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한 적도 있다. 오늘의 쿠퍼 코흐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괴물: 메넨데즈 형제 이야기>를 발판 삼아 다음 챕터를 펼치는 중이다.

1989년 8월 18일, 호세 메넨데즈 José Menendez와 키티 메넨데즈 Kitty Menendez는 자신들의 베벌리힐스의 집 서재에서 영화를 보다 두 아들 라일과 에릭이 쏜 산탄총에 살해됐다. 처음 두 형제는 무장강도가 습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사 끝에 형제는 체포되어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나라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수사관들은 기자회견에서 형제가 상속받으리라 알려진 재산 가치를 언급하며 “1천4백만 달러(한화 약 2백억원) 정도는 살인을 저지를 충분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수사관들은 자료를 덮었다. “때로는 그 너머를 더 들여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는 부자였고 형제는 돈을 원했다. 엇나간 베벌리힐스 키즈들이 돈 욕심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사건 종결.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형제는 수년간 부모, 특히 아버지 호세 메넨데즈에게 당한 충격적인 수준의 정서적, 신체적, 성적 학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검찰은 이것이 조작된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언론도 형제를 믿지 않았다. <피플>은 커버 스토리로 이 사건을 다루며 형제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고, <베니티 페어>의 유명한 범죄 전문 기자 도미니크 던 Dominick Dunne도 두 사람을 “월드 클래스 거짓말쟁이, 이미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버린 돈 많고, 제멋대로이고, 오만한 루저”라고 평했다.
결국 배심원단은 던의 편에 섰다. 1996년, 두 형제는 1급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현재까지 그들은 계속 감옥에 있다. 2024년 9월, 넷플릭스는 <괴물: 메넨데즈 형제 이야기 Monsters: The Lyle and Erik Menendez Story>를 공개했다. 라이언 머피와 이안 브레넌이 라일과 에릭 메넨데즈 형제 이야기를 9부작으로 담은 이 시리즈는 하비에르 바르뎀과 클로에 세비니가 부모 역을, 니콜라스 알렉산더 차베스 Nicholas Alexander Chavez가 형 라일 역을, 그리고 쿠퍼 코흐 Cooper Koch가 동생 에릭 역을 맡았다.
처음 몇 개의 에피소드는 사건의 개요,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인 사건, 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진 미디어 폭풍을 전반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다섯 번째 에피소드 ‘상처 입은 남자 The Hurt Man’ 편은 다르다. 이 에피소드는 에릭이 아버지 손에 당했던 끔찍한 학대를 그의 맞은편에 앉은 변호사 레슬리 에이브람슨(아리 그레이너 Ari Graynor가 연기했다)에게 면밀히 설명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는 형제의 심정과 입장에 프레임을 집중시키는 특별한 에피소드이기도 했지만, 배우로서 쿠퍼 코흐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쿠퍼 코흐는 33분 동안 이어지는 원테이크 연기로 전체 신을 장악했다.

“제 인생 최고의 연기 경험이었어요.” 드라마가 공개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우리가 만났을 때 코흐는 당시를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고 떠올렸다. “우리는 여러 테이크를 거치며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아리와 저는 그 에피소드를 찍기 전에 굉장히 특별한 유대감을 쌓았고, 우리 둘 다 각자가 깊이 사랑에 빠진 캐릭터를 탐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코흐는 이 시리즈가 주목받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건 넷플릭스와 라이언 머피의 작품이었으니까. 비록 그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으니(“제 정신 건강에 별로 좋지가 않아서요”) 온라인에서의 반응으로부터는 좀 벗어나 있긴 하지만, 스물여덟 살의 배우 쿠퍼 코흐의 연기는 당시 에미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슬슬 불을 지피고 있었기에 드라마 공개 후 삶은 휘몰아치듯 달라졌다. “넷플릭스 효과는 전 세계적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라이언이 이건 히트할 거고, 모두 이제 엄청 유명해질 거라고 한 말이 기억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반은 알아들었지만 반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저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배웠어요.”
코흐는 로스앤젤레스 우드랜드 힐스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제가 두 명 더 있는데 음악가인 형 워커 Walker와 영화 편집자로 일하는 쌍둥이 페이튼 Payton이고, 형 워커는 훌루 Hulu 오리지널 시리즈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 Only Murders In The Building>로 2024년 에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코흐의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에서 유명한 경마 클럽의 설립자였고, 어머니는 다양한 피트니스 책을 낸 개인 트레이너였다. 할아버지와 증조부 또한 저명한 프로듀서이자 감독이었기 때문에 코흐의 피 속에는 이미 할리우드가 흐르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공연에서 토니 역할을 맡아 연기를 접하며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정말 생생했어요.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구나 싶었죠.”
뉴욕 페이스 대학교 Pace University New York의 샌즈 공연 예술대 Sands College를 졸업한 코흐는 여러 단편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연기 경력을 쌓아나갔다. 보디 호러 영화 <스왈로우드 Swallowed>에서의 열연, 그리고 블럼하우스가 제작한 슬래셔 영화 <데이/뎀 They/Them>에서 게이 전환 치료 캠프에 보내진 운동선수 역할을 하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물론 수많은 실망스러운 경험도 거쳤다. 스물두 살 무렵, 브렛 이스턴 엘리스 Bret Easton Ellis의 소설을 TV 드라마로 각색한 <레스 댄 제로 Less Than Zero>에서 처음으로 시리즈 고정 배역을 맡았을 때 이야기다. “그들도 제게 똑같은 얘길 했어요.” <괴물:메넨데즈 형제 이야기>(이하 <괴물>) 이후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고 라이언 머피가 한 말을 언급하며 코흐가 말한다. “그런 말을 하더군요. ‘아마 당신은 노부 Nobu 레스토랑에 예약하지 않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유명해질 거예요! 역대 최고의 쇼가 될 겁니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고 코흐는 해고당했다. “작품은 방송도 되지 못했어요.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좀 더 개인적인 좌절도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고 오랫동안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코흐는 토크쇼 <와치 왓 해픈스 라이브 위드 앤디 코헨 Whatch What Happens Live With Andy Cohen>에서 연기 코치가 코흐의 목소리를 두고 “너무 게이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알고 보니 그런 평을 들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해고당한 거였어요.” 코흐가 되짚는다. “저를 앞에 두고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스튜디오 책임자가 제 목소리가 너무 게이 같다고 했대요. 한동안 그 말이 저를 괴롭혔어요.”
