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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준 “불안함이 없으면 성취감도 없는 것 같아요”

2024.09.25김은희

김혜준 채집 일기.

슬리브리스 톱, 꾸레쥬. 데님, 에이골디. 신발, 스티브 매든. 귀고리는 혜준의 것.

HJ 그때는 제가 토끼 스티커를 드렸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고양이 스티커예요.
GQ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귀여워요.
HJ 그런데 스티커 중에 정말 귀여운 친구가 있거든요? 저희 집 고양이가 스티커 몇 개를 깨물어놓은 거예요. 여기 이빨 자국 있죠? 근데 마침 이게 자기가 안 했다고 하는 스티커라서 너무 잘 어울리는 거예요.(고양이 위로 “I Didn’t Do It”이라 적혀 있다.) 저 진짜 아끼는 스티커인데 드리는 거예요.
GQ 어쩜. 고양이와 사는지 몰랐어요. 이름이 뭐예요?
HJ 도토리. 갈색이고 가을에 와서. 작년 11월에 데려왔어요.
GQ 그렇죠? 도토리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HJ 없었어요. 1년 새 많은 일이 생겼네요. 예전에 친구 고양이를 잠깐 맡아서 길러준 적이 있는데 그때 고양이 매력에 엄청 빠져서. 원래 저 강아지파였거든요. 그런데 두 달 반 정도 고양이를 맡아서 키웠는데 그때가 너무 행복해서 고민을 한 3년 하다가, 어쨌든 큰 결심을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3년을 고민하다 때마침 타이밍에 맞는 일이 생겨서 저희 집에 오게 됐습니다.
GQ 강아지파로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웃음)
HJ 고양이는 자기만의 시간이 되게 중요한 동물인데 저도 저만의 시간이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서로 그걸 잘. 서로의 성향이 비슷한 것 같아요. 계속 누가 옆에서 저한테 관심을 가져주면 가끔은 좀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고양이도 자기만의 시간 보내고 저도 저만의 시간 보내고 이런 게 좋고, 그러면서도 애간장을 녹이는 게 있거든요. 그런 매력?
GQ 데면데면한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HJ 하하하하. 서로 각자 즐거운 시간 보내다가 행복할 때 행복하고.

오버롤, 써틴먼스. 모자, 오베이. 신발, 닥터마틴. 귀고리는 혜준의 것.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오버롤, 써틴먼스. 모자, 오베이. 신발, 닥터마틴. 귀고리는 혜준의 것.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오늘은 혜준 씨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그런 순간이 좀 담겼나요? 정말 느슨해진 김혜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묘사해보면 어때요?
HJ 오늘 누워 있는 포즈가 제일 편했어요. 프흐흐흐. 평소 거의 누워 있거나 기대 있거나 앉음을 빙자한 그런 모습들이라서.
GQ 평소 소지품을 챙겨달라고 했더니 줄 이어폰과 필름 카메라를 가져왔어요.
HJ 드라마 촬영 갈 때든 언제든 항상 갖고 다니는 파우치가 있거든요. 거기에 늘 들어 있는 소지품이에요. 필름 카메라는 한 3, 4년 전 한창 필름 카메라 유행할 때 저도 탑승했는데 지금까지 잘 쓰고 있어요. 원래 쓰던 게 작년 <킬러들의 쇼핑몰> 현장에서 고장 난 거예요. 추억들을 담고 싶은데 갑자기 고장 나서, 그때 제가 전주에 있었는데 그날 바로 필름 카메라 사이트 들어가서 구입하고 전주 숙소에서 받아 지금까지 잘 쓰고 있습니다.
GQ 필름에 담아둔 마지막 순간은 어떤 찰나인가요?
HJ 오늘. 마지막 착장 입고. 가을을 좀 담고 싶어서. 그거랑, 아까 꽃밭에서 촬영할 때 꽃 찍었어요. 아마 한 내년쯤 꺼내보지 않을까. 처음에는 필름을 바로 바로 인화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귀찮아서 한 8롤, 10롤쯤 모이면 한 번에 하거든요. 한 번에 많이 받아보는 쾌감도 있고 인화해야 할 롤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여유가 생길 때, 그때 끄집어보기 너무 좋아요. 옛날 추억을 꺼내보는 게 또 필름의 맛이잖아요. 그걸 의도한 건 아닌데 제대로 즐기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미학을.
GQ 작년 우리 만남 때는 막 운전을 시작한 초보 드라이버로서 속도 내는 게 무섭지만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요즘은 어때요?
HJ 이제는, 아유. 이제는 즐기는 단계를 넘어 그 있잖아요, 초반에 즐기는 거지 내게 익숙해지면···, 아 허세 장난 아니네.(웃음)

