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근 손 끝.
배경준ㅣBORNYON
GQ 맛있다는 감각을 강렬하게 인식한 첫 순간을 돌아본다면요?
KJ 푸드 메모리라고 하잖아요, 그게 제게는 외가댁에서의 추억 같아요. 외할머니가 대구 분인데 항상 꽃게 된장찌개에 청양고추를 엄청 많이 넣고 끓여 주셨어요. 매운 거 잘 못 먹을 아기 때인데도 그건 또 잘 먹었대요. 그 맛이 아직도 생각나요. 집된장 맛이라고 해야 할까요? 할머니가 된장도 직접 하시거든요. 한식에 대한 좋은 경험, 그 맛이 계속 생각나서 그런지 지금도 그런 유의 음식을 하나 봐요.
GQ 그 맛이 셰프라는 길로 이끌었으려나요?
KJ 그렇기도 하고, 식탐이 많았어요. 친구들이랑 운동하고 걔들보다 많이 먹으려고 피자 3개씩 접어 먹고 그랬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그럼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건 일단 라면 끓이는 건데, 맨날 다르게 먹고 싶은 거예요. 어느 날은 버섯 남은 거 넣고, 어떤 날은 우유 넣고. 그게 시작 같아요. 초등학생 때 가정통신문 보면 장래 희망이 다 요리사더라고요. 그러면서 중학생 때부터 자격증 따고, 그러다 고등학교를 미국으로 가게 됐는데 일본인 친구가 스시집 한대서 “나 너네 집 가서 일해도 돼?” 해서 거기서 일하고, 그러다 보니 또 그쪽으로 생각이 디벨롭돼서 CIA 요리 학교를 가고, 뉴욕 그래머시 태번, 샌프란시스코 쌀, 모수···.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고개 숙이고 요리를 계속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음식 알아봐주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요.
GQ 3년 전인 2021년에 모수 서울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주방 안 셰프님 모습을 봤어요.
KJ 키 큰 애가 뭐 들고 지나간다고 많이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할 때부터 모수에 대한 얘기를 항상 들었어요. 그래서 한번 맛보러 갔을 때, 한입 거리 음식부터 디저트까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거예요. 너무 인상적이었고, 맛있었고, 그다음으로는 ‘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이런 게 나오지?’ 싶었어요. 주방에서 나오는 아우라라고 해야 할까요? 기가 엄청 세요. 엄청 조용한데 기계가 일하는 것처럼 탁탁, 탁탁, 탁 하면 나오고. 나도 저들의 일부가 되고 싶다, 그랬어요. 일하면서 너무 좋았죠. 가장 힘들면서도 좋은 경험이었죠.
GQ 한 단계 한 단계 지나오며 배움을 발판 삼아 배경준의 것으로 삼은 한 가지는요?
KJ 통해 통해 테크닉을 배운 건 맞거든요. 버터와 지방을 쓰는 법을 배우고, 향신료 쓰는 법을 배우고, 기술은 배우는데, 어떻게 보면 셰프들은 배워가면서 창작을 하느냐 아니냐로 나뉘는 것 같아요. 저는 그 기점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을 때의 경험인데,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오퍼를 받았어요. 그래서 일 끝나고 바로 비행기 타고 가서 ‘트라이얼 Trial’이라고, 셰프들은 면접 대신 하루 일을 해보는 테스트를 거치는데 (합격이) 안 됐어요. 내가 왜 안 됐지? 약간 분한 것과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게 생겼어요. 갑자기. 그래서 쉬는 날 혼자 나와서 창작이라는 걸 시작했어요. 그냥 내 것을 만들어봐야겠다. 누구 것을 하기보다 내 것을 만들자. 그때부터 창작을 했고, 그 창작물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팝업을 몇 번 열었고, 그게 좋은 반응을 얻어서 성취감을 느꼈죠. 모수의 장르는 안성재죠.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저도 장르가 배경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까지 해온 경험들이 물감 같아요. 하나하나 물감을 받았고, 그 물감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이제 내 장르를 만들어가는 단계죠.
GQ 지금 셰프 배경준이 손에 쥔 붓은 뭐예요?
