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홀드를 잡으며 찾아 나가는 이상헌이라는 루트.
“배우이기에 앞서 제 삶, 이상헌이 더 중요해요. 배우는 직업일 뿐, 마음대로 안 되더라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으니 행복하게 살자고요.”

GQ 늘 본인을 ‘한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라고 영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표현하더라고요.
SH 그렇게 소개할 때가 많아요. 사실이기도 하고 제가 어떻게 지금의 제 모습이 됐는지 다 함축된 말이거든요.
GQ 그래서 교포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죠.
SH 사실 저는 군대까지 갔다 온 군필 한국 남성입니다. 교포보다는 재외국민이 맞는 말 같고, 지금은 한국에 살고 있어요.
GQ 공군 전역했더라고요.
SH 저희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 다 공군이셨어서 저도 그냥 공군 입대했어요.
GQ 해외 인터뷰에서 군대 경험을 소설 <파리대왕>으로 묘사한 걸 봤어요. 군대를 그렇게 표현한 한국 남자는 단연코 처음 봅니다.
SH <파리대왕> 속 상황이 너무 군대랑 똑같은 거예요. 아직 성장이 덜 된 아이들이 외딴 섬에서 살아남는 이야기거든요. 군대도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도 많이 안 해본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재밌으면서 좀 혼란스러운 세상인 건가 싶어요. 스스로도 좋은 묘사라고 생각했어요.
GQ 사전에 상헌 씨의 동영상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헤드폰이 고장 나 음성 없이 봤거든요. 오늘 만나뵙고 예상치 못한 중저음 목소리에 이미지가 달라 보였어요.
SH 그래요? 한국어 할 때 톤이 높아져 중저음인지 모르겠어요. 2개 국어 하면 하나는 톤이 높고 하나는 낮대요.
GQ 가끔 한국어 할 때의 자신과 영어 할 때의 자신이 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SH 확실히 한국어 할 때 좀 더 차분해요. 존대하는 어휘나 톤을 지켜야 할 때가 있어 신중해지거든요.
GQ 고심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한국어 할 때 머리 위에 <매트릭스>처럼 기호가 떠다니는 거 알아요?
SH 하하. 왜냐하면 한국어를 그나마 많이 사용한 게 중학교 1학년 때까지거든요. 군대에서도 또래랑 지냈고.

GQ 어릴 때 쓰던 한국어로 남아 있다는 뜻이죠?
SH 영어처럼 캐주얼하게 말하면 예의 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되게 조심하는 편이에요.
GQ 노래를 해도 멋진 목소리일 것 같은데.
SH 저 노래는 진짜 아니에요. 못하니까 노래방도 안 가요.
GQ 다른 사람의 목소리 중 탐나는 목소리가 있다면요?
SH 제가 가지지 못한 하이톤? 고음을 잘 부르시는 분들이 부러워요. 예를 들면 장범준 씨? 그럼 노래방 갈 텐데.
GQ 클라이밍은 보디 프로필 찍은 뒤, 몸 유지를 할 운동을 찾다 시작하게 됐다고요?
SH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라 즐겁게 취미를 유지하고 있어요. 헬스, 농구, 축구, 수영, 배드민턴, 테니스 다 해봤는데 이것만큼 스릴 있고 살 빠지고 재미있는 운동은 없는 것 같아요. 많이 하다 보니 지금은 중독됐고요.
GQ 클라이밍의 어떤 매력에 끌린 거예요?
SH 우선 잡생각이 없어져요. 마음이 차분해지고 휴대 전화도 안 보게 되고. 한번 할 때 5~6시간 동안 하니까요. 그 잠깐의 여유가 너무 좋아요.
GQ 5~6시간이면 탈 일반인급 아니에요?
SH 오래 하다 보니까 지구력이 좀 생겼어요. 요즘은 손의 피부가 약해져서 4시간 정도만 하고 있지만.
GQ 클라이밍 SNS 계정까지 따로 있길래 예상은 했지만, 오늘 볼더링 하는 거 보고 제대로 잘 찾아왔다 싶었죠.
SH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다이어트가 따로 필요 없어요. 운동만 해도 많이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클라이밍 하면 알아서 살을 빼게 돼요. 잘하려면 가벼워야 해서요.
