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산맥을 가로지르다.
돌로미티 Dolomites에서 가장 높은 마르몰라다 Marmolada 빙하 정상으로 향하는 햇살 가득한 곤돌라 속에서 맞이하는 아침, 대대로 파사 Fassa 계곡에서 살아온 이탈리아 국가대표 스키 선수 출신인 수다쟁이 산악 가이드 마리카 파베 Marika Favé가 1차 대전 당시 이곳의 작은 도시를 얼음 속에 파묻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들의 냉혹한 결정에 대해 운을 뗐다. 하지만 곤돌라가 또 다른 바위 절벽을 지나고 짙은 하늘 아래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거대한 눈가루가 시야에 들어오자 전쟁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고, 아쉬운 표정을 짓던 마리카가 이내 미소 짓는다. 곧 곤돌라가 1만7백 피트 높이의 푼타 로카 Punta Rocca에서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돌로미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돌로미티에 방문한 어느 목요일 아침에는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이 산을 둘러싼 공기에 가득했다.
스노보드를 타고 매일 밤마다 새로운 숙소로 이동하는 7일간의 돌로미티 스키 사파리 여행의 네 번째 아침,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듯 산뜻한 현대식 호텔과 가족이 운영하는 산장풍 레푸지오(Rifugios, 산장 또는 간이 숙소)를 번갈아가면서 가방이 도착했고, 후자의 숙소일 경우 종종 현지식 주방에서 그들의 가족 또는 파트너와 함께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식사를 하곤 했다. 이 여행은 아르헨티나의 아구스티나 라고스 마르몰 Argentine Agustina Lagos Marmol이 설립한 혁신적이고 인상적인 회사 ‘돌로미티 마운틴스 Dolomite Mountains’에서 주관했고, 나는 이들을 통해 돌로미티에 푹 빠져버렸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알프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강암과 편마암보다 색과 형태가 약간 가벼운 돌로미티 암석으로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봉우리들이 선보이는 시각적 드라마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스키 리조트 중 하나인 돌로미티 슈퍼스키 Dolomiti Superski에서 약 7백50마일에 달하는 슬로프를 가로지르며 놀랍도록 널찍하게 즐길 수 있는 스키의 매력에도 새로이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페일산맥을 가로지르는 문화의 면면에 매료됐다. 동쪽으로는 2026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는 코르티나 담페초 Cortina d’Ampezzo의 화려함과 수많은 이탈리아 출신 영화배우들로부터, 서쪽으로는 마치 목조 작품인 듯 섬세하게 다듬어진 가드나 밸리 Gardena Valley나 독일어를 더 많이 쓰고 이탈리아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 느낌이 많이 나는 남티롤 South Tyrol 자치주까지, 이곳은 전통적인 이탈리아 음식이나 생활 방식이 게르만식 디자인을 만나는 곳이자 농업의 근원지라는 자부심과 지속 가능성을 향한 현대의 절실한 충동이 겹치는 지역이다.
실제로 돌로미티는 아름다운 계곡과 소중하게 보존된 고유한 하위문화를 연결하는 일련의 고갯길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산맥의 중심부에서는 3만여 명이 여전히 전통 언어인 라딘어 Ladin Language를 사용한다. 여기에는 살기 좋은 알타 바디아 Alta Badia 계곡과 발 디 파사 Val Di Fassa에 위치한 작은 캄피텔로 디 파사 Campitello Di Fassa(7백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이탈리아 지자체)가 있는데, 마리카의 가족은 이곳에서 대부분 생계형 농부로 오랫동안 살아왔다.(파베라는 그들의 성은 ‘파바빈 건조대 Fava Bean Drying Racks’를 뜻하는 라딘어에서 유래했다.) 98세까지 살았던 마리카의 할머니 카를로타 미켈루치 Carlotta Micheluzzi는 라디나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자랐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으로 이 마을을 포함한 지역이 이탈리아령으로 넘어간 후 그녀는 하루아침에 이탈리아 사람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이후 민족주의적 추진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이탈리아화하기 위해 남쪽에서 교사들을 파견했지만, 대부분의 남부 이탈리아인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던 미켈루치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은 산속의 군인들만큼이나 단호하게 저항했다. “무솔리니는 이 문화를 없애고 싶어 했지만, 그가 퍼뜨린 마초이즘조차도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마리카가 말한다.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항상 라디노가 먼저였고 그다음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어요.”
