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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표지만 보고 고른 예쁜 책 12

2025.01.25김은희

나는 이 책이 예뻐.

김연덕시인

<시린 아픔>, 소피 칼
2020년 무렵, 서울 서촌 보안책방에서 구입했다. 보안책방은 사전에 소비 계획 없이 방문하곤 하는 몇 안 되는 서점 중 한 곳으로, 북 큐레이션이 좋아 책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곤 한다. 외형상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책장의 색일 것이다. 책장마다 붉은 박이 묻어 있어서, 책 배가 보이도록 눕혀놓으면 성경 같은 인상을 준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외형적으로 아름다워 고른 책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인 소피 칼이 말할 수 없는 고통, ‘시린 아픔’ 그 자체에 집중한 이야기였다. 그는 일생일대의 사랑을 잃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데,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별의 순간을 계속 곱씹는 방식의 쓰기를 택한다. 하루하루 자신의 고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쓰는 몸이 되어 갔던 소피 칼. 예쁘고 세련되어 보이기만 했던 책장의 붉은 박은 이제 그의 몸을 흐르던 실존, 피의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시린 아픔>은 구성이 매우 독특하다. 이별 이전과 이별 이후의 상황을 그린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 데다가 2부의 내용은 왼쪽 면과 오른쪽 면이 각기 다른 호흡으로 진행된다. 왼쪽은 소피 칼 개인의 경험, 즉 이별의 순간을 100일 동안 기록한 형태, 오른쪽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가 언제였는지” 인터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 정말 다양한 고통과 아픔이 존재함을 짧은 시간 내 소화하면서 말을 잃는 경험을 했다.
망망대해의 고통들 앞에서, 그럼에도 살아서 지난 고통의 날들을 증언하는 이들 앞에서 겸허해졌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2부의 어떤 페이지든. 2부를 열어 읽으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무언가 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아마 환기의 감각일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지만, 때로내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유일한 형태로 고되게 느껴질 때, 이 감각을 느끼는 자가 나 혼자는 아니라는 점이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준다. 소피 칼 역시도 인터뷰 과정을 거치며 비슷한 치유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김재원포인트오브뷰 대표

<Collector’s Cabinet With Miniature Apothecary’s Shop>, Rijks Museum
시각적 자극을 받고 싶을 때마다 들르는 곳, 도쿄의 작은 서점 포스트 POST에서 약 5년 전에 구매했다. 책의 존재감이 강렬해서 여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꼭 들고 돌아오고 싶었다. 평소 이것저것 모으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Collector’s Cabinet’이라는 제목에서부터 강한 연결감을 느꼈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책장을 넘기면서 캐비닛 속 수집물들이 실제 크기에 가깝게 담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캐비닛은 18세기 네덜란드의 부유한 의사나 약사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수집이 물건을 모으는 행위를 넘어서 그 시대와 사람들의 삶, 그리고 감정을 담고 있다는 걸 느낀다. 캐비닛에 수집물을 정리하고 배열한 방식을 보며 그것은 단순한 정리 정돈이 아니라 소유자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작업이겠구나 싶었다. 평소 사소한 물건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나의 방식에도 영향을 줘서, 그러한 작업에서도 나름의 균형과 미학을 찾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특별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는 책은 아니지만,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배열과 미적 감각에서 늘 영감을 받는다. 책 속 55개의 비밀 서랍은 다양한 수집품과 정돈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어떤 서랍에는 작은 광물 조각들이 크기 순으로 정렬되어 있고, 다른 서랍에는 씨앗들이 색상별로 나뉘어 있다. 이런 섬세한 구성은 단순히 ‘예쁘다’는 느낌을 넘어 혼란스러운 순간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김인철고스트북스 대표

