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족보가 생생하게 불타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니까, 이제 무엇이 K팝인지 따지는 질문은 촌스럽다는 말이다.
글 / 최이삭(K팝 칼럼니스트)
2024년 K팝 최고의 명장면을 하나 뽑아보자. 소동이 많았던 한 해라 고심되지만, 필자는 블랙핑크 리사의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베스트 K팝’상 수상을 고르겠다. K팝 가수가 미국의 음악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건 더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의 K팝 부문 시상은 믿고 거른 지 좀 됐다. 영어로 부르고 미국에서 정석으로 프로모션했으며, 그해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열 번이나 1위를 한 방탄소년단의 ‘Butter’가 베스트 K팝상을 탄 이후부터다. 그러나 이번 리사의 수상은 트로피 이상의 의미가 있다. K팝의 족보를 불태워버린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수상곡인 ‘Rockstar’는 리사의 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담은 영어 곡이다. 이 노래는 탈 K를 지향한다. 뮤직비디오는 태국의 ‘차이나’타운에서 촬영했고, “리사 캔 유 티치미 ‘재패니쉬’ 하이 하이”가 훅이다. K팝 뮤직비디오 특유의 뽀샤시와 동화적 세계관도 찾아볼 수 없다. 다크한 질감과 극적인 모션으로 아티스트의 임팩트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리사는 첫 솔로곡 ‘LALISA’로 2022년에 같은 상을 받았다. 이 노래 역시 태국인의 정체성을 녹였지만, 한국어 가사의 맛을 살린 YG의 지문이 찍혔다. K팝이 맞는지 헷갈리지 않았다. YG에서 독립한 리사의 솔로이스트 커리어에서 K팝스러운 행보는 현재까지 유튜브 예능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 출연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선택을 통해 리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해 보인다. K팝의 경계를 뛰어넘겠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현재 1.05억 명. K팝 가수 중 가장 많으며, 글로벌 랭킹은 무려 38위다. 한국은 물론 인구 7천만의 태국,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지지 기반은 그의 도전과 모험을 더욱 힘차게 만든다. K팝은 ‘한국어 가사로 구성된, 한국인이 부른 음악’인가? K팝의 족보처럼 자리 잡은 세대론은 유효한가? 리사는 이 의문에 대안을 제시한 가장 유력한 아티스트다. 애초에 H.O.T.를 선조로 삼는 K팝의 세대론은 SM의 초창기 인기 아이돌의 계보에 나머지 가수들을 억지로 끼워 넣은 가짜 족보 아니었던가. K팝의 족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리사가 탈K로 K팝의 근본을 묻는다면, 하이브와 미국 게펜 레코드의 합작 걸그룹 캣츠아이(KATSEYE)는 ‘입(入) K로’ 질문한다. 캣츠아이를 잠깐 소개하겠다. 한국인 멤버는 단 1명.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인종으로 구성된 걸그룹이다.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드림 아카데미>를 통해 올해 데뷔했다. 여담이지만 평범한 한국인 연습생이었던 윤채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글로벌 걸그룹의 멤버가 되어, 데뷔 후 나날이 영어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는 게 덕질 포인트 중 하나다. “캣츠아이로 어학연수 가고 싶다”라는 트윗이 최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도 명장면을 많이 남겼다. K팝 아이돌이라면 모두 거쳐 가는 <인기가요> 비상계단 난간에서 인증 숏을 찍고, <주간아이돌>에 출연해 댄스 신고식을 했으며, 지난 추석에 고운 한복을 입고 “Happy 추석”이라고 인사도 했다. 이마에 빈디를 붙이고 댕기머리를 한 인도계 미국인 라라의 모습이 특히 멋졌다. 캣츠아이의 한복 인사가 명절 특집 외국인 우리말 겨루기의 한 장면 같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진지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해봐야 뭘 얼마나 하겠냐는 K부심은 캣츠아이의 결성 비하인드를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팝스타 아카데미>를 보고 완전히 깨졌다. 이야기는 데뷔를 꿈꾸는 다양한 국적의 소녀들이 LA의 합숙소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내리쬐던 연습실은 첫 번째 기량 평가 이후 <프로듀스 101>의 평행 세계가 된다. 