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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채 “생존해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워요”

2024.12.23김은희

그곳이 들판일지언정. 정은채가 깨어 있는 동녘.

드레스, 로에베. 케이프, 질 샌더.

GQ 평소 아침 일찍 움직이는 편이에요?
EC 네, 저는 새벽형이어서.
GQ 신체 리듬도 깨울 겸 오후에 시작하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른 시간을 선호하길래요.
EC 맞아요. 새벽 5~6시에 일어나거든요. 일이 오후부터 있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오히려 힘들어서 가능하면 빨리빨리 하는 게 저는 좋더라고요.
GQ 하루를 일찍 시작하네요.
EC 그렇게 산 지 몇 년 됐어요. 잠은 12시 전에 자고.
GQ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정은채의 루틴이나 의식이 있나요?
EC 음···, 12월 31일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친구들이랑 만나서 떠들썩하게 파티도 하고 카운트다운을 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세리머니가 좀 없어졌어요.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냥 흘러가듯 보내요. 특별한 이벤트 없이. 자연스럽게 다음 날 일어나면 새해가 됐구나, 이런. 여느 하루와 다를 바 없이.
GQ 혼자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에요?
EC 혼자 있을 때는 거의 뭐 자연인에 가까운. 흐하하하. 어떻게 보면 절전 모드? 스마트폰 절전 모드같이 충전하는 모습이에요.
GQ 최소한의 움직임, 나직하고 느릿한 모습이 상상되네요.
EC 네, 네. 그런 모습.

재킷, 원피스, 슈즈, 모두 루이 비통. 다이아몬드 네크리스, 그라프.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혼자 있을 때 어떤 모습일까 던진 물음표는 은채 씨 질문을 빌려온 거예요. 새 캐릭터를 입을 준비를 할 때 그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길래요.
EC 아, 맞아요, 응.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환경에 적응해나가면서 지내는 것도 물론 그 사람의 모습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이 오롯이 혼자가 됐을 때 그 사람의 템포나 온도가 그가 편안한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상상을 하나 봐요.
GQ 그 시간을 거쳐 완성한 캐릭터 중에 <안나>의 이현주도 있겠죠. 2022년 작품인데도 여전히 많은 장면이 밈이 되어 회자되고 있어요.
EC 그러니까. 유난히 <안나>의 현주 캐릭터를 좋아해주셔서.
GQ 굉장히 해맑고 자기중심적이고 그런데 미워할 수 없는.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의 일면 같은 투명한 이기심이 아주 잘 표현되어서라고 생각해요.
EC <안나>를 연출하신 이주영 감독님의 연출 덕 같아요. 감독님이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를 좋아하시지 않고 사람을 한번 뒤틀어서, 각도를 달리 세팅해서 보는 것에 재미를 느끼시는 분 같은데 저도 마찬가지라서 그런 면에서 서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고 느껴요. 이현주 캐릭터의 경우에도 어떤 각도로 보면 누군가의 인생을 옥죄어오는 빌런이지만 그렇게만 다가가면 평면적이고 재미가 없잖아요. 그리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이기적인 것은 다른 이야기잖아요. 그런 데서 확실하게 다름을 보여줘야지 이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유미도 다각도로 보이면서 모든 캐릭터가 앙상블을 이룰 텐데, 그걸 감독님이 글 속에서 아주 디테일하게 잘 써주셨고···, 그리고 그때 제가 감독님한테 여쭤봤어요. 저는 이런 캐릭터를, 이런 시나리오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왜 저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예요? (파안대소한다.) 그랬는데 감독님이랑 좀 오랜 시간을, 촬영하기 전 글을 쓰시는 단계부터 사적인 자리에서 많은 시간을 갖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친해지는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그러면서 저의 지금까지 보여지지 않았던 모습들, 어떤 무드나 톤을 더 살리고 싶어 하시는 느낌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좀 해맑게 마아악 그냥 웃는. 되게 편안한 상태에서 제가 그러는 거죠, 아주 가까운 사람들하고 있을 때. 그리고 뭐랄까 좀, 집에 있을 때 ‘아···’(몸의 힘을 빼고 등받이에 푹 기대며) 나른한 그런 느낌. 그런 걸 유심히 보시면서 “이런 무드로 가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그런 모습을 살리려고 해봤죠. 모든 신에서 조금씩.

드레스, 로에베. 케이프, 질 샌더. 슈즈, 지안비토로시.

