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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지아가 쓴 김고은, 이지아의 위스키 여행 기록

2024.11.21전희란

주로 둘이서.

# 시작

배우 김고은과 처음 만난 건 LA에서였다. 처음 고은과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도 얼마간 LA에 머무는 일정이었고, 나 역시 그랬다. 작품이 끝나고 잠시 게으른 시간을 보내는 시기, 둘이 만났고, 둘이 마셨다. 주로 둘이서 마셨다. 밸런스 게임을 했다. ‘여행 vs 음악, 둘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졌고 둘 다 답을 하지 못했다. 둘 중에서 무언가를 포기하는 상황은 끔찍하기만 했다. 나는 답할 수 없었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MBTI로 보자면 둘 다 ‘P’ 성향이다. 고은이는 호텔과 비행기 일정 빼고는 계획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그녀보다는 조금 더 ‘J’에 가깝다.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떤 공연을 보고 어떤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고 싶은 바람을 담아 계획을 짠다. 그렇다고 그 계획대로 여행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공연 예매를 해놓고 둘이 수다를 떨다가 공연을 까맣게 잊은 적이 있다. 호텔방에서의 수다. 낄낄대며 웃다가 시계를 봤을 때는 공연이 시작되고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감정과 그때의 상황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다음에 둘이 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내가 스케줄을 짤 거다. 꼼꼼하게 혹은 촘촘하게···. 하지만 그 계획은 지켜지지 않을 거고, 그녀에게 나는 ‘J’에 가까운 ‘P’라는 놀림을 받을 거다. 우리 둘에게 여행은 그런 것 같다. 그 순간에 충실한 그 무엇.

# 발베니의 시간

더 디스틸러스 라이브러리.

서울신라호텔 안에 위치한 ‘더 디스틸러스 라이브러리’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다. <대도시의 사랑법> 개봉을 앞두고 있었고, 일본에서 <파묘>가 개봉하면서 갑작스레 홍보 일정이 추가되었고, 새로운 드라마를 촬영하느라 무척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조금은 지쳐 보였다. 걱정이 되어 먼저 말을 걸었다. 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곧 활기를 찾았다.

김미정 발베니 앰배서더의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설명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물, 효모, 보리. 오직 이 세 가지 재료를 이용해 만드는 싱글 몰트 위스키. 1892년에 설립한 스코틀랜드의 증류소 ‘발베니’는 설립 당시 그대로의 방식으로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다. 증류소 근처 농장에서 직접 보리를 재배하고, 그 보리를 이틀 정도 물에 넣어 수분을 머금게 한 뒤 바닥에 1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깔고, 하루에 네 번 나무 삽으로 일일이 뒤집어 공기와 잘 접촉시켜 보리가 싹을 틔우게 한다는 일명 ‘플로어 몰팅’. 그 몰팅한 보리를 분쇄해서 발효시키고 또 섬세하게 증류해서 오크통에 숙성시키고. 그 오크통을 직접 제작하고 수리하는 과정도 일일이 사람 손을 거친다는 말은 AI와 테크 제품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져서 신기하기도 했고, 어떤 신화에 대해 듣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발베니의 병에 사인이 들어 있는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 David Stewart는 60년 넘게 근무했고, 그의 근속 60년을 기념해 출시한 발베니 60년이 3억 3천만원에 판매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비싼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더 디스틸러스 라이브러리’에서 시음한 발베니는 12년 더블우드, 14년 캐러비안 캐스크, 16년 프렌치오크, 21년 포트우드 그리고 25년 레어 매리지. 각기 다른 오크통에서 두 번 숙성하는 기법을 사용한다지만, 25년 정도 숙성된 위스키가 내가 마셔본 것 중 가장 오랫동안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친 것이다. 하지만 그 25년이 단순한 25년이라고 느껴지지 않은 건, 130년 전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또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장인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발베니 한 잔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짧게는 20년 이상. 이 한 모금을 위해 노력하는 장인들의 수고로움과 그들이 장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숙련했을 시간들을 모두 생각하면,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시간들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한 병에 담겼을 시간들. 한 사람의 고되고 혹독한 시간이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 발베니의 가격이 얼마든 나는 그 장인들의 시간을 마시고 있는 셈이다.

# 한식 페어링

50대 남성들이 많이 모인 식당이 있다면 대개 맛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고, 미식에 대한 경험이 풍부할 걸로 짐작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의견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궁정동의 안가에서 생선전과 한식에 위스키를 곁들여 먹는 장면이 있다. 영화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살펴보면 곱창집에서, 고깃집에서 위스키를 곁들여 식사하는 모습은 흔치 않은 풍경은 아니다. 다만 이제껏 내가 한식에 위스키를 마시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을 뿐.