<긴 강아지의 나들이>, 김주영
서점을 운영하다 보면 좋아하는 책을 직접 유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권의 멋진 도서가 소비자에게 가닿을 수 있게 다리를 놓는 중간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가끔은 내가 최종 목적지인 소비자가 되기도 한다. 너무 자주 되는 ‘웃픈’ 상황이 빈번하지만. 이 책도 그런 예다. 주인공인 긴 강아지에 걸맞은 세로형 제본,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긴 강아지는 길어서 삶이 고될 때도 있으나 길어서 행복할 때도 있다. 누군가 자신을 그린 그림 속 기다란 모습이 의아할 때도 있지만, 대신 암벽 등반은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때문에 단점이라고 스스로 평가 절하하는 부분도 달리 여기면 장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나는 30대에 벌써 M자 탈모가 깊숙이 찾아왔지만 덕분에 헤어스타일을 걱정할 필요 없이 빡빡 밀기만 하면 된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모든 페이지! 긴 강아지가 떠나는 여정의 장면 장면을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만족이 많아질수록 내 지갑은 얇아져만 간다.

이정훈프레임빌더·루키바이크 대표

<The All-Road Bike Revolution>, Jan Heine
5년 전쯤 미국 거래처 물건을 온라인 주문하던 중 딱 눈에 들어왔다. 그냥 예뻤다. 우리 숍 테이블에 두기에 내용도 좋았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성능을 택하는 것이 편안함과 다재다능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 편안함이 곧 성능이다. 성능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8쪽에 적힌 이 문장은 스스로 가졌던 자전거에 대한 고정관념을 새로이 바라보게 해줬다. 직업적 철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20쪽. ‘Dream Bike’가 그려진 페이지다. 드림 바이크는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다. 나의 고객 대부분이 각자의 드림 바이크를 꿈꾸며 찾아온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떠올리게 해주는 단어라서 이 페이지를 보면 꽤 정신이 차려진다.

윤성중월간<산> 기자

<끈이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교보문고에서 여러 책을 구경하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책이나 볼까 하고선 검색대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했고, 목록 중 초록색으로 된 이 책이 눈에 확 띄었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아마도 내 직업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 초록색을 가까이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분량이 적음에도 양장본으로 만들었다. 휴가지에서 선배드에 누워 이 책을 높이 들고 읽고 있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아, 근사한데!’라고 생각했다.) 제목에도 매혹됐는데 ‘초록이론의 대가라고 불리는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의 끈이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들면서 굉장히 흥분했다. 집에 와서 책을 펼친 다음에야 표지에 나온 네모칸이 테니스 코트였다는 걸 알았다. 책 내용 중 가장 많은 부분이 테니스에 관해서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기대했던 물리학, 끈이론 관련 내용이 아니어서 실망한 시간은 단 10초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189쪽부터.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챕터 ‘살과 빛의 몸을 입은 페더러’다. 이 챕터는 그가 쓴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에도 실려 있어서 나는 이전에 읽은 상태였지만, <끈이론>에 또 등장하는 이 내용은 책의 절정이자 화려한 결말을 담당한다. 다시 읽어도 새롭다. 우리가 운동선수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주 자세히 각주로 설명되어 있는데, 지금 많은 사람이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긴 각주 전부를 소개하고 싶지만 아주 일부만 적어본다. “위대한 운동선수는 드문 절정 유형의 감각적 현현 같아서-‘내게 눈이 있어서 이 해돋이를 볼 수 있으니 어찌나 기쁜지!’ 따위-만지고 지각하고 공간을 이동하고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우리가 자각할 수 있도록 촉매 작용을 하는 듯하다. 물론 위대한 운동선수가 자신의 몸으로 하는 것은 나머지 우리가 꿈만 꿀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꿈은 중요하다. 많은 것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박은환여행사진가