GQ 현주가 아주 파안대소하거나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던 면모들이 지금도 좀 겹쳐 보였어요.
EC (해맑게 웃으며) 그니깐요, 그니깐요.
GQ 정은채의 면면이 녹아 있군요.
EC 그렇죠. 모든 캐릭터에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GQ 이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만큼 생생해서. 정말 부족함 없이 자란 건 아니고요?(웃음)
EC 그렇지는 않은데. 그냥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어떤 내적인 여유 같은 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들이 <안나> 현주를 연기하는 데 좀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고.
GQ 그 내적인 여유는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요?
EC 잘 모르겠어요. 타고난 기질 같기도 하고. 살다 보니 장착된 무기 같기도 하고.
GQ 무기라고 생각하는군요. 아무래도 조급해하는 마음보다는?
EC 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조급해하거나 혹은 좋거나 나쁜 일이 생길 때 스스로를 다시 절전 모드로 끌어올리는. 아니면 내리는 면에서.
GQ 아까 이주영 감독한테 물어보았다고도 했는데, 캐릭터를 준 상대에게 늘 하는 질문이 있어 보였어요. 알고 있어요?
EC 이 작품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오게 되었나?
GQ 맞아요. 왜 나한테 이 역할을 주신 걸까, 이 작품이 왜 나한테 왔을까, 항상 물어보는 것 같더라고요.
EC 캐스팅 제안이 와서 미팅을 하게 되면, 네. 보통은 작가님이나 감독님한테 궁금해서, 정말 궁금해서 물어봐요. 항상 그랬어요. 왜 어떤 면을 보고 이 역할을 제안하셨는지. 그 이유가 다 다르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제가 어떤 작품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저한테 제안이 들어오는 작품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받는다고 저는 늘 생각하거든요. 이 많은 배우와 이 많은 캐릭터와 작품 중에서 저한테 한 가지를 제안하시는 건 어떤 되게 큰 마음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해요. 메이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 캐릭터 한 캐릭터가 소중하잖아요. 살아 있어야 하고. 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을 뽑는 거고. 그래서 저도 최대한 정말 잘하고, 잘 표현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시작할 때 늘 질문을 했어요.

드레스, 푸시버튼. 이어링, 초커 네크리스, 링, 모두 샤넬 화인 주얼리. 슈즈, 페라가모.

GQ 그때 돌아온 대답 중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아본다면요?
EC <파친코> 했을 때.
GQ 경희.
EC 왜 더더욱 그러했냐면 그 오디션 과정이 좀 달랐어요. 어떤 작품인지 어떤 캐릭터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쪽짜리 간략한 소개 정도와 함께 오디션 제안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처음에는 사실 제가 제안 받은 캐릭터가 경희가 아니었어요.
GQ 그럼요?
EC 양진.
GQ 선자 엄마요?
EC 네, 젊은 시절 엄마. 큰 설명은 없이 일본어가 가능한지 영어가 가능한지, 사투리가 가능한지 좁혀나가는 카테고리에서 제가 거기로 넘어간 것 같아요. 저는 부산 출신이니까 부산 사투리 연기해서 (오디션 영상을) 보냈죠. 그런데 그다음에 인터뷰와 또 간략한 오디션을 보고선 바로 경희에 캐스팅됐어요. 나중에 다른 친구들하고 얘기해보니까 저는 비교적 캐스팅 단계가 짧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그냥 첫 번째 오디션 테이프를 보는 순간 양경희 캐릭터를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서 그 느낌이 보다 확고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신기했어요. 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지만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림 그려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가 보는 저보다 뚜렷한 이미지, 캐릭터의 느낌과 단상 같은 게 직관적으로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비하인드가 있어요.
GQ 만약 양진 역을 해야 했다면 나이대라든지 자신의 스펙트럼을 보다 넓게 펼쳐야 하는 지점이 있었을 텐데 크게 망설이지는 않았나 보네요.
EC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었으면 고민할 지점이 보다 많았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일단 뭔지 모르지만 한번 해보는 거죠. 사실 꼭 (캐스팅) 돼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너무 부담스럽긴 하잖아요. 결과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런데 그 과정을 즐겼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내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기도 했고, 한 번쯤 정말 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과정들이어서 결과가 되든 안 되든 간에 그와는 상관없이 배우들이 다 즐겼다고 느껴요. 그리고 양진 역을 안 하기를 너무 잘했죠. 정인지 배우가 너무 멋있게,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정도로 정말 멋있는 엄마를 연기해줘서 너무 다행이다. 이 얘기를 배우끼리 친하니까 서로 하기도 했어요.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그 오디션 과정이 재밌었어요. 신선했어요.

