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수에서는 여러 모순이 멋으로 치환되어 접시 위에 놓인다. 안성재라는 사람도 그렇다.
GQ 지겨우니 <흑백요리사> 얘기는 하지 않을게요.
SJ 좋아요. 저도 더할 얘기 없어요.(벨루가 미소)
GQ 요즘 무슨 음악 들어요?
SJ 신해철 10주기 기념 추모앨범 들으면서 왔어요. 저는 음악을 가리지 않아요. 어릴 때 사촌 형들이랑 놀고 싶어서 신해철을 따라 듣다가 좋아하게 됐고, 제 가치관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그리고 조PD, 업타운, 웨스트 코스트 랩도 좋아했고, 이라크 파병 갔을 땐 슬립 낫, 판테라에 빠졌죠. 마일스 데이비스, 클래식 피아노 연주도 즐겨 듣고요. 어울리는 친구에 따라 스패니시 음악, 컨트리, 재즈, CCM 다양하게 들었고, 아, 딸의 영향으로 뉴진스, 아이브도 좋아해요.
GQ 전에 모수에 갔을 땐 검정치마, 최백호가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돔 페리뇽 소사이어티 셰프이자 ‘최애’ 술을 ‘소맥’이라고 말하는 사람. 또 장인 정신과 동시에 굉장히 예술가적인 면도 있죠. 올해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World’s 50 Best Restaurants’ 시상식 뒤풀이에서 아토믹스의 박정현 셰프가 이렇게 말했어요. “형은 언젠가 그림을 그릴 것 같아.”
SJ 저 그림 진짜 못 그리는데.(웃음) 정현이를 비롯한 많은 셰프들이 저의 예술적인 부분을 높이 평가해 줘요. 뚜렷한 콘셉트와 저만의 세계를 지독하게 밀고 왔으니까요. 그 세계를 저만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제가 고집하는 바를 밀고 나갈 수 있게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등 많은 행운이 따랐어요. 저는 맛으로도, 보이는 면에서도 굉장히 강한 표현을 해요. 단순히 모네의 그림을 보고 정원을 그리는 식이 아니라, 제 세계 안에서 제 식대로 내면화해서 표현하죠. 그것을 모든 사람이 알아보지 않아도 돼요. 표현하는 내가 알고, 플레이팅하는 직원이 알고, 그것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GQ “순간의 기억을 영원으로 데려간다.” 모수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메모장에 이렇게 적은 기억이 나요. 모수의 요리는 은은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엄청난 긴장과 힘을 느꼈고요.
SJ 느끼시는 바가 맞을 거예요. 저는 생각을 단순하게 하지 않아요. 직원들에게도 늘 말해요. “어렵게 길을 가다 보면 제일 멋있는 게 나온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길어요. 입에 넣지 못할 만큼 당연하지 않은 것부터 당연하게 맛있는 것들까지, 다 계산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 정제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죠. 또 긴장감은 플레이팅으로 줄 수도 있고, 도전적인 맛으로 줄 수도 있고, 시각적으로 줄 수도 있어요. 새롭거나, 특이하거나, 기대를 뛰어넘는 것들로 긴장을 줘야 흥분으로 이어질 수 있죠. 세상의 요령이란 요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어려운 길을 갈 때 더 뚜렷한 길을 간다고 느껴요.
GQ 문득, 대가가 찍는 한 점이 떠올랐어요.
SJ 소스 한 방울을 떨어뜨릴 때도 저는 다름을 느껴요. 그 한 방울을 위해 계속 수정을 하는 건, 누가 알아서가 아니고 내가 알기 때문이에요. 말은 심오하고 멋있게 하지만, 사실 음식은 별생각 없이 먹어도 맛있어야 해요. 그래서 이제는 심오한 면이 요리에 자연스럽게 스밀 수 있게 노력해요.
