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딜락 리릭 LYRIQ을 탐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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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목적지 설정은 늘 운전자의 몫이다. 그래서 차 안에 흐르는 플레이리스트와 가는 길에 들르면 좋을 식당, 최근에 문을 열었다는 카페처럼 드라이브의 여정 대부분도 결국 운전자(혹은 동승자) 취향의 연속이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차가 나라면 어디로 가고 싶을지 궁금했다. 엉뚱한 상상이기도 했고, 이 밤에 드라이브를 떠날 그럴듯한 구실이기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어디든 떠나려면 리릭의 취향을 먼저 알아야 했다. 그러면 리릭과 어울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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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릭의 첫인상은 세련된 남자를 닮았다. 넓은 전폭과 긴 전장은 남자의 묵직한 체구를 상상하게 만들고, 곧고 날카롭게 뻗는 실루엣은 기본이 단단한 수트처럼 담백한 멋이 있다. 프런트 그릴과 엠블럼, 간결한 헤드라이트는 요란하지 않고 은은하여 누군가의 액세서리처럼 자꾸만 쳐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리릭의 인테리어는 또 어떻고. 운전석에 앉자 공간감이 쾌적하게 열린다. 앞 유리에서 시작해 대형 파노라마 선루프를 지나 2열 나파 시트로 이어지는 실내를 살펴보면 럭셔리 가전과 오디오, 감각적인 가구가 조화로운 스위트룸이 겹쳐 떠오른다. 무엇보다 스티어링 휠 너머로 시원하게 배치된 33인치 커브드 어드밴스드 LED 디스플레이는 화면이 꼭 홈 시어터의 스크린만큼 선명해 반갑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9K 해상도를 자랑하니까. 덕분에 디스플레이는 인테리어의 키 룩이자 풍부한 정보 전달의 창으로, 나아가 시스템 조작의 메인 보드로서 역할을 다채롭게 수행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또 있다. 운전석에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면 보이는 네모난 센터 콘솔이다. 건축의 캔틸레버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데, 캐딜락은 작다면 작은 이 센터 콘솔에도 미학을 심어놨다. 대개 어떤 대상을 향해 감탄 혹은 감동이 솟는 순간은 이런 예상 밖의 섬세함을 발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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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내 멋대로 감각하고 판단한 리릭의 취향을 도슨트 삼아 떠나볼까. 목적지는 서울대학교 미술관이 좋겠다. 그곳의 조형도 캔틸레버 구조를 갖고 있으니, 리릭의 취향을 고려한 목적지가 아닌가 하는 뻔뻔한 생각도 제법 설득력이 있다. 가는 길에 들을 플레이리스트는 리릭의 실내 공간에 어울릴 법한 걸로 골라보자. 그러니까 고요하고 풍부한데 근사하기까지 한 음악으로. 고민 끝에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최근 앨범 <X’s>를 틀었다.
안 그래도 낮고 깊은 그의 목소리가 19개의 스피커에서 동시에 흘러나오자 순간 실내는 진공처럼 그대로 고요해졌다.(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는‘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이라는 기능 덕분이었다. 도로의 진동을 측정해 작은 소음도 잡아내는 리릭의 기특한 방음 성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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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있는 언주로에서 서울대학교 미술관까지는 40분 남짓. 강남대로를 달리다 올림픽대로로 진입해 20여 분 더 가면 흑석동이 나온다. 거기서 관악로까진 금방이다. 그러고 보니 운이 좋게도 쭉 뻗은 도심과 쾌적한 고속화도로, 그리고 구불구불한 시냇길을 모두 경험할 수 있겠다. 늦은 밤이니 시원하게 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소년 같은 흥분은 예상과 달리 금방 식었다. 그래, 강남대로에는 늘 차가 많았다. 눈앞으로 빨간색 브레이크 등이 촘촘했다. 내가 경험한 몇몇의 전기차는 이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상황에서 승차감이 기이하고 어색했는데 리릭은 굉장히 좋아서 놀랐다. 출발과 정지를 반복해도 들썩이지 않고 낮고 묵직해서 어느 순간에는 점잖게까지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대형 세단의 안락함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올림픽대로 반포 구간을 지나자 다행히 제법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듀얼 모터다운 역동적이고 즉각적인 속도는 예상대로 훌륭했고, 이따금 깊고 길게 이어지는 코너 구간에서는 이전의 묵직하던 승차감이 안정적인 느낌으로 모습을 바꾸며, 마치 뽐내듯이 부드러운 회전 감각을 선보였다. 이후 흑석동에서 관악로로 이어지는 길은 구도심. 여기서부터는 신호등만큼 과속방지턱도 많았고, 요즘의 내 기분처럼 천천히 오르다 급히 떨어지는 고갯길도 잦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릭은 이 요란한 길들을 힘들이지 않고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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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렁대는 커다란 엔진을 가진 차를 타는 에디터에게 리릭의 가뿐한 주행은 종종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점잖지만 즉각적이고, 부드럽지만 적극적인, 나아가 예민하지만 까다롭지 않은 리릭의 주행 성능은 다른 표본들과 분명 구분되는 새 감각이었다.
예상했듯이 서울대학교 미술관은 잠들어 있었다. 입체적인 캔틸레버의 조형미는 어둠 속에서 더 압도적으로 솟아 있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가만히 올려다볼 땐 어느 순간 하늘의 심연이 흐릿해지면서 다른 세상의 구조물을 만난 것처럼 신비롭게 보이기도 했다. 어떤 취향의 경험은 영감이 되기도 한다. 리릭 곳곳에 미학을 심어둔 디자이너의 취향과 경험, 그리고 영감의 순간들을 짐작해보며 미술관은 밖에도 있고, 밤에도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 리릭과 어울리는 목적지 하나를 찾았다.
CADILLAC LYRIQ SPEC
배터리 리튬 이온 NCMA 102 kWh
모터 듀얼 모터
최대 주행 거리 465km
최고출력 500hp
최대토크 62.2kg·m
최고속력 210km/h
전장 4,995mm
전폭 1,980mm
전고 1,640mm
휠베이스 3,095mm
트렁크 용량 793L
탑승 인원 5인
가격 1억 6백96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