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시절.

GQ 정관 스님의 <정관스님 나의 음식>, 강민구 셰프의 <장> 모두 해외에서 먼저 출판된 뒤 한국에 당도했어요. 두 분은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셰프는 “밍글스 개업 후 한식에 대한 지식 한 켠이 비어있는 느낌을 지을 수 없을 때 스님을 만났다”고, 책에 썼더군요.
MG 2015년에 베누의 코리 리, 엘불리의 알베르트 아드리아, 무오키의 박무현 셰프와 백양사 천진암에 내려가 처음 스님을 뵈었어요. 아직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스님의 사찰 음식은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했죠. 백양사는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굉장히 신비로워요. KTX에서 내린 다음 차를 타고 1시간 동안 더 들어가야 하는데, 산 중턱에 있는 백양사로 닿는 계단을 오르면서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어요.
GQ “백양사 천진암 계단을 오르던 때, 장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고요.
MG 맞아요. 작고 소박한 공양간에 쪼그리고 앉아 스님이 담가놓은 장, 장아찌, 청을 맛보는데,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비건이라 하면 컨셉추얼하다는 인상이 더 강했거든요. 그런데 같은 장이라도 숙성 기간에 따라 그윽하거나 깊고, 복잡하거나 부드럽고, 비건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 처음 알게 되었어요. 결국 누가 어떤 공간에서 사찰 음식을 하는가가 차이를 만든다는 것도요.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GQ 작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시상식 뒤풀이에 있을 때, 강민구 셰프에게 스님이 축하 전화를 하셨던 게 기억나요. 스님은 강민구 셰프의 첫인상 기억하세요?
JK 인상은 아주 세련되고 날카롭잖아요.(웃음) 그런데 굉장히 자유로운 스타일이에요. 처음 만날 때부터 친근감이 들었고, 마음이 놓였어요. 편안했어요. 또 음식 하는 걸 보니 제법이야. “이렇게 하자” 하면 스스럼 없이 “네” 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참 열려 있고, 의기투합이 되는 거지.
GQ 밍글스에 처음 간 날 기억나세요?
JK 그럼요. 셰프, 레스토랑이라는 말도 모를 때인데 일단 당차게 들어갔죠. 거기서 본 식기, 기물, 인테리어, 모든 것이 아주 세련되고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음식을 보니 더 재밌어. 식재료는 다 아는 건데 이건 이렇게 썰었겠네, 이렇게 조리했겠네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채소의 맛을 드러내면서도 음식 모양, 담는 그릇을 다르게 해 새롭게 만드니, 담음새를 멋스럽게 변화시키면 사찰 음식도 세계적으로 메리트가 있겠다 싶었어요.
GQ <장>의 ‘호박선’ 레시피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 호박선은 밍글스에 방문하시는 정관 스님을 위해 만들었던 요리를 조금 손본 것이다.”
JK 밍글스에 처음 방문하고 한 1년쯤 지나서 다시 갔을 때 호박선이 나왔어요. 호박선은 사찰에도 있는 음식이고, 호박을 쪄서 양념을 얹어 요리하는 한여름 가정 특별식이죠. 그런데 밍글스에서 호박선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만듦새가 아주 정교해서 즐겁고 좋은 거예요. 알던 음식도 지혜를 모으면 이렇게 멋진 음식으로 탄생하는구나, 그 호박선을 먹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어요.

