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GQ KOREA MEN OF THE YEAR – OH SANG UK
오상욱이 바라보는 칼끝 너머.
GQ 이기는 경기를 하는 선수가 있고 지지 않는 경기를 하는 선수가 있죠.
SU 맞습니다. 저는 후자 같아요.
GQ 그렇다고 과거의 오상욱 선수가 한 말이에요. 여전하네요. 그런데 이기는 것과 지지 않는 것이 다른가요?
SU 이기는 것은, 내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게임에 임하면 기분이 좋다기보다 승부욕이 딱 생기거든요. 경기 내용이 좋지 않았는데 이기면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아요. 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가 뭘 하는지 내가 계속 파악하고 ‘이 선수가 이렇게 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제 안에서의 과정이라고 할까요? 그 과정이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GQ 이는 펜싱의 기본 덕목인가요, 오상욱의 철학인가요?
SU 이런 철학을 가진 선수들이 있어요. 후배들이 국가대표 선수촌에 들어와서 경기할 때 보면 ‘나도 왕년에 잘했다 하는 선수인데’ 하는 마음에 지면 창피해하고 자존심 상해할 때가 있어요. 저도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와보니 지고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더라고요. 그 선수가 날 이겼지만 내가 생각했던 대로 움직이긴 했어. 거기서 나의 어떤 부분의 준비가 부족했다, 이런 영감을 얻을 때. 그때 더 짜릿하더라고요.
GQ 다음 올림픽은 2028년 LA 올림픽이지만 그 사이에도 50여 개의 크고 작은 펜싱 경기는 계속 열리죠. 최근 치른 경기에서 또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요?
SU 있어요. 최근 전국체전에서. 무조건 이길 거라는 확신이나 자신감이 최고치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올림픽 이후 조금의 공백이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번 경기에서는 평소 대회 준비할 때 대비해 상대 선수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하는 데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걸 제 자신이 알고 있었으니까 지더라도 실망은 하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고 나서 ‘내가 왜 졌지? 그래···, 내가 쉬었지’ 하고 생각에 생각을 하다가, ‘내 플레이의 문제점은 이거였다’까지 생각이 정리되더라고요. 그래서 단체전 때는 다시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다’라는 틀을 가지고 뛰었죠. 단체전에서는 진짜 저희 팀 애들도 잘했고, 결과도 좋았어요. 금메달 땄어요.
GQ 개인전 지고 나서 분하지는 않았어요?
SU 분하지 않았죠. 왜냐하면 제가 다쳐봐서 아는데 그때 다치거든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운동할 때. ‘내가 지면 자존심이 상하겠지?’ 생각할 때. 나 때문에 상하는 게 아니고 다른 누가 보고 있는데 내가 진다고 생각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냥 자존심에 쏘는 거야. 그때 다쳐요. 그러다가 다쳤던 것 같아요, 저도. 그게 뭐라고.
GQ 고향 대전에 곧 오상욱 이름을 딴 펜싱 체육관이 생긴다죠?
SU 맞아요. 너무 신기한 일이죠. 국내에서 펜싱 대회할 때마다 다목적 체육관 빌려서 거기에 자리 깔고 피스트 깔고 끝나면 다시 다 거두고 그랬는데, 전용 경기장이 생기면 한국의 펜싱을 더 높일 수 있는 기회이니 의미가 있죠.
GQ 그런 것치고 덤덤한데요?
SU 이게 대전 스타일이에요.(씩 웃는다.)
GQ 오상욱 펜싱 체육관에 꼭 있으면 좋겠다 싶은 물리적인 요소는요?
SU 우선 SK텔레콤 국제 그랑프리 펜싱 선수권대회가 매년 올림픽공원 핸드볼 경기장에서 열리거든요. 그런 세계 대회도 치를 수 있을 만큼 국제 규정에 맞게 지으면 정말 좋겠고, 옷이 두꺼우니까 훈련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옷을 잘 말릴 수 있는 건조기도 있으면 좋겠고, 물이나 얼음도 잘 나왔으면 좋겠고.
GQ 탐나는 뉴 테크놀로지 운동 기구 같은 건요.
SU 운동 기구는···. 기구보다는 훈련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거든요. 골프를 예로 들면, 어떤 사람은 힘을 앞다리에 8, 뒷다리에 1을 두고 한다든지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자신의 감각 문제인 거죠. 제가 운영하는 경기 스타일에는 화려한 게 별로 없어요. 그냥 기본적인 기본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기본기를 알려주고 싶죠. 이럴 때 이렇게 하면 좋더라, 앞발이 이만큼 나가면 뒷발을 이만큼 붙이는 게 좋다, 이런···. 기본기 안에서도 디테일한 게 엄청 많거든요. 그걸 설명하려면 진짜 오래 걸려요. 그 디테일한 부분들을 나누고 싶어요.
GQ 그건 오상욱이 지난 10여 년간 온몸으로 쌓아온 사적인 스킬 아니에요?
SU 전 알려줄 생각이 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고.
GQ 혹시 오늘 뉴스 봤어요? 알제리 오랑에서 열린 FIE 월드컵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임재윤, 박상원, 하한솔, 도경동 선수가 우승했대요.
