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강, <여수의 사랑>
2018(초판 1995), 문학과지성사
여는 말
노벨문학상이 왜 대단한가 논하기는 까마득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이 활자로 담아온 사유와 삶에 보내는 찬사라는 진실 앞에서는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아진다. 한강 작가와 한국문학을 향한 박수에 제 일처럼 기뻐하는 한국문학 편집자들에게 물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알려주세요. 처음은 작가 한강의 시작,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으로 열었다. 내 책, 내 작가, 내 이야기만큼 아끼는 네 책, 네 작가, 네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이 스웨덴에서 나직이 퍼진 한강 작가의 언어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와 너를 우리라고 하는구나.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실을 타고?” 여기 우리를 밝혀줄 열두 가지 빛과 실이 모였다.
황정은, <일기>
2021, 창비
문학과지성사 유하은 편집자의 추천의 말
고등학생 때 우연히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접한 뒤 틈마다 그의 책을 챙겨 읽었습니다. 곧 책장 한편에 그의 책들이 쌓였고, 그 더미를 보며 제가 그의 글을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이윽고 이런 글을 쓰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던 무렵 작가의 첫 산문집 <일기>가 나왔습니다. 지금껏 저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온도로 감각해왔습니다. 읽는 동안에는 서느렇고 찬 듯하면서도 책을 덮고 나면 가만히 끼쳐오던 온기. 사사롭고 내밀한 기록일지언정 산문 몇 꼭지를 읽었다고 해서 그의 모든 면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일기>를 통해 적어도 그 온기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는 알게 되었다고 느낍니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제목 아래 묶인 산문들을 편편이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 세상에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만연해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삶과 역사가, 삶과 정치가, 나아가 삶과 문학이 별개가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도 함께 발견했기 때문에, 저는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계를 믿고 싶습니다. 의심하되 희구하는 믿음을 안고 계속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따금씩 그 믿음을 지탱하기가 벅찰 때면, 비관의 말을 과감히 태움으로써 심장을 덥히고 사위를 밝히는 그의 불씨를 언제까지고 삶 안쪽으로 끌어오려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심지에도 그 빛과 열이 옮겨 붙기를 바랍니다. 황정은 작가의 글이 귀한 까닭에 대해 늘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잔뜩이지만, 그가 오랫동안 마지막 인사로 삼아왔다는 말을 빌려 매듭짓습니다. 작가의 마음이 그 한마디에 충분히 녹아 있을 테니까요. 다들, “건강하시기를”.
황석영, <해질 무렵>
2015, 문학동네
창비 이진혁 편집자의 추천의 말
“어쩌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됐을까.” 아빠의 장탄식에 아이가 질문을 던집니다. “호랑이 모양? 토끼 모양? 그런데 아빠, 호랑이 모양이라고 해야 한대.” 대화를 슬며시 엿듣다가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풋, 웃음이 터지고 맙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나라는 정말 어떤 모양이어야 하길래 사람들은 이 추위에 또다시 거리로 나온 걸까요. 어느 해 질 무렵, 이 거리에 <해질 무렵>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소설은 첫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는 60대 건축가와 20대 연극인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어집니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 각자의 올바름이 어떤 파열음을 내는지가 내내 흥미롭습니다. <해질 무렵>은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나서도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어떤 정답으로 이끌기보다는 누군가가 옆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기분이랄까요. 마치 ‘호랑이 모양?’ 같은 엉뚱함도 ‘그래, 그래’ 하고 품어주는 것처럼요. 그 묘한 위로 끝에 마음이 조금 넓어지기도 합니다. 이 독후감을 꼭 한 사람과 나눠야 한다면 역시 요즘 뉴스에서 시끌시끌한 그분이 먼저 떠오릅니다. 왠지 그분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지만요. 정말 어쩌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됐을까요. “해 질 무렵은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 지난 하루를 성찰하며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황석영 소설가는 제목의 이유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강화길, <풀업>