티셔츠, 리던.

GQ 그사이 큰 성장을 이뤘네요.
HJ 운전을 많이 했어요. 장거리 여행으로 담양도 갔다 오고, 천안에 결혼식도 갔다 오고. 고속도로에서 규정 속도에 맞춰서 100도 밟고 합니다. 운전 확실히 추천합니다. 못 갈 데도 그냥 즉흥적으로 ‘갈까?’ 이렇게 되고, ‘누구 만날까?’도 되고, 시야나 나의 생활 반경이 굉장히 넓어지고 과감해지는 것 같아요.
GQ 실은 그때 주신 토끼 스티커의 선물로 저는 오늘 이걸 준비했어요.
HJ 허! 뭐예요? 우와, 사진이에요?
GQ 사진 찍는 지인이 주신 건데 전부 한강이에요. 똑같은 대상을 계속 다른 날, 다른 시간대에 가서 찍으신대요. 매일 빛이 다르고, 매일 색이 다르니까.
HJ 우와···. 너무 예쁘다. 진짜. 이건 눈 오는 날이네요. 이 사진은 좀 슬프다.
GQ 슬퍼요? 저도 그 사진 슬퍼서 좋아해요.
HJ 그쵸?
GQ 사진마다 뒤에 지난 우리 만남 이후 혜준 씨가 다른 인터뷰에 남긴 이야기 중 눈에 채인 단어들을 적어뒀어요. 보고 고르실래요, 그냥 골라보실래요?
HJ 으하하하하. 재밌다. 안 보고 하나씩 열어볼래요. 이 사진이 여름 느낌이니까 여름부터 할까요? 여름부터 겨울로.
GQ 좋아요. 여름을 닮은 사진 뒤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HJ 성장, 성취감. 오! 맞아요. 이걸로 살아가는 사람인걸.
GQ 성장형 캐릭터를 좋아한다, 성취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자주 말했죠.
HJ 지금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면 잠에 들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이 있죠.

스웨트 셔츠, 베르니스. 반바지, 오버듀플레어. 귀고리는 혜준의 것.

GQ 그렇다면 실패한 성취부터 얘기해볼까요? 이뤄낸 성취는 너무 많을 테니.
HJ 와, 맞아요. 실패한 것들···, 실패한 것들···.
GQ 아주 사소한 것도 괜찮아요. 갑자기 엄청 엄숙해졌어요, 얼굴이.(웃음)
HJ 갑자기 우울해졌어요.
GQ 우리가 늘 성장하고 성공만 할 수는 없잖아요.
HJ 그걸 요즘 느껴요. 저희가 만났을 때는 제가 스물아홉이었는데, 저는 서른 살이 되면 더 과감해질 수 있을 것 같고 기대됐는데 오히려 서른이 되고 겁이 더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런 시기인 건가 싶기도 하고. 꾸준히 조금씩 성장해왔다고,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 사람이 계속 성취만 하고 살겠어요.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함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싶어요. 괜찮다고. 아우, 말이 좀 너무 어렵죠?
GQ 불안한 감정도 편하게 품고 싶다는 말이잖아요.
HJ 네. 그런 것도 성장의 일부분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것에 아직 실패를 하지는 않았지만 성공도 하지는 않았으니까.

스웨트 셔츠, 베르니스. 반바지, 오버듀플레어. 귀고리는 혜준의 것.

