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가 중간에 끊을 필요 없이, 빠르게 감기도 할 필요 없이 빠르게 한 편 모두 볼 수 있는 짧은 단편 영화들.
[아임 히어], 29min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으로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미가 탁월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불안정하고 결핍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2013년 개봉 당시에는 공상 과학이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시대 예보에 가까웠던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을 그린 영화 <그녀>는 아카데미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각본상을 받았다. <그녀> 이전에도 공상 과학 러브 스토리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약 30분 분량의 로봇의 지고지순함을 강렬하고 극적으로 표현한 단편 영화 <아임 히어>로 2010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영화는 미국 유명 아동 작가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동화 <아낌 없이 주는 나무>를 모티브로 삼았는데, 감독은 주인공 로봇의 이름을 원작 작가의 이름을 따서 ‘쉘든’이라고 지으며 오마주 했다. 소년에게 밑동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내어준 나무처럼, 자신을 다 내어주는 슬픈 눈의 로봇 쉘든의 감동적이고 애잔한 사랑이 뇌리에 남는다. 앤드류 가필드가 쉘든의 네모난 금속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어딘가 결핍되었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출연한 이 영화는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39min

웨스 앤더슨 감독이 영국 유명 소설가 로알드 달(Roald Dahl)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009년 <판타스틱 Mr. 폭스>를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영상화한 적도 있지 않은가. 다시 한번 로알드 달의 이야기 4편을 넷플릭스와 함께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놀랍진 않았는데 결과는 꽤 흥미로웠다. 하나의 작품집에 함께 실려 있는 단편 이야기의 표제이자 메인 스토리로 알려진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영화상을 받으며, 웨스 앤더슨 감독에게 첫 오스카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의 이야기> 외 <백조>, <독>, <쥐잡이 사내> 4편의 단편은 옴니버스이면서 독립적인 형태다. 웨스 앤더슨 특유의 강렬한 색감의 무대장치를 배경으로 영화지만 연극 무대를 보는 듯, 영화지만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오묘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형식의 영화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무엇을 상상하듯 그 이상일 테지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짧은 러닝타임이라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장대한 내레이션과 대사가 속사포처럼 이어지니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고 싶지 않다면, 절대 집중력을 잃지 말 것!
[리얼리티+], 23min

2024년 뜨거운 논란과 화제를 모은 논스톱 블러디 스릴러 <서브스턴스>. 젊음과 아름다움을 향한 잔혹한 욕망을 그려내며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분장상을 수상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보디 호러 장르라는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호평과 장기 흥행 열풍을 이어간 이 영화의 모태가 된 단편 작품이 있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전작으로 자신의 외형을 꿈꾸던 대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리얼리티+’라는 칩을 뇌에 삽입해 외모적 만족감을 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리얼리티+>로, 트라이베카영화제, 팜 스프링즈 국제단편영화제, 클리블랜드 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 초청작이다. 현실을 벗어나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세계관이 <서브스턴스>와 일맥상통하며, <서브스턴스>의 인기로 올해 초 극장에서 깜짝 상영하기도 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감독이 10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아직 보기 전이라면 순한 맛부터 서서히 경험할 수 있을 것.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그와 동시에 희미해져가는 인간의 본질과 감정의 가치에 대하여 곱씹게 되는 이 작품은 왓챠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프레임 속의 기억들], 6min | [지리멸렬], 31min | [싱크 앤 라이즈], 7min

진부한 말이지만 봉준호는 떡잎부터 달랐다. 장편 영화감독이 되기 전 촬영한 단편 영화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왓챠에서 그의 몇몇 단편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그중 단편 대표작으로 꼽히는 <지리멸렬>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봉 감독 특유의 우리 사회를 보는 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나 있다. ‘바퀴벌레’, ‘골목 밖으로’, ‘고통의 밤’ 등 세 편의 서로 다른 이야기와 이를 연결한 에필로그가 30분 러닝타임을 따라 차례로 이어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골목은 <기생충>의 단독주택 골목을, TV가 중요한 소품으로 쓰이는 에필로그는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아카데미 20주년으로 제작된 6분짜리 단편작 <싱크 앤 라이즈>는 한강에서 일어날 괴변을 예고하며 <괴물>의 출발점이 된 작품으로 알려졌고, <프레임 속의 기억들>은 잃어버린 개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적인 감독으로 만들어준 작품들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하는 그의 단편작들에서 청년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의 주제 의식과 색깔을 엿볼 수 있다. 보고 나면 “아, 봉준호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