KJ 일단 발효랑 우드파이어인데, 가스불도 좋지만 숯을 쓰는 걸 좋아해요. 원초적인 면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 굉장히 많아요. 숯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냅다 던져놓고 굽는 게 아니라 어떤 때는 참숯을 좀 섞어서 쓸까, 아니면 연기를 피워서 같이 쓸까, 아니면 장작을 반만 태워서 넣어볼까, 직화로 해볼까,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해요. 발효는 우리나라 발효 보면 너무 멋있어요. 곡물이랑 섞어서 나오는 게 된장이고, 그 된장으로 간장을 만들고 3차, 4차 막 여러 가지로 가잖아요. 그게 신기하고 공부할수록 어려우면서 좋은 거죠.
GQ 셰프님도 인생을 요리하라는 미션을 받았다면 어떤 음식을 만들었으려나요.
KJ 제일 처음 “맛있다”고 느낀 외할머니의 꽃게 된장국. 6년 전에 제가 처음으로 창작해서 팝업으로 선보인 음식이 그거였어요. 방울 양배추 안에 꽃게 살을 채워서 동그랗게 볼같이 만들고, 남은 게 껍데기와 된장으로 육수 내서 된장국 만들고, 옆에 단새우를 곁들여 냈어요. 서양인 입맛에도 맞게 슴슴하게. 궁금해요. 6년 전의 나는 이렇게 만들었는데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시 해석할까.
GQ 레스토랑 테라스에 장독대가 있던데, 혹시 안에 장이 있어요?
KJ 해야 해요. 김명성발효연구소라고 셰프들끼리 모여서 배우러 가곤 하는데, 곧 저희도 몇 년의 프로젝트로 장을 담그려 하고 있습니다. 날씨 추워지면 가야죠. 발효를 컨트롤해야 하니까 여름에는 식초만 하고 겨울에 장을 떼거든요. 제가 발효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번 해에 맛있는 매실을 담가놓으면, 내년에는 그 매실과 다른 맛있는 과일을 같이 내서 더 맛있게 할 수 있고, 3년 후에는 또 다른 레이어가 생겨서 더 맛있어지잖아요. 저장 음식의 복합미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새로운 맛이 너무 좋아요. 저는 레스토랑도 매일매일 맛있어졌으면 좋겠어요. 매일매일이 좀 더 좋아지면 좋겠어요. 많이는 아니어도 되는데 오늘이랑 내일이 같으면 안 된다는 게 저의 철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만약 레스토랑에 처음 들어온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푸는데 처음에는 당연히 못 푸겠죠. 되게 못나게 퍼요. 그런데 이 친구가 못나게 푸는 것에 대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으며 더 잘하고 싶어 하면, 그게 보이거든요? 그러면 저는 오케이예요. 못생겨도 괜찮아요.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잘하고 싶어 하고 계속 디벨롭하고 계속하면 다음 날은 괜찮아지고 그다음 날은 더 괜찮아져요. 저는 직원뿐 아니라 레스토랑의 모든 요소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년에는 더 좋아지고 내후년에는 더 좋아지겠죠.
GQ 그러고 보니 <흑백요리사>에서 최현석 셰프와 1대 1 대결 때 재료가 ‘장트리오’였잖아요.
KJ 맞아요. 장 나와서 저는 좋았어요. 딱 보자마자 웃었어요.
GQ 그 근막 한 점이 참. 아쉬웠겠어요.
KJ 지금 ‘요리하는 돌아이’ 셰프님이 백종원 대표님이랑 촬영하고 있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불러주시면 근막 안 씹히는 돼지 요리 하겠다고.(웃음) 오기가 들려서 진짜 제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죠. 탈락하고 집에 오는데 처음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딴 거 할걸. 그런데 할걸, 할걸 그러면 뭐 해요? 어쨌든 좋은 과정이었고, 경험했고, 계속 해야죠. 이 레스토랑 시작한 지 아직 5개월도 안 됐고 제가 보여준 건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말씀드렸듯이 매년 더 맛있어질 거예요. 2년 후, 3년 후, 5년 후 어떻게 변할지 기대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