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GQ 요즘 무슨 음악 들어요?
JH 보통은 팝송을 즐겨 듣는데, 요즘은 다음 시즌 준비하면서 장르를 열어두고 두루 듣고 있어요. 뉴에이지 스타일, 클래식, 뮤지컬, 영화 OST 등등 가리지 않아요. 특히 영화나 뮤지컬 OST 들을 땐 가사와 스토리를 많이 찾아보고, 클래식 음악은 탄생 배경을 찾아보면서 들어요.
GQ 스토리를 알면 음악이 다르게 들려요?
JH 음악 너머의 이야기를 알면 이입이 더 많이 돼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몇 년 동안 우울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다 작곡한 곡이라고 해요. 그 곡이 히트하면서 라흐마니노프가 자신감을 회복했고요. 그런 작곡가의 이야기나 곡이 탄생한 배경을 알고 나면 음악에 더 푹 빠져서 듣고, 공감할 수 있게 돼요. ‘미치광이를 위한 발라드’는 사실 처음엔 프랑스어라서 무슨 내용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가사를 찾아보고 메시지가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선택했어요. 제가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데, 상상력을 발휘해 곡에 제 나름대로 스토리를 덧붙이기도 해요.

GQ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 동작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JH 확실히요.
GQ 음악을 고를 때만큼은 주장을 강하게 한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선택한 곡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어떤 키워드가 있어요?
JH 메시지가 가장 중요해요. 제가 담고 싶은 메시지를 지닌 곡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리고 이전 시즌과 다른 모습 보여주는 것을 선호해서 장르적인 도전도 많이 해왔고, 곡마다 담겨 있는 주제와 메시지도 모두 달랐어요. 그래서 관통하는 공통 키워드라고 한다면, 오히려 없는 것 같아요.
GQ 요즘 듣는 음악을 통해 차준환의 다음 시즌을 짐작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힌트라도 준다면요?
JH 음···. 이탈리아 올림픽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할 수도 있고, 여태까지 다채로운 장르를 도전해봤으니 그 안에서 제가 정말 잘할 수 있는 필살기를 쓸 수도 있고···, 아직은 열려 있어요.

GQ 처음 피겨 스케이트를 탔을 때 굉장한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죠. 지금 그날의 감정을 더듬어보면 어때요?
JH 아역 배우를 하고 있었는데, 원래 저는 낯도 많이 가리고 쑥스러움도 많은 성격이에요. 그런데 피겨 스케이트는 혼자 무대에 서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스포츠잖아요. 그 경험이 확실히 연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빙판 위에 처음 선 그 순간, 그런 자유로움은 처음 느낀 것 같아요.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해방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GQ 지금도 그런 자유로움을 느껴요?
JH 물론 스포츠이기 때문에 분석을 하게 되고 그때만큼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새로운 즐거움을 얻었어요. 피겨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작 작업이기도 한데, 창작 또한 자유의 일부인 것 같아요. 저는 안무가 선생님이랑 창작할 때가 가장 즐거워요. 어떤 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동작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 안에서 저를 쏟아내기도 하고요. 오늘 같은 화보 촬영 과정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이렇게 해볼까? 이거 괜찮은데? 이거 좋은데? 하면서 저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고, 제 저변을 넓히기도 하고, 거기서 제가 발전하기도 하고요.


GQ 오늘 새롭게 발견한 즐거움을 들려줄래요?
JH 그동안은 스튜디오 촬영이 많았는데 로케이션 오니까 엄청 재밌었어요. 솔직히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촬영이 예정보다 두 시간 더 진행되었다.) 자그만 정원에서 그네도 타고, 자전거도 타고, 해보지 않은 콘셉트가 제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 같았어요. 그게 향수일 수도 있고, 동심일 수도 있고···. 제가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그런 즐거움을 많이 못 누렸거든요. 그리고 제가 경기할 때도 옷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인데, 오늘 착용한 주얼리와 패션이 아주 예술적인 시도로 느껴졌어요. 색다른 무드, 포즈, 연출. 이렇게 예술적인 가치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시간이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에요.
GQ 오늘 촬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컷은 뭐예요?
JH 마당에서 ‘피-스’.