2023, 현대문학
문학동네 정은진 편집자의 추천의 말
당신은 지금 건강한가요? 저는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다. 새벽잠이 점점 없어지고, 일과 시간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진 빠지는 꿈을 종종 꾸네요. 이런 삶이 나만의 불행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따라붙는가! 그럴 때면 강화길의 소설을 찾아 읽게 됩니다. 나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내면을 곤두세우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강화길의 중편소설 <풀업>에는 두 자매와 엄마의 관계가 선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도 읽다 보면 세 모녀의 전 생애가 눈에 그려져 감탄이 나오더군요. 뭐 하나 동생보다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위축되곤 하지만, 그 점이 엄마로부터 방치되거나 동생에게 무시받을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장녀 지수. 언니가 앞가림을 못 하는 바람에 엄마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고 생각하는 차녀 미수. 지수를 얼마간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전담하며 미수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희생양으로 만들어 유지되던 이 가족 관계 또한 어느 가정에서나 발견되지 않던가요. 가족이라는 집단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갈등을 한 편의 소설로 날렵하게 집약해내는 강화길의 장기가 <풀업>에서 여지없이 발현됩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흡인력 있게 펼쳐내는 데다 강화길 소설 중 가장 유머러스하기까지 해서, 손에 쥐자 마자 한달음에 읽을 수 있어요. 아, 주인공 지수와 저의 상황이 같지 않다고 느낀 점이 하나 있네요. 저는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지수가 새벽같이 집을 뛰쳐나가 헬스장에 가서 점점 ‘운동하는 사람’이 되며 가족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읽으며 엔도르핀이 도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연말 연초를 맞아 저도 운동을 시작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번엔 그저 말뿐인 다짐이 되지 않을 거예요.
이승우, <목소리들>
2023, 문학과지성사
현대문학 윤희영 편집자의 추천의 말
책을 읽다 뒤 내용이 궁금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두 번의 기억이 있습니다. 모두가 유행처럼 읽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그중 하나고, 또 하나는 이승우 작가님의 <생의 이면>이었습니다. 너무나 결이 다른 두 권을 연달아 읽으며 문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작가마다 말하는 방식이 다르고 풀어가는 솜씨가 다르지만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몹시 편식하는 독자입니다. 한 작품이 맘에 들어오면 (반대로 말하면 쉽게 마음을 주지 않기도 합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렇게 이승우 작가님 작품에 대한 집요한 짝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편집자 생활을 하며 편집자와 독자로서의 자아가 묘하게 부딪히는 경험을 많이 했지만, 이승우 작가님은 늘 예외였습니다. 덕업일치라는 이야기는 이럴 때 쓰는 거겠지요. 추천 드리는 <목소리들>은 작가님의 가장 최근에 나온 소설집입니다. 등단 42년이 되었지만, 어쩜 이렇게 변함없이 쓰실 수 있는지, 그 한결같은 필력에 매번 감탄하게 됩니다. 제가 작가님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작가님만이 펼쳐 보이는 숨 막히는 문장들인데 이번 소설집도 여지없습니다. 문장이 길어지면 더러 그 안에서 길을 잃기도 하는데 작가님의 소설에서는 그런 문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작가의 사유가 단단하고 그 세계관이 확고하다는 방증이겠지요.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면 그건 이승우 작가님일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습니다. 비록 제 예감은 틀렸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가장 작업해보고 싶고, 독자들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이승우 작가님과 그의 작품이란건 변함없습니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