GQ 종종 파인 다이닝에서는 드러나는 배려가 되레 불편하게 다가올 때가 있는데, 모수에서 ‘드러내지 않는 배려’가 어쩌면 가장 고차원의 배려일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SJ 모수에서 제시한 전문적인 서비스의 기저에는 ‘불편함을 무디게 넘기지 말고, 민첩하게 반응하자’는 마음이 담겨 있어요. 이건 말이 아닌 공기로 느끼는 거예요. 동물적 감각으로, 동공의 작은 요동 하나로도 손님과의 거리를 재조정하는 거죠. “이것은 커피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설명했다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는 건 자신을 정당화하는 거예요. 손님에 맞춰 설명하는 톤, 스피드, 거리를 조절하고 맞춰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전문적인 서비스인 거죠. 저희라고 늘 성공하지는 않아요. 여기엔 엄청난 연습과 기술, 경험이 필요하거든요. 모든 건 자신이 아닌, 손님 위주여야 해요.
GQ 그런 서비스가 가능했던 건 ‘안성재’라서도 있죠.
SJ 선천적으로 저는 남을 굉장히 배려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때론 그냥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예요. 저는 필요한 순간이라면 아주 큰 제스처를 하는 사람이에요. 또 음식을 만들 때도 ‘손님에게 가장 좋은 것, 손님에게 가장 흥미로울 것’을 가장 먼저 고민해요. ‘무슨 디시를 해야 멋질까’라는 질문은 마지막에 던져요.
GQ 한국말이 어눌하던 시절에도 상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아챘다고 했었고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가능한 일일까요?
SJ 이민자로 살면서 어릴 때 혼자 외롭게 보낸 시간이 길었어요. 학교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풍경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걸으면서 나뭇잎에 비치는 햇빛을 본 느낌들이 머릿속에 선명해요. 모든 순간과 느낌들이 제게 스민 것 같아요. 그렇게 무언가를 잘 흡수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한번은 차에 치여 넘어진 채로 땅에 한쪽 뺨을 대고 있는데, 눈앞에 반짝이는 웅덩이가 보였어요. 그 순간도 생생해요.
GQ 고통 가운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
SJ 하여튼 좀 특이한 성향이 있어요. 캘리포니아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다른 직원들이 이런저런 폭력을 겪고 나가는 동안 저는 제일 오래 버텼어요. 한 번도 맞지 않았고요. 한번은 같이 일하던 동생에게 “이상해, 왜 다들 빨리 나가?”하고 물었더니 그러더라고요. “형이 이상한 거예요.” 그때 머리를 망치로 쿵 맞은 것 같았어요. 아, 내가 이상하구나. 저는 아마 병원 가면 정신 질환 있다고 할 수도 있어요.(웃음)
GQ 그 이상한 면이 멋지게 발현된 거겠죠.
SJ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뒤죽박죽인 삶의 경험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빡센’ 멘토를 많이 만났는데, 짓눌리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았어요. 삶으로 쌓은 식스 센스, 특히 좋은 것을 재빨리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요. 순간에 푹 빠져 상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편이고요. 오늘 여기서 느낀 것들도 몸, 마음, 머리로 기억해 DNA에 저장하고 미래에 사용할 거예요. 그것이 점점 빌드업되면서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고 느껴요.
GQ 누구보다 진지하지만, 유머 감각 또한 남다르죠. 몇 번의 인터뷰를 하면서 저는 생각했어요. 안성재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도 잘할 것 같다.
SJ 저는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게 유머라고 생각해요. 코미디를 아주 좋아하고, 코미디언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평소에 웃길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면 기회를 안 놓치려 해요. 어쩌면 <흑백요리사> 제작진이 저에게 베팅한 것도 대화에서 나오는 말투나 제스처에서 유머를 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모수를 찾은 손님들에게도 웃음 코드를 던져 아이스 브레이크하고, 직원들에게도 그러려고 해요. 그들이 당장 웃지 않더라도 전 알아요. 집에 가서 웃을 거라는 걸.
GQ 그런가 하면 ‘미친놈’, ‘돌아이’ 같은 표현을 칭찬으로 사용하기도 하죠?