GQ 클라이밍을 대여섯 시간 하기 때문에 살이 안 찌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하하. 여전히 볼더링 해요?
SH 리드 클라이밍도 해요. 야외 암장에서 클립 달고 줄 타고 올라가는 종목인데, 이걸 제대로 하기 위해 호주도 다녀왔어요. 야외 볼더링 하러 북한산이나 불암산이나 원정을 다니기도 하고요.

GQ 내년에도 이맘쯤 <지큐 스포츠>가 나오거든요? 리드 클라이밍 화보 준비해서 산에서 기다리면 될까요?
SH 제가 올게요.(웃음)
GQ 등산도 종종 가요?
SH 잘 안 하는데, 야외 볼더링을 갈 땐 산을 올라야 찾을 수 있는 장소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등산을 하죠.
GQ 한국만의 K-등산 문화도 즐기고 있나요? 이를테면 산 아래의 백숙 맛집, 두부 맛집 같은 국룰 코스요.
SH 그쵸. 평소엔 실내든 야외든 볼더링 끝나고 고기를 많이 먹긴 해요. 운동한 만큼 단백질을 채워야 하니까.
GQ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음식을 좋아하는 ‘Foodie’라 밝혀온 사람 답네요.
SH 한 끼 한 끼가 소중해서 아껴서 맛있는 걸 먹고 싶어요. 제가 얼마나 먹는 걸 좋아하냐면요. 여행 갈 때도 관광지를 안 보고, 약간 그 나라의 유명한 음식들을 다 먹고 오는 편이에요. 저는 ‘그냥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자’ 식은 안 돼요. 꼭 리뷰, 평점, 사진 싹 체크해서 결정해요.
GQ 최근엔 어딜 다녀왔어요?
SH 그리스 다녀왔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예상치 못하게 너무 맛있었던 건 그릭 샐러드. 현지에서 먹으니까 엄청 프레시해서 진짜 다르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저도 많이 먹는 편인데 그리스 사람들이 진짜 많이 먹어서 놀랐어요. 디시 하나하나가 엄청 양이 많은데 그만큼 맛있었더라고요. 여행 가면 보통 어디 가서 뭘 봤다, 이 사람이 좋았다고 하는데 제게 여행은 그냥 뭐가 맛있었다예요.(웃음)
GQ 군대가 <파리대왕>인 남자에게 미식이란 뭘까요.
SH 영원한 동반자라고 해야 하나. ‘그냥 꼭 있어야 되는’. 그 표현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그렇게 창의적이지 못하네요. 너무 배고파서.

GQ <엑스오, 키티> 시즌 3를 앞두고 있죠. 한국말에 이런 표현 있는 거 알아요? ‘할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SH 그런 뜻인가요? 제 드라마 속 민호와 키티의 상황을 비유해, ‘사귈 거면 사귀고 사귀지 않을 거면 사귀지 마’?
GQ 맞아요. 둘을 둘러싼 스토리가 꽤 복잡하니까요.
SH 항상 어떤 드라마나 영화든 질질 끌긴 하잖아요.(웃음) 근데 전 사실 제 캐릭터인 민호랑 키티랑 잘됐으면 하는 마음은 없어요.
GQ 하이틴 로맨스의 남주로서는 흥미로운 답변인데요?
SH 제 바람은 이거죠. 키티는 키티대로 민호는 민호대로 알아서 누가 됐든 좋은 관계를 했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그렇지 않잖아요. 사랑이 그렇게 쉬운 거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사람과 연결되겠죠.
GQ 팬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해석이 있어요. <엑스오, 키티>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의 스핀오프이다 보니, 라라진이 그랬듯 키티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는 사람과 이어지는 게 이 세계관의 법칙이라고요.
SH 키티를 코비라고 부르는 사람은 민호뿐이긴 하니, 일리 있는 이론이긴 하네요. 하지만 저도 진짜 몰라요.(웃음)
GQ 사랑 앞에서 민호와 이상헌은 닮았나요? 민호의 행동 중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걸 하나만 꼽자면?
SH 시즌 1 마지막에 민호가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가 키티와 헤어지고 나서 키티한테 고백을 했거든요. 저는 완전 그건 안 돼요. 제일 친한 친구의 여친은 건드리면 안 되죠. 그런 친구라면 친구를 잘못 사귀는 거잖아요.