<Yosigo: Holiday Memories>, Yosigo
2021년 여름 요시고 사진전에서 이 도록의 표지를 보자마자 책장에 꽂아두는 대신 잘 보이게 선반 위에 올려둬야겠다 싶었다. 당시 품절이라 3개월 동안 기다렸다가 손에 넣었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깨친 주관적 감각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 책에 담긴 사진들로 그 뜻을 조금은 알게 됐다.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이어도 빛이 닿으면 보다 특별해진다. 그 빛의 매력에 빠져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안제민PD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네글자가 눈길이 갔다. 그리고 작가의 얼굴이 찍힌 책등. 여명 808처럼 만든 이의 얼굴이 새겨진 점이 나에겐 품질에 대한 자신감처럼 느껴졌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다자이 오사무는 네 번의 자살 시도 실패 후 다섯 번째 시도 끝에 39세 나이로 사망했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자신을 혐오하는 자, 인간 실격! SNS 에 들어가면 남들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진다.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내 인생. 자기 인생을 혐오하기가 편리해진 시대다. 소설의 주인공 요조도 그랬다. 유복한 집안, 멀끔한 외모, 유머 감각까지. 남들이 보기엔 부러움을 사고도 남을 삶인데도 자기 혐오로 결국 파국적인 인생을 살았다. 책은 이야기한다, 모두가 박수 쳐도 내가 나를 혐오한다면 그건 실격한 인생이야, 그리고 나는 느꼈다. 그래,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응원하면 그것으로 합격한 인생이지! 그러니까 앞으로 난 나를 끝까지 믿어줄 거야. 응원해줄 거야. 절대 비난하지 않을 거야. 그것만으로 내 인생은 합격! ···이라고 생각했다가 인스타그램을 보며 다시 내 인생을 폄하하기 시작하는 무한굴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13쪽.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남들도 그렇다고. 조금은 비겁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문장 같다.

김은희<지큐> 피처 에디터

<123人の家>, ACTUS
일본에서 1960년대부터 유럽 가구를 수입해온 회사 악투스, 자칭 “일본에서 가장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회사”의 직원 123명의 집을 담았다. 2012년 초판은 빠르게 품절됐고 2014년 재판본을 샀다.

책으로 배운 객곽적 사실 2012년 기준 일본인 123명 중 71명은 맨션과 아파트에 거주, 이 중 7명은 취재 기간 중 단독주택으로 이사, 하여 45명은 단독주택에 사는 양상이었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화이트 톤 간결한 주방이 세련된 어느 집 수납장 저 아래에는 풍채가 대단한 담금주 두 통이 자리해 있고, 책등이 칼날처럼 정렬된 어느 집 책장 맨 아래 칸에는 미처 다듬지 못한 책머리가 삐죽빼죽하다. 귀엽다. 치약 짜는 방법마저 저마다 다른 살림살이지만 살아내는 온기란 다 똑같구나.

곽재식화학자·소설가

<검찰측의 증인>, 애거서 크리스티
20년 전쯤에 샀다. 어릴 때부터 종종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여러 권 꽂아놓고 문득 휙 뽑아 읽을 수 있는 삶이라면 참 근사하겠다 생각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가지런한 시리즈가 눈에 띄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책 몇 권쯤 살 여유는 있다 싶어 과감하게 구매했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해문출판사에서 낸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의 <검찰측의 증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집으로 미국판에 실린 11편 중 9편을 실었다. 1990년대 이전에 한국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접한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해문에서 낸 붉은 표지의 시리즈를 읽었을 것이다. 영화 포스터 같은 표지들은 그 시절 추리 소설 독자들의 머릿속에 깊게 남아 있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호기심, 우아한 말투와 단어로 책 읽는 흥취를 돋우는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화자.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41쪽. “정말 감쪽 같은 희극이었소!”

백세희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Il Principe>, 니콜로 마키아벨리
2019년 겨울 한창 독서에 꽂혀 습관처럼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리다가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이라는 문구에 사로잡혔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군주론>은 1532년에 출간됐지만 1559년에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했다. 종교개혁가들 역시 이 책을 “악마의 책”이라 칭했다 한다. “필요할 때 군주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야 한다”는 노골적인 마키아벨리의 의견이 21세기에는 더 이상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된 옛날 책들은 출판 시 작가나 상속인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인세를 지급할 필요가 없다. 업으로 저작권을 다루고 있기에 원래 잘 알던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초판본 디자인의 고전을 덕분에 저렴하게 구입하면 새롭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189쪽. “군주에게 가장 훌륭한 요새는 백성이다.”