그 경험은 코흐에게 최악의 순간이었다. 그는 연기를 완전히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최근 들어 이 고민은 좀 더 심도 있는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영화 <위키드>의 피에로 역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저는 노래를 부르고 뮤지컬을 하면서 자랐지만 테너가 아닌 바리톤이에요. 그래서 보컬 코치와 함께 정말 힘들게 연습했고, 무척 간절히 원했어요.” 결과는 어땠을까. “하지만 오디션 테이프를 찍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난 절대 이 배역을 맡을 수 없을 거야. 난 너무 형편없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 걸까? 그냥 그만둬야 할까?’ 이런 생각들뿐이었어요.”
이 역할은 결국 배우 조나단 베일리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코흐는 깨달았다. 자신이 맡을 역할이나 배역을 따낼지 여부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 즉, 자신의 행복이 단지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코흐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동력이 됐다. 여러 우연이 겹쳐 결국 그가 <괴물>에 이르도록 도움이 된 것이다.
작품이 공개된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코흐는 메넨데즈 사건과 오래된 개인적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메넨데즈 형제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인 7년 전에 실화의 주인공인 에릭에게 편지를 쓴 적도 있을 정도로 두 형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왔다. 그 말을 들은 토크쇼 진행자 앤디 코헨은 놀라운 우연에 기가 막혀했다. “말도 안 되는군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담해질게요.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걸 지금 여기서 공개하려고 해요. 그거 아세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메넨데즈 형제가, 에릭 메넨데즈가 오랫동안 저와 함께한 이유는 제가 7년 전 <로 앤 오더 The Law & Order> 시리즈와 한 영화 오디션을 봤기 때문이에요. 에릭을 연기하기 위해서요.”
영화 <로 앤 오더 트루 크라임 Law & Order True Crime>과 2017년 작품 <피의 형제: 메넨데즈 부모 살인 사건 Menendez: Blood Brothers> 이야기다. 두 오디션 모두 최종 라운드까지 갔지만 배역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코흐가 다시 말을 잇는다. “하지만 이 역할만큼은 정말 꼭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다만 코흐는 <괴물>이 다른 작품들과 비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전에 두 번이나 에릭 역을 시도했던 것에 대해서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온 LA가 이 사건으로 떠들썩할 즈음에 그 역시 LA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번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쉬웠다고 말한다. 사실 <로 앤 오더> 오디션을 보기 전까지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디션에 합격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당시 재판 영상을 봤어요. 보자마자 그들의 말을 믿게 됐죠. 마음이 동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모든 유사점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그 사건과 그들의 이야기에 굉장히 집착하게 됐어요.”
이것이 바로 그가 이 역할에 그토록 열정이 넘쳤던 이유, 사건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이유, 형제의 석방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던 이유다. <괴물>은 코흐의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메넨데즈 형제 인생 스토리의 다음 장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2024년 10월 3일, LA 카운티 지방 검사 조지 가스콘 George Gascón은 형제의 형량에 대한 항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3주 후, 그는 살인 사건 몇 달 전 에릭이 사촌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해 학대 정황이 담긴 새로운 증거들을 인용하며 법원에 사건 재심을 요청했다. 심리 후 형제는 가석방으로 풀려날 가능성도 있다. 이 작품 방송 직후 감옥에 찾아가 형제를 면회한 코흐는 “불공정을 바로잡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엄청난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매우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제가 이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저 기쁠 뿐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배우의 성공을 되짚어볼 때면 그 전략이 쉽게 읽히는 경우도 있다. 초기 배역이 이후 더 큰 배역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어가고, 계획은 점차 제자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코흐의 여정은 기복도 심하고 희망과 실망이 교차하는 동시에 실패가 기회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만약 코흐가 <로 앤 오더> 오디션에 합격했다면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스스로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겠죠.” 이 배우가 말한다. “7년에 걸쳐서 녹화하고 또 녹화하고, 오디션을 보고 또 봤어요. 그러다 마침내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할리우드 성공 스토리인지도 모른다.
<괴물>의 성공적인 여파로 방향 감각을 약간 상실한 상태이긴 하나, 그렇다고 코흐는 다음 역할을 서두르지는 않으려 한다. 그는 몇 가지 길을 고려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계획도 갖고 있다. “저는 지금 굉장히 신중하고자 해요.”
그러던 중 2024년 연말, 작가 한야 야나기하라 Hanya Yanagihara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한 장의 사진을 포스팅했고, 팬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마약, 성폭행, 우울증에 시달리는 뉴욕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 2015년 작 소설 <작은 인생 A Little Life>을 들고 있는 코흐의 사진이었다. 코흐는 이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 책의 각색이 실현되기를 “끌어당기는 중 Manifesting”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게 정말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제 오랜 꿈이었단 사실이에요.” 코흐가 활짝 웃는다. “그리고 작가님은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희망사항일 수도 있다. 야나기하라 작가가 그린 가슴 아픈 캐릭터를 드디어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일 수도 있지만, 분명 여기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쿠퍼 코흐에게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