드레스, 느와 케이 니노미야. 이어링, 링, 모두 키린. 슈즈, 로저비비에.

GQ 나를 생각해보게 만든 질문이나 답으론 무엇이 있었을까 궁금해져요.
EC 정말 심플하고 단순할 수 있는데 “너는 시티걸이니, 외곽을 좋아하니?” 이런.
GQ 대답은요?
EC 저는 완전 자연. 자연을 선호한다고 하면 오디션 관계자들이 막 너무 좋아하면서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거죠.(웃음) 본인들이 생각하는 느낌에 맞아떨어지면 채택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쾌감이 있고, 아니면 아주 다른 면모를 보여주면 그거대로 또 신선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고. 되게 열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그 과정 자체가 여행같이 즐거웠어요.
GQ 나라는 사람을 가장 투명하게 대변할 수 있는 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죠.
EC 최근의 인터뷰였죠, 응. 그렇게 생각해요. 너무 뻔하고 단순한 얘기 같은데 그게 제일 투명하다고 여겨요.
GQ 지금껏 쌓아온 여러 시간의 층에서 지금의 정은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순간을 들여다본다면요?
EC 어떤 시기로 따지면 아마···, 학창 시절에 무언가 많이 형성된다고들 하잖아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했던 생각의 고리라든지, 뭐랄까, 학생들도 나름의 사회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학교생활도 하고 교우 관계도 있고. 그런데 그때를 생각하면 좀 고독하거나 혼자 생각을 되게 되게 많이 했던 시기로 기억나요. 마냥 핑크빛 느낌이 아니에요.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층이 많고 결이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는 느낌이에요. 그때 자아가 많이 형성된 것 같고, 지금의 성격이나 면모들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GQ 모르긴 몰라도 그 시기가 계속 눈에 채였어요. 중고등학교를 영국에서 다녔고, 주변엔 들판뿐이었고, 조용한 아이였다던 토막들을 취합해보면 외롭진 않았을까, 어떻게 지냈을까 싶은 거죠.
EC 맞아요. 학창 시절에는 내성적인 성향이 강했어요. 눈에 띄고 싶지 않고 그냥 잘 묻혀서 살고 싶은 그런 마음. 내가 직접 손을 들고 발표를 한다? 이런 일은 통틀어서 몇 번이 안 될 정도로 저한테는 잘 넘겨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게 미션 같은,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이 무척 컸어요. 그 학교가 시골 어딘가에 있는 기숙 학교였는데, 지금처럼 이런 겨울 시즌만 되면 오후 3~4시만 돼도 깜깜해졌어요. 내가 어디에 있나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 정도로 되게 적막하고, 어떨 때는 가슴이 아주 갑갑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앞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데, 벌판이 쫙 있으면, 거기를 막 뛰어가고 싶은 욕구도 생기고 그랬어요. 그게 뭔 줄 몰랐는데 그때는. 자아가 말랑말랑할 때 그런 극과 극의 감정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 벌판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심정이 그래서 아마 지금 제가 영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웃음) 연기를 하고 있는 게 그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나 이런 생각을 한 번씩은 해요.

드레스, 느와 케이 니노미야. 이어링, 링, 모두 키린. 슈즈, 로저비비에.

GQ 기질의 영향도 있겠지만 환경의 요인도 컸겠죠. 타국의 이방인이라는.
EC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렇죠.
GQ 한국에서 10대 시절을 보냈으면 달랐으려나요?
EC 저는 연기를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GQ 정말요?
EC 굉장히 규칙적인 직장생활이나 일을 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한국에 있었으면 학창 시절을 되게 재미있게 잘 지냈을 것 같거든요. 하하하하. 가기 전에는 그런 아이였어요. 항상 친구가 많고 밝고 활발하고 활동적인 아이였어요. 그러니까 그대로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았다면 아마 엄청 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아요.
GQ 그런데 시기가 지금의 정은채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는 회상이 전혀 우울하거나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아요.
EC 너무나. 정말로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진짜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GQ 벌판으로 막 달려가고 싶던 마음이 지금 연기를 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말이 와닿는 게, 정은채라는 배우가 걸어온 길을 보면 유유자적하는 느낌이에요. 욕심이 없어 보이는.
EC 절전 모드네요. 하하하하하. 잘 보셨네요.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큰 욕심이 없어 보인다고. 야망이 없어 보인다고.
GQ 그런데 욕심이 없을 수가 있나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사람이.
EC 어···,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
GQ 그 말도 알겠네요. 오히려 많기 때문에 없어 보이는구나.
EC 그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출한다기보다는 저는 좀 더 품고 있는 쪽에 가까워요. 그게 어떤 고민이나 걱정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내재된 원동력 같은 거죠. 저는 그게 되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껴요. 내 안에 뭔가가 있어야지 일을 하는 이유도 찾고, 제 삶의 원동력이 돼요. 단순히 증발하지 않는. 안고 있는 거죠. 그게 드러나지 않아도, 드러나도 상관없어요.