GQ 전에 한 영상 인터뷰에서 “못 먹는 음식”에 대한 질문을 받고, “못 먹는 걸 먹게 만들어가는 걸 좋아한다”는 답변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JH 맞아요. 저는 못 먹는데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다면, 내가 아직 모르는 맛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나는 못 먹는데 저 사람들은 이 음식을 어떤 맛이라고 느끼면서 먹는 걸까? 그들이 느끼는 맛있다는 기분을 같이 공감해보고 싶고, 저도 느껴보고 싶거든요.
GQ 음식 외적으로도 그런 태도가 적용돼요?
JH 그런 것 같아요. 안 해본 운동, 안 해본 동작을 할 때도 그렇고요. 받아들이는 과정은 못 먹는 음식을 스스로 먹게 만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떤 즐거움이든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거든요.
GQ 시야를 넓히는 데 피겨 스케이팅이 많은 도움이 되던가요?
JH 많이요. 시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하는 스포츠이다 보니, 제 스스로 저변을 크게 확장시켜 온 것 같아요.

GQ 영화도 자주 본다면서요? 어떤 부분을 유심히 봐요?
JH 영화 속 순간에 몰입하려고 해요. 그 인물의 상황, 시간, 영화의 메시지 등등.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보고 있는 거니까요. 아, 그리고 음악도 신중하게 들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스텝 시퀀스나 창작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자주 상상하고요.
GQ 그 전 인터뷰에서도 “순간에 몰입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더라고요.
JH 저에게는 몰입하는 게 긴장감을 떨치는 방법이에요. 순간에 몰입하고 집중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후회도 남지 않더라고요.


GQ 스위치를 탁 전환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요?
JH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추상적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단계를 세분화해요. 첫 번째 단계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계획한 다음 수행하고, 두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 단계별로 시행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명확해지고, 하나씩 하나씩 해냄으로써 더 자신감도 갖게 돼요.
GQ 떨림을 동력으로 쓴다는 말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는 것 같네요.
JH 떨림과 긴장감은 선수에게 되게 좋은 신호라고 생각해요. 과하면 독이 되지만 적당한 떨림, 긴장감은 저를 방심하지 않게 만들어주거든요. 더 예민하게, 완벽을 기할 수 있도록요.

GQ 완벽에 집착하는 편이에요?
JH 완전히 집착하는데, 스케이트를 타면서는 많이 내려놨어요.
GQ 신기하네요. 더 집착하는 게 될 것 같은데.
JH 완벽에 집착하면 제가 삼켜질 것 같더라고요. 그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는 게 선수로서 더 롱런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았어요. 스포츠이다 보니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고, 실수가 나오는 것도 당연해요. 그래서 한순간, 한순간, 순간에 성실히 몰입하려고 해요. 완벽에 집착하면 전체를 보게 되는데, 그 잘게 쪼갠 한순간만 보면 조금 덜 집착하게 되거든요. ‘집착을 나누었다’라고 해야 할까요?
GQ 완벽에의 집착을 내려놓은 뒤 더 도약한 느낌이 들던가요?
JH 적어도 후회는 안 남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내려놓는 게 진짜 어려워요.

GQ 차준환의 시그니처인 이나바우어 자세를 할 때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라고 표현했어요. 뭘까요? 시간이 멈추는 느낌이란 건.
JH 음악과 딱 맞아떨어져서 동작이 음악과 하나가 되는 완벽한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이 되면 시간이 되게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정말로 시간이 멈추는 것 같기도 해요.
GQ 방금 문득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언젠가 치유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죠. 그 생각은 여전해요?
JH 여전해요. 제가 많은 분으로부터 응원을 받고 거기서 힘을 얻는 만큼, 많은 분에게 제 경기가 치유가 되었으면, 그런 선수가 되었으면 해요. 요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창작을 통해 제가 전할 수 있는 이야기, 메시지, 감정을 더 많이 나누고 교감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많은 스포츠 중에서도 피겨 스케이팅이 그럴 여지가 충분한 스포츠인 것 같거든요.

GQ 아까 영상 인터뷰에서 ‘사랑이 무엇일까’에 대해 여러 번 질문을 받았잖아요. 어째서 계속 망설였어요?
JH 사랑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기 때문에요. 사랑은 무엇이다, 정의 내리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게 느껴져요. 사랑이라는 건 되게 이면적이고,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GQ 그렇죠. 어쩌면 지금 이 말이 답이 될 수 있었겠어요.
JH 그러게요. 왜 아까는 이 생각을 못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