GQ 실제로는 연애할 때 어떤 타입이에요?
SH 옛날에는 좀 되게 그냥 직설적이었던 것 같아요. 좋으면 ‘난 너 좋아’라고 얘기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지금은 뭔가 조심스러워진 느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제가 좋아하는 취미들이 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워낙 혼자가 편하다 보니 딱히 연애도 안 하는 것 같아요. 지금 너무 좋아요.
GQ 직진남의 말을 듣고 보니 한국어의 ‘좋아하는 것 같아’ 라는 표현이 좀 애매하게 들려요. 좋으면 좋은 거지 ‘같다’라니. 영어로 ‘I might like you’ 하지 않잖아요.
SH 방금 생각났는데 시즌 1 마지막에 팬들이 엄청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번역하면 ‘키티, 나 지금 너한테 사랑에 조금 빠진 것 같아. 조금인지 많이인지 모르겠어” 이런 대사인데, 한국어로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정도 느낌? 대사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엄청 부끄러우면 직설적으로 얘기 못 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GQ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이상헌은 쓸 일 없는 대사겠군요.
SH 어렸을 때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느낌 같아요. 제 나이에 고백은 가볍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어느 정도 책임감 있게 연애를 하고 싶어서 좀 쉽게 말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GQ 재작년엔 <그란 투스리모>로 두 번째 필모를 완성했는데, 올랜도 블룸 같은 엄청난 배우들과 촬영했죠?
SH 사실 그때 대사가 없었어요. <엑스오, 키티> 방영 전이라 아무도 저를 몰랐어요. 첫 영화인데 전설적인 배우분들이 있는 현장이니, 저분은 이렇게 워밍업을 하고 목을 푸는구나 하고 지켜보며 많은 걸 배웠어요.
GQ 뭔가 특별한 워밍업을 하나요?
SH 올랜도 블룸 씨는 카메라 롤링하기 전에,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며 에너지를 막 끌어올리시더라고요. ‘렛츠고’ ‘컴온 컴온’ 그런 식으로. 영화 현장에서 저랑 비슷한 배역의 친구들과 친해져서 촬영 끝난 뒤에 다들 자기네들 나라로 돌아갔는데, 나라별로 다 놀러 갔어요. 배운 것도 많은데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많이 얻었어요.
GQ 예전에 가이 리치, 크리스토퍼 놀란, 웨스 앤더슨을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뽑았더라고요.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좋아하는 한국 감독이 있나요?
SH 하정우 감독님. 저는 하정우 배우님이 너무 멋있고 잘하신다고 생각해요. 배우를 오랫동안 하신 감독님과 작업하면 얼마나 다르고 재밌을지 기대돼요. 제가 은근히 사극도 좋아하는데요. 특히 <광해>는 제 사극 톱3 안에 드는 작품이에요. 배우로서 사극을 할 준비는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스태프들을 고생시킬 것 같아 그냥 좋아만 하겠습니다.(웃음)
GQ 이상헌만의 행복 루틴 있어요?
SH 제 완벽한 하루는 이래요. 늦잠을 자고 일어나 맛있는 밥을 먹고 운동하러 가고, 또 맛있는 밥 먹고 친구들고 수다 떨고 집에 가는 거. 그 루틴이 매일 계속될 수 있다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GQ 늦잠 자고 먹고 놀고 먹고. 한량 아니에요 한량?
SH 그게 모든 사람이 원하는 행복 루틴이 아닐까요? 그런 루틴을 제가 지금 하고 있긴 해요. 주 3회 클라이밍 하는 날은 하루 종일 쉬고. 그러지 않을 때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영화나 공부, 전시를 보면서 자기관리를 하고요. 카페나 사람 많은 공간에 가서 사람 관찰도 많이 해요.
GQ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SH 엄청요.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정, 행동, 생각이 다 연기가 될 거라고 믿어요. 직업적으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제 인생을 먼저 잘 살아야겠다는 기준으로 루틴을 짜고 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GQ 이 인터뷰의 결론은 갓생 사는 이상헌일까요.
SH 물론 제 루틴을 똑같이 한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정말 바른 생활을 하시는 분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자기만의 행복한 루틴을 찾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