드레스, 느와 케이 니노미야. 이어링, 링, 모두 키린. 슈즈, 로저비비에.

GQ 혹시 본인의 언어로서 상대방에게 건네는 가장 큰 찬사는 뭐예요?
EC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GQ 자랑스럽다.
EC 자랑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쑥스럽기도 하고 귀찮아하기도 하는 편인데, 나서서 상대를 다른 누구한테 자랑하고 싶을 정도면 그건 저한테는 정말 엄청 용기 있는 애정과 사랑의 표현 같아요.
GQ 어떨 때 자랑스럽다고 느끼나요?
EC 저는 항상 현장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그냥 꿋꿋이 자기 일을 오래 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멋있고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게 쉽지 않단 걸 점점 더 느끼게 되고, 누가 보든 안 보든 그 자리에서 그것을 계속해나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랑스럽게 느껴져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GQ 은채 씨도 꾸준한 것 중 하나가, 아까 나라는 사람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건 내가 살아온 시간이라고 말한 게 최근 인터뷰이기도 하지만 12년 전 <지큐> 인터뷰에서도 남긴 말이에요.
EC (등을 젖히며 웃는다.) 흐하하하하. 발전이 없는 거네요. 뭔가 달라지고 레이어가 쌓이고 해야 하는데 그대로 이렇게 사네요. 와, 신기하다. 참 안 변하는가 보다 진짜.
GQ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지금도 변하지 않는 핵심 가치를 10여 년 전의 어린 나는 어떻게 세운 걸까?
EC 나이가 든다고 해서 나아진다고 얘기하지는 못할 것 같고, 또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음···, 어릴 때는 경험이 부족해서 할 수 있는 생각들, 오히려 깊은 생각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의 생각들을 이렇게 한 번씩 다시 들으면 되게 부끄럽고 쑥스러울 수도 있는데, 대부분 ‘그때가 훨씬 낫다’ 싶어요. 혼자 되게 많은 생각을 했구나 싶어요. 지금은 훨씬 더 단출해졌어요. 생각이나 표현이 훨씬 심플해졌어요.
GQ 군더더기들을 덜어낸 걸 수도 있고요.
EC 네,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오히려 한마디 한마디, 단어 선택도 그렇고 되게 고심했어요. 골랐어요. 이 문장이나 이 단어가 지금 나의 상태를 표현하는 게 적합한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 많이 했어요. 지금은 오히려 단순해진 지점들이 있어요.

드레스, 푸시버튼. 이어링, 초커 네크리스, 링, 모두 샤넬 화인 주얼리. 슈즈, 페라가모.

GQ “본인의 언어로서 상대방에게 건네는 가장 큰 찬사”라는 표현도 12년 전 <지큐>에서 정은채 씨의 언어를 옮겨온 거예요.
EC 제가 그랬어요?
GQ 어쩌다 그 표현이 나왔냐면, 어느 감독은 사람들을 좋게 수식할 때 예쁘다, 귀엽다 한다고. 그게 본인의 언어로 상대방에게 건네는 가장 큰 찬사라고. 자신에게 그런 표현은···.
EC 응! 아! 맞아요, 기억나요. 그때의 제게 그런 찬사는 “귀엽다”고 했나요?
GQ 재밌다.
EC 재밌다, 아. 재밌는 걸 지금도 좋아하긴 하는데, 진짜 재미있네요. 프흐흐흐. 그런데 이제는 그 표현을 “자랑스럽다”고 한 얘기를 지금 돌이켜보니까···, 조금 더 간 것 같아요. 에너지가. 상대한테. 그런 것 같네요. 예전에는 내가 느끼는 즐거움, 재미,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되게 되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에너지가 좀 더 상대에게 간 느낌이에요.
GQ “네가 자랑스럽다”니까.
EC 그런 게 저한테 더 큰 기쁨같이 오는 나이가 된 거죠. 뭔가 주는, 진짜로 주는 기쁨. 그런 걸 이제 조금 더 알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GQ 정은채는 정은채가 자랑스럽나요?
EC 네.
GQ 이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EC 자랑스럽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게 자랑스러운 일 같아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존해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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