2015, 난다
문학과지성사 이주이 편집자의 추천의 말
흐르는 물 아래 고여 영영 흐르지 않는 우리의 동행자. 난다의 <걸 어본다> 시리즈 기획 의도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여행이 아닌 ‘산책’에 방점을 찍고 느긋한 마음으로 거니는 예술가의 산책길을 뒤따르며 우리의 ‘나’를 찾아보는 것, 그 과정에서 발 디딤의 아름다움을 ‘삶’이라 불러보기 위함이다.” 독일에서 오래 머물며 고고학을 공부하고 집필 활동을 해온 허수경 시인께 딱 맞아떨어지는 기획이지요. 뮌스터 공항에 입국하면서부터 걸어가는 기차역, 박물관, 성당, 시청, 거리와 강, 호수 등 발길 닿는 곳마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산책하듯 기록한 단상에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문인인 그가 영원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뮌스터 곳곳의 과거(역사)와 지금, 걸으면서 발견한 감상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놓고 시라는 형식 바깥에서 또 다른 시를 만들어냅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뮌스터 시내가 생생한 풍경과 함께 시인이 걸었던 날과 같은 공기, 온도, 색채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이 책을 맺으며 그는 뒤표지 날개글에 “이미 이 세계에 더 이상 살지 않는 시인들이 쓴” 시와 함께 산책하며 적은 글이라고 밝혔는데요. 이제 머나먼 별로 떠나 그들과 동행하고 있을 시인이 우리에게 남긴 숨결과 함께 걸어갈 차례입니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 한겨레출판
문학과지성사 이주이 편집자의 추천의 말
너를 이해하기 위해 너의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 사람의 안과 밖에는 언제나 슬픔이 머물러 있으므로 문학(예술)과 세상을 이해하려면 슬픔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결함이기에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이 “타인의 슬픔”(27쪽)이라고 말하는데요. 그 난관을 우리 손을 잡고 가볍게 넘도록 도와주는 책이 바로 그의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입니다. 슬픔·소설·사회·시·문화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를 각각의 부로 구성했고, 우리에게 익숙한 책과 영화·음악·사회 현상을 토대로 한 짤막한 단상들로 엮여 있습니다. 평론가의 어려운 글일 거라 예측하셨다면 오산입니다. 그의 온유하고도 단단한 문장과 그 문장으로 빈틈없이 설계된 건축물과 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금세 타인의 슬픔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줄 알게 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대학 시절 제게 많은 영향을 주신 은사님이기도 합니다. 졸업 후에도 선생님께 배운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고, 슬픔이 가득한 망망대해에서 부표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마다 이 책을 펼쳐보며 다시 나아갈 방향을 다잡기도 합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희망이 필요한 때에 우리는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28쪽) 언제나 희망이 있단 것을 믿어야 하고 앞으로도 ‘슬픈 공부’를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김숨, <듣기 시간>
2021, 문학실험실
한겨레출판 최해경 편집자의 추천의 말
문학의 쓸모를 생각해보는 이즈음입니다. 세계는 처참하고 인간은 미약하고 책은 소략한 것인가 움츠러드는 날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학 안에서 ‘의미 있게’ 회복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문학으로써 나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해보고자 노력하는 동안 겨자씨만큼이라도 달라질 수 있었다고요. 여기 “문학과 증언과 역사가 어떻게 만나야 하고 만날 수 있는지” 사투 중인 작가가 있습니다. <한 명>은 위안부 피해자 증언 소설을 본격적인 문학의 장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듣기 시간>은 현재 진행형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침묵과 고통에 대해 ‘증언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쓴 작품입니다. 작가 특유의 세밀한 문장은 녹취록에는 담길 수 없는 칼끝 같은 침묵과 고통까지도 소설의 자리로 부단히 옮겨냅니다. 어떤 고통을 듣는다는 것, 침묵까지도 듣는다는 것, ‘듣기 시간’이야말로 문학의 태도이고 방법임을, 세상의 혼곤함을 견딜 인간의 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한유주,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2021, 워크룸 프레스
문학실험실 최하연 편집자의 추천의 말