SJ 저는 미친놈들이 하는 것을 되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자는 것, 노는 것, 먹는 것보다 ‘이 일이 먼저다’라고 여기면 미친 거잖아요. 그 어떤 시기에 얼마큼 오랫동안 깊이 미쳐 있는가가 평생을 좌우하는 것 같아요. 미쳐보지 않은 사람의 음식은 맛이 없어요. 무난하죠. 마약에 취한 로큰롤 시대의 밴드 음악, 자동차 얼마나 멋있어요.(웃음) 사실은 내 일에 대한 열정, 에너지 자체가 마약인 거죠. 한편으로 그게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에요.
GQ 여전히 미쳐 있어요?
SJ 요즘은 ‘초통령’이라 너무 미치광이면 안 돼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줘야죠.(웃음)
GQ 새삼 느꼈는데, ‘복수’란 단어를 많이 쓰더군요. <글래디에이터>에서 좋아하는 대사에도 그런 맥락이 있고요. 가장 멋있는 복수는 뭐라고 생각해요?
SJ 제가 사용하는 복수의 의미는 ‘Redemption’, 더 정확히 말하면 ‘더 잘해야지’란 마음이에요. 저는 굉장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제가 해야할 일을 제대로 못 했을 때 ‘졌다’라고 생각해요. 모수에서 손님이 좋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면 나는 진 거예요. 그러면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고민하죠. 셰프로서, 가장 멋진 요리사가 되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 저는 그게 가장 멋있는 복수라고 생각해요.
GQ 은연중에 ‘도망치고 싶다’는 표현도 종종 쓰죠. 그런데 신기한 건, 정작 도망치거나 회피한 적은 없어 보여요.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SJ 말씀하시기 전까지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 꽤 많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라는 가사가 있는 김필의 ‘서울 이곳은’도 좋아해요.(웃음)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 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대 후예요.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왔는데, 당시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아주 아프셨어요. 뇌에 물이 차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간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니 운영하시던 식당의 맛이 없어진 지 한참 되었고, 통장 잔고는 바닥이 나서 병원도 못 가는 상황이었죠. 제 크레딧 카드는 이미 한도 초과했고, 집세는 3개월 동안 밀려서 ‘한 달 안에 나가라’는 통지를 받았어요. 아빠도, 엄마도, 가족 모두 도무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벼랑 끝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당시에 창고 같은 곳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비가 와서 빗방울이 베개 옆으로 툭 툭툭 떨어졌어요. 그 소리가 마치 폭탄 소리처럼 들렸어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그 순간, 생각이 들었어요. 다 됐고, 이 빗소리에서 도망가고 싶다. 지금도 그 폭탄 같던 빗소리를 잊을 수 없어요. 다음 날이 되면 집주인에게 빌어야 하는 상황, 흑인 친구들에게 쫓기고 숨어야 하는 등 별별 경험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제 입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도망가고 싶다”라는 말이.
GQ 그럼에도 도망가지 않았네요.
SJ 도망간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삶은 어떻게든 헤쳐나가게 돼 있어요. 죽지 않는 이상, 밑바닥에서도 솟아날 구멍은 있어요. 그때 그걸 배웠어요.
GQ 어쩌면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을 두려움에 맞서는 힘으로도 쓰는 것 같아요.
SJ 거기서 희열을 느끼고, 그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란 것도 알아요. 쉽지만은 않아요. 사람들이 제게 그래요. “어디서나 당당한 것 같다, 긴장도 안 하냐, 쫄지도 않냐” 사실은, 늘 긴장해요. 사람 다 똑같아요. 늘 긴장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무대에 오르면 최대한 당당해지려고 해요. 사람들이 그런 저에게서 자신감을 발견했다면, 그 다음엔 그 자신감을 무기로 사용해요. 그렇게 살다 보니 어딜 가서 누굴 만나도 쫄지 않아요.
GQ 약한 모습은 어디에 숨어 있어요?
SJ 내면에 있죠. 이겨내려고, 또 겸손해지려고 복싱을 해요. 몇 달 전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나갔는데,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원초적인 긴장감을 느꼈어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아요. 프로 선수의 싸움만이 진정한 싸움이 아니고, 나와 동등한 상대와 싸우는 것도 진정한 승부예요. 두려워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을 어릴 때 이후 처음 느꼈거든요. 그 느낌이 너무 싫었지만, 너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