GQ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혜준 씨는 어떻게 해요?
HJ 어떻게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고 언젠가 지나가겠지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시기가 그런 것도 같은 게, 항상 작품 끝나고 인터뷰할 때는 끝난 후니까 다 이룬 것 같은데 지금은 찍고 있는 과정이거든요.(드라마 <캐셔로>를 촬영 중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나 봐요. 매일매일 불안하고, 이게 맞나 모르겠고, 오늘 뭔가 실패한 것 같은데, 싶고. 그런데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이게 또 어떤 발전을 가져다줄 테니까. 모두가 겪는 과정일 테니 억울하진 않아요. ‘나만 힘들진 않겠지?’ 하면서 그냥 받아들이는.
GQ 쇼펜하우어도 사는 게 고통이라잖아요.
HJ 기자님도 고통스러우세요?
GQ 그럼요.
HJ 그래도 이거 마감하고 잡지 나온 거 보면 뿌듯하지 않으세요?
GQ 그 순간의 즐거움들로 살죠.
HJ 그렇죠? 고통이, 불안함이 없으면 성취감도 없는 것 같아요. 뿌듯함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살아가는 재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무 애늙은이 같네. 생각만, 생각만 이렇게 합니다.

빨간색 슬리브리스 톱, 리포메이션. 귀고리는 혜준의 것.

GQ 그럼 자랑해봅시다. 성장하고 성취한 것. 이미 베스트 드라이버가 됐지만.
HJ 저 러닝을 시작했거든요. 이게 가능한 게 뭔지 아세요? 운전을 하기 때문이에요. 운전을 해서 한강에 가니까. 그 전에는 귀찮아서 안 갔거든요. 그런데 운전하면 한강까지 10분이면 가니까. 오늘도 끝나고 한강 달리러 가요.
GQ 혼자 달려요?
HJ 원래 혼자가 편해서 항상 혼자 달리는데 오늘은 웬일로 친구가 같이 달려보자 해서 처음으로 오늘 같이 달려요. 요즘 러닝이 엄청 유행인 것 같던데? 그런데 저는 유행 때문에 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꼭 기억해주세요. 으하하하하. 옛날에는 엄청 걸었거든요. 3시간, 4시간 걸었는데 이제는 뛰어요. 30분이든 1시간이든. 5킬로미터든 1킬로미터든. 생각을 버리려고 뛰는 건 아닌데, 뛰다 보면 잡생각이 없어져서 거기에 또 중독되는 것 같아요. 제가 당장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성취 같아요, 운동이. 그래서 그런 걸로 채워나가고 있어요.

초록색 슬리브리스 톱, 꾸레쥬. 안경, 페이크미.

GQ 다른 사진 하나 더 골라본다면요?
HJ 겨울.(눈 오는 한강 사진을 뒤집어본다.) <미성년>?!
GQ <미성년>의 첫 장면에 담긴 자신의 얼굴이 가장 좋다던 말이 인상 깊어서요.
HJ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우와.
GQ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미성년>을 봤어요. 예전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데 정말 혜준 씨의 얼굴로 탁 시작되더라고요.
HJ 옆모습으로. 유리창 보는. 2018년 2월. 그게 첫 촬영 첫 신이었어요. 남양주.
GQ 실제로도 첫 장면이었군요? 눈은 땡그랗고, 아무 꾸밈도 없어 보였어요.
HJ 되게 촌스럽잖아요. 부스스한 머리, 피부도 안 좋고. 그런데 가리지도 않았고.
GQ 볼에 난 여드름이 분장 아니었어요?
HJ 아니에요. 그때 여드름이 많이 났는데 (김윤석) 감독님이랑 분장 선생님께서 이걸 가리지 말고 살려보자고 그러셔서 그냥 안 가리고 고등학생처럼 그렇게. 그래서 코엑스인가 어디에서 상영하는데 여드름이 ‘이따만’ 하게, 제 머리통만 하게 보였어요. 프흐흐. 그런데 전 그것도 고등학생 같고 좋았어요.
GQ 그 얼굴이 왜 좋은지 궁금했어요. 정말 주리의 얼굴이자 김혜준의 얼굴이라서 좋았구나.
HJ 맞아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저의 매력을 가장 잘 담은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뭔가 맑은···, 좀 맑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신이. 빛도 좋았고, 그 옆모습이 제 눈에는 아이 같고, 귀엽고, 하하하, 맑은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그냥 딱 고등학생 같고 어딘가에 정말 있을 것 같은 주리의 모습 같아서. 그래서 저는 좋았어요. 그리고 그걸 처음 봤을 때는 복합적인 것 때문에 눈물이 났죠. 제 첫 상업 주연 데뷔작이었고, 마음을 많이 쓴 작품이기도 하고, 첫 촬영이었고. 그게 막 지나가면서 엄청 큰 스크린에 제 얼굴이 ‘이따만큼’ 나오는데 모든 게 몰려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는 퐁퐁퐁 울면서 봤어요. 퐁퐁퐁.