라딘어를 사용하지만 다른 4개 언어에도 능통한 마리카는 이 반항적인 국경 지역 혈통에 대해-나중에 산에서 만난, 스키 경기 출전을 준비 중이라던 마리카의 10대 딸도 마찬가지로-분명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한때 위협받았지만 지금은 진정성 있게 교육되고 있는 문화뿐만 아니라 이 산들이 형성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마리카의 아버지 렌조 파베는 지역 산악 구조대장이었으니, 마리카는 터보 충전식 스키 유전자를 갖고 있는 셈이었다.(“천천히 갈 거면 걸으면 되지 왜 스키를 타겠어요.” 마리카의 말이다). 교회가 끝나면 마리카는 집으로 달려가 TV로 스키 경기를 시청했고, 어머니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스웨덴의 전설적인 스키 레이서 잉에마르 스텐마르크 Ingemar Stenmark가 착용했던 스웨덴 색상의 스키 모자를 뜨개질하곤 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유럽 및 월드컵 레이스에서 스키를 타다 이제는 산악 가이드가 된 마리카는 까다로운 오지 설벽에서 내리막길을 찾는 것만큼이나 가파른 암벽과 이탈리아어로 ‘철의 길’이자 암벽 등반을 돕기 위해 설치한 철제 난간 ‘비아 페라타 Via Ferratas’를 오르는 데 능숙한 베테랑이다.
우리를 입양한 스키 어머니뻘인 마리카가 보내는,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는 총명한 눈빛을 받으며 사진가 잭과 나는 스노보드를 안전하게 착용하고는 지형과 음식, 삶,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이 고산 지대의 경이로움을 탐험했다. 어느 날 우리는 알타 바디아 Alta Badia에서 알페 디 시우시 Alpe Di Siusi까지 유명한 셀라론다 서킷 Sellaronda Circuit과 발 가르데냐 Val Gardena의 아치형 붉은 도로를 따라 크루즈를 타고 이동하며 섬세하게 칠한 외관이 인상적인 동화 속 마을 오르티세이 Ortisei에 들러 차로 90분이 걸리는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라바 Arabba, 시베타 Civetta, 산 펠레그리노 San Pellegrino에서 스노보드를 타고 눈 덮인 라가주오이 Lagazuoi 봉우리까지 이동하며 우리는 오래된 전쟁 당시 터널과 기관총 거치대에 몸을 웅크려보았다.
소박한 건초 헛간과 눈 덮인 신사 주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약간의 문화 충격을 선사한 드라마틱한 봉우리 친퀘 토리 Cinque Torri 암벽이 내려다보이는 코르티나 담페초에 도착했다. 정이 많고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친구들과 마치 아페리티보를 위해 코첼라에서 공수된 생명체들인 양 스키 수트를 훌렁 벗어버리고 카우보이 모자와 판초로 갈아입은 여성들이 갑작스럽게 우리를 둘러싼다.
호텔과 레푸지오도 다양하다. 알페 디 시우시에서는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외전 편으로 눈 덮인 유리 우주선이 착륙한 것 같은 코모 알피나 돌로미티 Como Alpina Dolomites를 향해 스노보드를 타고 돌진할 뻔했다. 실내와 실외가 연결된 수영장에서 혼자 아침을 보낸 후, 그날 저녁 우리는 깊은 계곡에 조용히 쌓이는 두꺼운 눈을 보며 바이타 도비치 Baita Dovich의 심플한 나무통만 있는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후 설상차를 타고 마치 꿈속 같은 레푸지오 푸시아데 Rifugio Fuciade에 도착했다. 나무 오두막, 작은 교회, 높은 고원에 있는 흥미로운 설치 예술 작품들까지, 이곳의 설치 작품들과 레푸지오는 모두 에마누엘라와 세르지오 로시 Emanuela & Sergio Rossi 부부의 평생을 건 작품이다. 미로 같은 본관을 따라 그들이 수집해온 아코디언과 나무로 만든 가면, 전통 버터 문양 찍기 도구 등 예술 작품과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으며, 미로라는 이름의 래브라도 한 녀석이 늘어져 있다. 아들 마르티노 Martino가 주방을 맡고 있으며, 주니퍼로 훈제한 사슴고기부터 야생 배와 무화과를 곁들인 라비올리의 일종 카존치에 파스타 Ciajoncie Pasta까지 다양한 메뉴와 가족이 직접 키운 돼지고기가 숙성되고 있는 지하실 근처 숙성고에서 5백여 종의 (대부분 현지산인) 와인 리스트를 함께 맛볼 수 있다.