1924년 해남 장터에서 시작해 100년이 되었다는 ‘해남 천일관’에 가서 생각이 달라졌다. 4대째 전수되어 롯데백화점에 분점을 만들었고, 이번에 그곳에서 녹화를 했다. 요리도 요리지만 밥과 반찬이 맛있다는 제작진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50대 남성들의 맛집을 떠올렸고, 큰 호감도 기대감도 없었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첫 번째로 맛본 김부각. ‘바삭’하는 소리가 입안을 통해 고막으로 전달되고, 12년 더블우드를 혀끝에 살짝 밀어 넣었다. 김과 함께 튀긴 찹쌀풀을 더블우드가 부드럽게 녹여내고 치아 끝에서 전달되는 바삭거림과 김의 해조류 향기가 눈덩이처럼 뭉쳐지면, 혀에는 김 특유의 감칠맛이 남는다. 고은이는 새로운 단짠의 조합이라며 기뻐한다. 발베니의 꿀같은 느낌과 김부각의
짭조름 함이 단짠이라며 좋아한다. 초콜릿을 곁들이는 것보다 김부각이 더 좋다는 고은이. 나는 중년 남성들이 왜 한식에
위스키 페어링을 하는지에 대한 공감과 함께 20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 어딘가에 있을 바에서 견과류 대신 김부각을 내어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동시에 든다. 그저 김부각과 약간의 위스키가 나의 뇌를 깨워주는 것 같은 기분. 그건 분명 착각이다.

가장 맛있었던 것을 꼽으라면 떡갈비와 보리굴비다. 식당 측에서는 16년 프렌치 오크와의 페어링을 추천했다. 앞서 말한 서울신라호텔 ‘더 디스틸러스 라이브러리’에서 25년 레어 메리지와 스테이크, 16년 프렌치 오크와 샤인 머스켓 쇼트케이크를 맛보았다. 육즙이 풍부한 소고기 스테이크와 25년 레어 메리지의 부드러움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16년 오크우드는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는 인상 혹은 선입견에 조금은 의외의 조합이었다.

떡갈비와 16년 오크우드는 씹는 맛이 인상적이었다. 떡갈비를 조금 씹다가 혀끝을 적실 만큼의 오크우드를 입안에 넣으면, 앙다물어 치아 사이가 좁아질 때는 떡갈비의 간장 향이 입안에 번지고 치아 사이가 벌어질 때는 오크우드의 향이 그 공간을 메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씹을 때마다 반복되는 이 조합의 신비로움. 떡갈비 양념에는 간장과 설탕이 들어 있으리라는 짐작. 그 살짝의 달큰함이 프렌치 오크의 알코올을 만나 입안에 번져 나간다. 달고 짜며 그리고 조금은 매운맛이 뿜어져 나온다. 떡갈비가 아니더라도 불고기와도 잘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한다. 떡갈비를 먹으며 불고기를 생각하는 것은 이 음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의 뇌에 도파민이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고은이와 내가 가장 흥분한 것은 보리굴비였다. 젓가락으로 보리굴비를 찢어 프렌치 오크를 살짝 입 안에 머금으면···, 보리굴비의 진한 생선 향이 프렌치 오크의 47퍼센트의 알코올을 만나 순식간에 입안으로 번진다. 처음엔 마른 솔잎에 불이 붙을 때 나는 느낌이다. 불을 붙였지만 큰불은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러다 갑자기 마른 장작에 한순간에 불이 붙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그래서 결국 씹다가 삼키면 입안에는 나무가 탈 때 날 것 같은 향이 남는다. 입안 전체가 훈연이 되는 것만 같다. 여기에 숟가락으로 밥 한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 말 그대로 장작불에 솥으로 지은 밥이 되는 것이다. 아는 맛 그리고 조금은 생경한 위스키다. 어떤 표현이 더 좋을지 고민하다가 더 좋은 표현을 찾지는 못했다. 김고은 배우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고 싶다. “미쳤다!”

# 또 다른 시간 에어링

조셉 리저우드 셰프의 ‘에빗’에 대한 이야기다. 호주 태즈메이니아 출신인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요리 경험을 쌓다가 사랑에 빠진 곳이 한국이다. 그는 직접 농사에 참여하고 해녀들과 물질을 하면서 교류하고, 그렇게 경험하고 맛본 재료들에 그의 스킬을 얹어 요리한다. 대부분의 재료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이고, 거기에 덧대어지는 이야기도 한국의 전래동화들이다. 이방인이 바라본 한국 음식은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만 분명히 우리가 먹어본 음식이다.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과 글 재주가 탁월하지 않은 나로서는 조셉 셰프의 음식을 표현할 깜냥이 부족하다. 그나마 표정으로는 보여드릴 수는 있을 것 같으니 tvN과 Tving에서 방영되는 <주로 둘이서>를 시청해주시면 좋겠다.