빠듯한 데뷔 일정 때문에 단기간에 수준을 높여야만 하는 참가자들은 매일 12시간씩 연습하고도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 삼엄한 크리틱이 쏟아지는 월말 평가, 낯선 땅에서 서로를 지탱해준 친구들과 이별을 겪으며 그들은 한국인의 솔인 군기와 독기가 바짝 든 K팝 연습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서바이벌 녹화가 시작될 즈음에는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모두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과 정확히 다듬어진 표정으로 당장 KCON에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수준 높은 퍼포먼스를 펼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참가자는 에밀리다. 연습생 최초로 A레벨 평가를 받았고, 자기 긍정 노트를 쓰며 마지막 순간까지 데뷔의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최종 미션에서 탈락했다. 그의 간절함에 감화되어 캣츠아의의 무대를 볼 때마다 함께 춤추는 에밀리의 모습이 환영처럼 겹쳐 보이곤 한다. 이 과정을 필터 없이 비추며 <팝 스타 아카데미>는 K팝의 본질이 무엇인지 미러링해서 보여준다. 탈락하면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서늘한 능력주의의 룰, 불투명한 미래에 인생을 건 어린 연습생들의 눈물과 불안, 그들을 책임지지 않는 비정한 자본. 그렇게 만들어진 혹독한 결과물이 K팝의 본질이다. 현재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K팝 스타일을 응용한 가수들이 활동 중이다. 의상과 메이크업은 물론 각종 챌린지, 유튜브 채널 재생 목록 구성까지 똑같이 따라 한다. 그러나 조금도 K팝스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미안하지만 충분히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K팝은 부강한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새마을 정신으로 건설됐다. 그래서 수많은 현지화 그룹이 데뷔하고, 영어 가사 곡이 멜론 차트를 점령하게 된 대도 K팝은 언제나 Korean의 음악일 것이다.
새마을 정신에 이은 또 다른 K팝의 본질은 팬덤이다. 전 세계 인스타그램 팔로워 순위 상위 50명을 알아보자. 매일 인스타그램 스크린타임을 5시간은 찍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20명도 되지 않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1천만 인플루언서가 넘쳐나는 시대다. 관심 경제가 활성화될수록 무관심도 그만큼 커졌다. K팝 팬덤은 이렇게 동떨어진 관심을 하나로 잇고 증폭하는 구심 역할을 한다. 국적이나 성향의 차이로 엇갈려 있는 팬, 알고리즘이 근접한 대중에게 최애의 콘텐츠와 스토리를 유통하고, 서로를 독려하며 전략적으로 차트 성적을 만들어 파이를 키운다. 단순히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합을 넘어 그 자체로 K팝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어로 노래하고 소통하는 캣츠아이가 한국 활동에 매진하는 이유는 K팝 팬덤에 진입하는 것이 진짜 데뷔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AVAX의 한국 자회사가 만든 걸그룹 XG도 K팝 가수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한국 음악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K팝 리그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더 많은 관심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유능하고 헌신적인, 게다가 공짜인 K팝 팬덤 기반과 함께 가려는 시도는 앞으로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K팝의 미래는 언제까지 밝을까. 나는 아이돌 지망생이 ‘표정 연습’을 하는 방에 가본 적 있다. 크기도, 조명도, 울어도 들키지 않을 것만 같은 아늑함도 꼭 독서실 같았던 그 방엔 작은 책상과 전신 거울이 놓여 있었다. 한동안 실용음악학원 작곡반에 다니며 본 것들이다. 요즘 실용음악학원은 아이돌 종합 입시학원 같은 게 됐다. 본격적이고, 비쌌다. 직장 근처의 한 학원일 뿐이었는데, 실내가 청담 사거리의 피부과처럼 뻑적지근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하는 작곡 취미반 수강료가 50만원이었다. 댄스와 보컬을 기본으로 과목을 추가하고, 외국어도 따로 배워야 하는 지망생들은 그야말로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 아이돌 사교육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런 학원이 전국에 수백 개는 될 것이다. 연습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앳된 얼굴의 지망생들을 마주할 때마다 K팝의 미래가 참 밝다고 생각했다. 희박한 성공 확률에 모든 것을 걸고, 실패하면 노력이 부족한 내 탓이 되는 경쟁 사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미성년자 아이돌에게 너만 그러고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과로사회가 계속되는 한 K팝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K팝의 미래가 너무 눈부셔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