이런 스타일의 구성은 이탈리아 기준으로 봐도 미식가들이 즐겨 찾을 법한 지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탄소 발자국 제로 킬로미터 원산지 증명, 생산한 농산물 보호, 낭비 최소화는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이 지역의 오랜 신념이다. 하지만 돌로미티는 이 모든 소박한 토착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한때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의 교회 학교였던 해발 7천 피트 고지의 인상적인 석조 호텔 포르도이 Hotel Pordoi에서 기후 변화의 느린 영향을 목격한 글로리아 피나저 Gloria Finazzer가 스파츠레와 시금치 리코타 파이 뒤에 숨은 공급망에 집중하고 식품 낭비를 없애는 데 집착적으로 노력하며 가족과 함께 운영 중인 ‘아이딘 Aidin’이라는 채식주의 레스토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The XX가 스테레오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 부분을 크게 조명하지는 않지만, 운영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의 공이다. 마치 거대한 가운뎃손가락처럼 생긴 대형 백운석 탓에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고풍스러운 오두막, 베르그호텔 파소 지아우 Berghotel Passo Giau의 미소가 아름다운 클라우디아 발레페로 Claudia Valleferro처럼 레푸지오들의 지배인은 상당수 여성이다. 코르티나의 새로 지은 호텔 드 렌 Hotel de Len-유리와 기하학적 재활용 목재 등 모든 자재는 풀리아 지역의 상징적인 리조트 보르고 에그나지아 Borgo Egnazia와 같은 업체에서 공수했다. 총지배인은 서른 즈음인 스위스 출신의 칼라 메드리 Carla Medri로, 딱딱한 정장 차림이 아닌 체크 셔츠 차림으로 팀에 캐주얼한 프로의식을 불어넣고 있다. 그녀는 점자와 청정 에너지에 관심이 많고, 또 올림픽과 그로 인한 호텔 붐에 대한 미묘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돌로미티에서 만난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마르몰라다 빙하에서 보낸 목요일이다. 며칠 동안 간헐적으로 내린 눈으로 작은 산장과 신전에 하얀 눈이 쌓인 덕분에 푸른 하늘은 깨끗하게 정화된 느낌이었다. 곤돌라 탑승을 기다리는 한껏 설렌 인파를 뚫고 도착한 정상의 파노라마 테라스에서, 수많은 셀카봉과 블랙 아이드 피스의 배경음악을 들으며 장엄한 파노라마를 감상하는 동안 돌로미티 전체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흰색 파노라마 모형처럼 우리 앞에 펼쳐졌는데, 마치 신이 연출한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겨울 내내 오늘 아침을 기다린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카와 함께한 사람은 우리뿐이고, 마리카는 계획이 다 있었다.
스노보드를 탄 채 왼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자 넓은 슬로프 위 개미만 한 사람들이 시야 뒤로 사라진다. 우리의 발아래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설탕 같은 순백의 눈밭이 햇살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났다. 곡선형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래에는 얼어붙은 페다이아 호수가 있다. 고즈넉한 정적 속에서 ‘My Humps’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온다.
온몸의 모든 감각이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우리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무중력 상태의 행복감에 휩싸이고, 미끄러지고, 조각하고, 소리치며, 미묘하게 다른 기쁨을 만들어내는 눈밭을 타고 달렸다. 6마일 이상을 떠내려가듯이 달려 작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마리카와 나, 잭, 우리 셋은 말없이 포옹을 나눴다.
엔도르핀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로 작은 다리를 건너 호숫가에 있는 레푸지오 카스틸리오니 마르몰라다 Rifugio Castiglioni Marmolada로 가서 레몬 라임 소다를 섞어 상쾌한 맥주 라들러 샹디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모든 게 다 끝나면 스노모빌과 밧줄을 든 산악인 아우렐리오 소라루프 Aurelio Soraruf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얼어붙은 라고 디 페다이아 Lago di Fedaia 호수를 가로질러 웨이크보드 스타일로 우리를 끌고 갈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바보 같은 미소로 셀피 영상을 찍으면서 순백의 설원을 가로질러 빙하를 따라 오지로 내려간 스키어들을 지나치다 보면 야유보다는 존경이 절로 샘솟는다. “벨라 비타 Bella Vita!” 한 남자가 외친다. 반대편에서 다시 곤돌라를 타려고 보드를 타고 내려갈 준비를 하자 마리카가 이 상황을 즐기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이런 나약한 녀석들 같으니.” 역시 마리카는 스키 어머니다. “자, 다시 스키 타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