김태형조향사

<롤랑 바르트의 사진>, 낸시 쇼크로스
2023년 무용가, 소리 전문가 등 여러 예술가가 함께한 전시에서 나는 늘 그랬듯 향을 빚었다. 이 프로젝트는 책으로 출간되며 결실을 맺었고, 그 기념으로 그해 7월 제주의 한 서점에 초대 받았다. 책방 소리소문 小里小文. 한옥 지붕을 얹은 단층 건물 내부로 진입하면 목구조의 질감과 색감에서 따스함이 전해졌다. 나는 서점을 첫 방문할 때면 행하는 관행이 있다. 그곳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구매하고, 그 책으로 서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날 내 손에 잡힌 책이 이것이다. 기호학과 신화론 관점에서 사진을 찍는 것과 향을 만드는 것은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역설적으로 이 책을 통해 사진과 향은 궤를 달리한다 느꼈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죽음의 예술”에 빗대었다면, 나는 향을 “삶의 예술”이라 부르겠다. 향은 영원하지 않다. 알코올과 혼합된 채 향수병 안에 담긴 프레그런스 오일은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나 매우 지속적으로 산화되어 간다. 마치 인간의 삶을 닮았다. 1921년 가브리엘 샤넬은 에르네스트 보가 조향한 샤넬 No.5를 출시했다. 잠옷 대신 향수 한 방울을 걸치는 마릴린 먼로부터 최초로 여성 향수의 뮤즈가 된 브래드 피트까지, 샤넬 No.5는 여러 신화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 사이 규제나 원료 변동 등 여러 요인이 향수의 처방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결국 우리가 시향하는 No.5의 향기는 마릴린 먼로가 사랑했던 그것이 아니다. 온전히 보관된 1921년의 No.5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속의 향 물질들은 100여 년의 시간 동안 산화되어 변했을 것이다. 이것으로 향수가 내포한 아름다움이 부정당하는 것일까? 오히려 반대다. 향기의 가치는 비영속성에 기인한다. 이 또한 인간의 삶을 닮았다.

이지현영화감독·평론가

<사랑을 생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 <S/Z>, 롤랑 바르트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신 때는 20년 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였다. 나의 어학원 동기가 미라보 거리에 있는 노천카페를 소개하며, 그곳이 배우 존 말코비치와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소라고 말했다. 몇 년 후 한국에서 쥐스킨트의 책을 찾아서 읽었다. 당시의 구매 목록에 <사랑을 생각하다>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롤랑 바르트의 <S/Z>도 샀다. 둘 다 표지가 프랑스적이라고 느꼈다.

책으로 배운 객관적 사실 사랑을 찬양하는 시는 많다. 그렇지만 화장실에 가는 행위를 쓰는 예술은 없다. 어떠한 예술도 소화나 배변을 다루지 않는다고 쥐스킨트는 적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배설에 대한 숭배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여성의 육체나 남근에 대한 숭배는 있었다. <S/Z>는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바르트는 <S/Z>에서 발자크의 단편소설 <사라진>을 분석한다. 소설 주인공은 다름 아닌 거세된 카스트라토다. “장애물은 내 마음속의 사랑을 더욱 타오르게 합니다”라고 발자크는 썼고, 이 문장을 바르트는 “정열의 역학”이라고 해석했다.

책으로 깨친 주관적 감각 발자크를 좋아하게 된 후에 그가 커피 애호가란 사실을 알게 됐다. 발자크는 커피를 “히포크레네(예술적 영감의 원천)”라고 부르며 집필 동안 매일 17잔에서 25잔, 밤에 글을 쓸 때는 17분마다 한 잔씩 마셨다고 한다. 커피에는 영감을 도약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자크가 그 증거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펼쳐보면 기분이 나아지는 페이지 <S/Z>21쪽. “이쪽에는 슬픔에 잠긴 차갑고 음울한 자연이, 저쪽에는 즐거움에 빠진 인간들이 있었다.” 발자크가 보는 파리의 모습이다. 대조적인 이미지의 한 쌍은 소설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영화적으로 보인다. 우리 일상의 매 순간도 어쩌면 양가적인 것이 아닐까.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삶은 쓰지만 달콤하다. 예술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