‘에빗’에서 섬세한 조셉 셰프의 배려 덕분에 하루 정도 에어링된 발베니를 맛볼 수 있었는데, 위스키는 바로 오픈했을 때보다 오픈하고 며칠 지나면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신기한 것이 14년 캐러비안 캐스크였다.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14년 동안 숙성되고 캐러비안 럼 캐스크에서 추가로 숙성되는 이 친구는, 처음 병을 열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 반항심 강한 사춘기 아이 같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태런 애저턴이 연기한 ‘에그시’ 같기도 하다. 동네 양아치로 살다 킹스맨 에이전트가 되어 멋진 수트를 입은 모습을 보는 기분이다. 내가 뭘 해준 것은 없지만 한 캐릭터가 잘 성장하는 과정에 동참한 기분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에어링인 것 같다. 하루 동안이지만 병 안에서 향기를 머금은 입자들이 추가되고 사라지고 재배열되는 과학적인 과정에서 에어링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에어링은 발베니를 만든 장인들의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병을 오픈하고 나면 오롯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 ‘에어링’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담겨 있다. 위스키가 에어링 되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조금씩 맛보며 언젠가 빈병으로 남을 발베니 병에 담긴 나의 시간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나의 바람으로 채워져 있으면 좋겠다.

# 광화문의 갓

발베니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칵테일이다. 나는 단맛을 좋아하고 고은이는 단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우리의 호불호는 좀 다르지만, 본인의 취향을 설명하면 바텐더가 추천해준다. 또 파스타와 타코, 수육전과 오이무침 같은 간단한 음식들도 즐기기 좋다.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발베니 병 위에 씌운 ‘갓’이 너무 귀여웠다. 푸른 눈의 키 큰 남자가 도포를 두르고 갓을 쓴 느낌이랄까?

새라새는 일종의 하이볼인데 참깨가 들어 있어서 첫 잔으로 마시기 좋다. 경계심을 풀고 분위기를 올리는 데 ‘딱’이지 싶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 악기 훈과 장구, 해금에서 영감을 받은 칵테일들이 있는데, 발베니의 장인정신과 전통 악기를 만드는 장인들의 정신을 서로 한 잔에 담은 의미가 있다. 난 장구가 흥미로웠다. 잔을 달고나가 덮고 있는데 그 달고나를 바텐더님이 주는 조그만 도구로 깨서 먹으면 된다.

마치 장구를 치듯이 조각이 난 달고나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음악을 듣는다. 광화문 거리의 차 소리, 사람 소리, 좋은 스피커가 내어주는 음악, 내 입안에서 퍼지는 달고나 씹는 소리, 소리의 칵테일. 거기에 발베니 12년 더블우드를 베이스로 만든 진짜 칵테일이 더해지면 지친 나를 위로하는 좋은 방법이 되지 싶다.

# 에필로그

tvN<주로 둘이서> 스틸컷

내가 쓴 글이 잘 읽히는지 모르겠다. 촬영이 끝나고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것에 재미가 있다는 사실도 그 뿌듯함의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글도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 썼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어서 <주로 둘이서>를 많이 봐주시면 좋겠다. 물, 보리, 효모 그리고 장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더해진 발베니 한 병과 함께하시면 더 좋겠다.

그날 따서 그날 모두 마시는 것보다 조금씩 천천히 에어링되는 과정을 음미하실 수 있으면 더 더 좋겠다. 그리고 좋은 음식과 함께 페어링을 즐기면 좋겠다. 거기에 좋아하는 사람까지 더해지면 더 더 좋겠다. 이 글을 쓰면서 좋은 위스키가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주로 둘이서>의 촬영장이 그랬고, 발베니와 함께한 음식들이 그랬다. 나는 ‘주로’ 행복한 사람인가 보다.

*이 글은 tvN 에 방영 중인 프로그램 <주로 둘이서>의 요청으로 작성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은 배우 이지아와 김고은이 위스키, 정확히는 ‘발베니’와 음식의 페어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위스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서 출발해 서울과 대만의 음식들을 맛보고 자신들만의 페어링을 찾아가는 일종의 성장 스토리.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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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주로 둘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