워크룸과 한유주의 조합, 무조건 찬성입니다. 한유주는 이승에 내리는 저승의 흔적을 문맥과 행간에 기입합니다. 고체도 액체도 아닌, 눈처럼. 삶과 죽음의 의미론적 경계는 텍스트 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론가, 아마 “살아있음”을 향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 설원의 호랑이들도 내리는 그 눈을 지켜보고 있다.”(80쪽)
배수아, <훌>
2021(초판 2006), 문학동네
워크룸 프레스 김뉘연 편집자의 추천의 말
그의 글은 회색입니다. 선명함을 닮은 선명하지 않은 색이거나, 선명하지 않음을 닮은 선명한 색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과 사건의 경계를 흐려가는 단편들은 구체적인 추상의 모습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이곳의 여러 부분이 분명하거나 분명하지 않으며,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모순”이 됩니다. 그러한 회색입니다.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 회색의 시간은 인물들에게 각자의 회색을 입힙니다. 그렇게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습니다. 실재적이면서 실재적이지 않은 상태가 ‘소설’임을, 회색빛 글이 그렇게 소설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상우, <핌·오렌지빛이랄지>
2023, 민음사
문학동네 이재현 편집자의 추천의말
<훌>의 풍경들을 기억합니다. 노동절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 매일의 노동처럼 무한히 방영되는 <보리스 고두노 프>, 기약 없이 늘어지는 약속과 방황. 탁한 해상도의 회색조 풍경이지만 어쩐지 그대로 한없이 늘리고만 싶은 장면들입니다. 소설이 제가 머무는 공간을 지우면서도, 스스로의 존재는 분명히 자각하게 하는 방식이지요. <핌·오 렌지빛이랄지>는 <훌>처럼, 그러나 다르게 제가 있는 좌표를 짚어내는 소설이에요. 이상우의 소설을 게임과 겹쳐 읽는 평들이 있었습니다. 3인칭 슈팅 게임의 시점처럼, 화자의 바라보는 시점과 화자가 바라 보이는 시점이 한데 중첩되는 형식이 고유해서요. 또한 조사, 어미, 온점 등의 문장 성분이 빠지면서 의미에 유격이 생기다 보니 읽는 이에 따라 여러 갈래 길이 뻗는 이 소설을 일종의 인터랙티브 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의 시점에서 이상우는 무엇보다도 근대문학이 떠맡았던 의무를 다시금 지고 있다고 느껴요. 이 소설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모종의 참여에는 그간 소설을 읽어온 방식, 즉 저 자신에 대한 의심도 포함됩니다. 소설 속 질문들을 생경하게, 그래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형식적 충격을 맞닥뜨리기 때문에요. 근대문학이 새로운 언어 제도로 내면과 풍경을 발견했듯이, 이 소설이 저를, 제 좌표를 새로 자각하게 할 때 보이는 풍경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지요. 모래는 쥘수록 더 흩어지는 것처럼,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설명하려 할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요. 포착되지 않는, 그리하여 빈손 위에서 영원히 일렁일 이 아름다움의 존재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지만요.
정영문, <프롤로그 에필로그>
2022, 문학동네
민음사 정기현 편집자의 추천의 말
아침에 눈을 떠 샤워하면서 듣는 라디오에서는 바로 어제 벌어졌다는 의아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출근길에 읽는 책에서는 어린 시절 친구에게 모종의 이유로 복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화자의 증오심이 들끓으며, 오전 근무 후 맞이한 점심시간에는 동료가 주말에 보았다는 축구 경기 하이라이트가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나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서사적 사건을 이야기라고 정의해볼 때 저는 매 순간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는 셈입니다. 모두 나 바깥의 일들이기는 하여도 저는 그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은 무척이나 가깝게 생각해 며칠이고 골몰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저와 전혀 무관하다 여기고는 곧 잊어버립니다. 한번 이야기들로부터 그 멀고 가까움을 지워버린 뒤 모두를 같은 층위에서 바라본다면, 많고도 많은 이야기가 나를 스쳐간다는 감각이 문득 새삼스럽습니다. 정영문의 소설 <프롤로그 에필로그>에서는 이 새삼스러움의 감각을 시종 유지한 채로 이야기들끼리도, 화자와도, 그것을 읽는 독자와도 큰 관련이 없을 이야기들이 주절주절 이어집니다. 그중 어떤 것들은 일상 속에서의 이야기가 때때로 그러하듯 강렬함을 선사하며 읽는 이와 즉각 관계를 맺는데요, 저의 경우에는 호박과 닭, 그리고 낚시가 나오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하루를 지나 보내는 기분으로 책장을 펼쳐본다면 갑자기 의외의 이야기가 관계 맺기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일, 왠지 무척이나 새해에 어울리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