오버롤, 써틴먼스.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그때 얼굴만큼 좋아하게 된 요즘 얼굴이나 새로이 발견한 얼굴이 있다면요?
HJ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좀 차분해진 표정···, 보다 느낌? 옛날에는 웃거나 아니면 안 좋거나였다면 이제는 그 중간을 짓게 되는 것 같아요. 중간의 플랫한 그런 감정과 표정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안정감이 생긴 걸까, 아니면 일상이 재미가 없는 걸까? 일은 재밌어요. 그런데 일상에서 감정이 없는 건가? 이게 좀 헷갈려요. 예전에는 억지로 기쁜 척하거나 진지한 척하거나 그런 때가 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편안함을 찾은 건가 싶기도 한데, 그래서 편할 때도 있는데, 이게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GQ 플랫 Flat하다는 건 스테이블 Stable하다고도 할 수 있죠.
HJ 맞아요. 생각해보면 저는 (손으로 오르락내리락 그리며) 이런 삶을 살았거든요? 감정으로 치면 좋으면 막 좋고 슬프면 막 슬프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일자를 그리며) 평온을 찾았는데, 이게 익숙지 않으니까 좀 걱정이 되는 것 같아요. 참 복잡하다. 걱정이 너무 많아.(웃음) 오늘 저 너무 다 부정적인가요?
GQ 아뇨.
HJ 괜찮죠? 그런데 부정적인 복잡하다는 아니에요. 이걸 제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어떤 감정인지, 어떤 상태인지,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나의 이 슬픔이 뭘까 생각하다가 책을 하나 발견했는데 감정을 다양한 단어로 정리해두었더라고요. 기쁘다, 슬프다, 이렇게 딱 단순하게 감정을 말하는 것 말고 작가가 만든 새로운 단어로 표현해보는 책인 거예요.

티셔츠, 데님, 모두 리던.

GQ 너무 궁금하다. 그렇죠. 보통 우리는 감정을 “기뻐”, “화나”, “짜증나” 말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겹이 있는데 말이에요.
HJ 맞아요. 대부분 “짜증나”로 뭉뚱그려지잖아요. 저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세상이 다 짜증나잖아요. 나는 사실 짜증나는 게 아닌데 말할 수 있는 게 “짜증나”밖에 없으면 난 그냥 짜증만 내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전 그게 싫어요. 그 안에는 서운함이 있을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너무 좋아하고 너무 애정해서 그런 걸 수도 있는데. 그걸 “짜증나”로 뭉뚱그리는 건 조금 섭섭하네요. (가방을 열어 책을 꺼낸다.) 이 책이에요. <슬픔에 이름 붙이기>. 예를 들면···, 저는 오늘을 기억하고 싶으니까 이 단어를 골라볼게요. ‘데뷔 dès vu’. “이 순간이 기억되리라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래요. 왜 이건 데뷔지? 좋은 게 많아요.
GQ 좋아서 책 끝을 접어놓으셨겠죠? 꽤 많이 접혀 있네요.
HJ 저는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머리말 있잖아요, 거기서부터 감명받았어요. 이게 너무 위로가 됐어요. “그리하여 당신이 너무 심하게 길을 잃었다고 느끼진 않은 채-실은 우리 모두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며-당신만의 방식대로 그 질서를 정착시킬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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