SU 봤어요. 너무 기분 좋죠. 어제 그래서 제가 엄청 늦게 잤어요. 보면서 계속 연락하느라고요. 여기선 이렇게 하는 게 훨씬 낫다, 여기선 이건 아니다.
GQ 누구한테요?
SU 우리 선수들한테요. 메시지 남겨놓으면 4강 하고 결승전에 볼 수 있으니까.
GQ 뭐라고 보냈어요?
SU (메신저를 열어 문자를 보여준다.) “형, 차라리 형은 칼 계속 내리고 하는 게 나아요. 나갈 때나 쏠 때나. 형은 키가 커서 좀만 들어도 엄청 커 보여요. 키 커서 아래서 그냥 밀면 (상대가) 리포스테(Riposte, 반격으로 찌르는 동작) 못 할 듯.” (‘한솔이 형’이 대답한다. “오케이 참고할게.”)
GQ 실시간으로 함께했네요.
SU 새벽 4시, 5시에 잤나?
GQ 그런데 기사 제목이 너무하지 않아요? “오상욱·구본길 빠졌지만 동생들이 해냈다”.
SU 아니, 저 없이도 해야죠. 애들도 잘해요. 올림픽 때도 단체전 보면 애들이 잘했거든요. 그런데 개인전 결과나 2관왕이라는 수식어들 때문에 제가 더 주목받은 거지, 애들이 충분히 더 잘하고 앞으로 더 잘할 가능성이 많아요.
GQ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을 읽어드릴게요. 답해주세요. 첫 번째. “오상욱 없이? 우리 펜싱이 왜 잘하지?”
SU 저 없을 때부터 잘했어요. 원래 저 없을 때부터 잘했어요.
GQ 그랬죠. 오상욱 선수가 펜싱을 시작하기도 전,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기록했으니까요. 이후로도 펜싱 종주국이 아닌 한국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연유는 무엇일까요?
SU 일단 룰을 잘 인지하고 있어요. 펜싱 약소국가를 보면 룰을 잘 모르는 경우가 진짜 많아요. 자신이 졌는데 왜 졌는지 모르는 선수도 있어요. 우리는 룰을 잘 인지하니까 그에 대한 훈련이 체계적으로 짜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내심이 강해요. 일단 해요. 그게 쌓이고 쌓일수록 훨씬 더 커지겠죠. 그런 게 지금 한국 펜싱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GQ 두 번째 댓글. “펜싱 사브르 세대교체도 성공한 듯”. 제가 오상욱 선수라면 서운할 것 같아요. 벌써 세대교체 얘기가 나오다니.
SU (동석한 관계자가 묻는다. “‘어펜저스’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요?”) 아뇨, 이번 경기를 두고도 세대교체가 됐다고 말씀하시는 걸 수 있죠.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말고도 다른 펜싱 선수도 많고, 그 선수들이 다 각광받는 환경이 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만약 제가 지금 펜싱을 그만둔다고 쳐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만약에. 그럼 “너 왜 그만둬, 임마. 당연히 다음 올림픽까지 해야지”라고 하시는 분이 많겠죠? 저는 그 “당연히”가 싫어요. 혹시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이 한 10개 됐나요?
GQ 현시점에서는 8개요.
SU 그렇죠? 다음 시합 시작되잖아요? 그럼 그땐 6개 정도 달릴 거예요. 그러다 아시안게임이 시작된다? 그럼 또 늘다가 다시 또 적어질 수 있겠죠. 저는 그런 굴곡을 조금 더 완만하게 만들고 싶어요. 당연히 세대교체는 계속돼야죠. 제가 없을 땐 저보다 더 잘하는 선수들이 자리할 거고, 제가 다시 피스트에 오른다면 그건 제가 잘한 결과이자 저의 선택의 결과겠죠.
GQ 펜싱 선수가 오르는 무대이자 벗어나면 안 되는 경기장 피스트는 외나무다리 같기도 해요. 그 외나무다리로 계속 향하는 일이 지겹거나 벅차지는 않아요?
SU 외나무다리죠. 노래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신은 노래를 잘 안 듣는대요. 일이니까. 그래서 생각해보니 저는 펜싱에 대해서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지는 게 싫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냥 하는 거죠. 지면 또 연구하고. 그게 재밌어요.
GQ 기꺼이 외나무다리에 오르려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SU 자기가 잘한다면 그걸, 예를 들어 필살기라고 그래야 하나, 그런 잘하는 게 있다면 주위 사람한테 알려주라고 말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대부분 숨기거든요. 내가 이기려면 숨겨야 하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상대가 내 전술의 약점을 찾아서 뚫거나, 나는 나대로 내 전술이 상대에게 막히면 또 다른 허점을 찾아야 하거나, 결국에는 그 안에서 돌고 돌아요. 그리고 그 안에 답이 있어요. 그런데 혼자만 ‘이게 맞을 거야’ 하고 안고 있으면 막히는 상황이 왔을 때 해답을 잘 못 찾는 것 같아요. 잘하는 건 서로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
GQ 아낌없이 주는 나무예요?
SU 그런데, 그게 제가 얻어가는 것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