감독님 감을 믿어요. 증명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뭐, 아닐 수도 있고요. 크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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