GQ 셰프는 스님이 오실 때마다 긴장되셨겠습니다.
MG 처음 오셨을 때는 저희가 배운 것을 복습하는 느낌으로 음식을 내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너희가 원래 하던 거 해라.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그때부터 스님이 평소 안 드셔보셨던 음식을 내어 드렸더니 저희도 더 재밌더라고요. 스님이 저희 비건 코스의 뮤즈예요.
JK 프렌치 런더리의 토마스 켈러 셰프님도 제가 간다고 했더니 메뉴를 완전히 새로 짜겠대요. 그러니까 부담 주는 것 같아서 못 가겠더라고. 알랭 파사르 셰프도 12가지 새 비건 메뉴를 내줬고요.
GQ 천하의 토마스 켈러, 알랭 파사르를 긴장시키고,현 대한민국 유일 미쉐린 3스타 강민구 셰프가 1스타부터 3스타까지 가는 과정도 지켜보셨고요.
JK 다 지켜봤지. 얼마나 어깨가 으쓱하다고요. 무에서 유를 창조해서 새로운 세계로 가려면 열정, 성의, 지혜, 시간, 에너지를 응집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좋죠. 항상 있던 자리에 있으면 밉지. 나 자신도 그 자리에 도태되어 있다 생각하면 미워요.
GQ <정관스님 나의 음식>에서 ‘레시피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요. 담긴 레시피는 아주 간결하고.
JK 레시피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시절 인연의 이치에 따르기 때문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식재료가 나는 과정이 다 달라요. 어떤 건 3개월, 어떤 건 6개월, 재료마다 생의 주기가 다르니 자라는 과정을 잘 지켜보면서 조리법을 달리해요. 매일 달라지는 땅의 재료를 하나의 레시피로 고집해두면 더 이상의 창조성은 없어요.
GQ 강민구 셰프가 스님 곁에서 발견한, 레시피보다 더 중요한 건 무얼까요?
MG 저는 스님한테 한창 요리 배울 당시의 레시피를 지금도 다 보관하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엔 고정된 분량이 없어요. 간도 잘 안 보시는데 신기한 건, 분량 없이 해도 결과물이 너무나 맛있다는 거예요. 상업 공간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재료 특성에 맞춰서 만들어내는 음식의 매력을 담으세요. 한마디로 그날, 그 시간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느낌이죠. 많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굉장히 맛있고,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되죠. 아주 건강하죠.
GQ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 같아요? 책에는 “정관 스님은 요리를 한다기보다는 그저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썼죠.
MG 스님은 언제 어떤 장을 써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고 계셨어요.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요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이해가 뒷받침되어 있었고요. 스님이 직접 담근 장, 청이 음식에 들어가니 맛이 깊고 풍부해요. 뭔가를 많이 넣으면 그 맛이 튀게 마련인데, 이미 풍부한 맛을 바탕으로 하니 재료의 맛을 죽이지 않고 재료의 매력이 더 살아나요. 거기서 차이가 생기는 것 같아요.

GQ 파인 다이닝 셰프로서 이런 철학을 어떻게 주방으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도 있겠네요.
MG 파인 다이닝에서는 편차나 변수를 줄여야 하니 철저히 계산하고 계획하지만, 정해둔 대로만 하다 보면 자칫 조립된 음식처럼 나올 때가 있어요. 그것이 제가 제일 경계하는 부분이에요. 정해진 틀 안에서도 손님에게 전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의 감성, 온기가 느껴지는 어떤 포인트는 항상 남겨놓아야 해요. 직원들에게도 항상 당부하는 부분이죠. 감성이나 온기로 채워 전달하는 어떤 한 끗 차이가 없다면 비싼 재료로 프랜차이즈 음식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레시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지점을 이해하려면 결국은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GQ 정관 스님과 함께한 시간과 경험이 셰프에게는 어떤 시간으로 기억돼요?
MG 제가 막 요리 시작할 때는 노르딕, 뉴 스페니시가 유행하고 로컬 음식, 제철 재료, 지속 가능성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었어요. 채식, 비건이 막 태동하던 때였고요. 그런데 사찰에 가보니까 우리가 몰랐을 뿐 세계에서 열광하고 좋아하는 것이 이미 우리나라에 다 존재하고 있더라고요. 재료를 고르고 대하는 마음, 자투리까지 모아서 육수에 쓸 만큼 낭비하지 않는 조리법, 화려하지 않더라도 제철 재료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었어요. 채소만을 활용해야 하는 게 제약이 아니라 채소를 더 맛있고 창의적으로 먹을 수 있도록 고민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고요.
JK 저도 강 셰프를 통해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셰프가 얼마만큼 열려 있고 음식에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하는지 요리가 나오자마자, 맛보기 전에 이미 50퍼센트는 알아채거든요. 거기서 배제되는 요리를 보면서 행여 나도 그러지 않았을까 반성하기도 하죠. 준비와 요리에 열과 성의를 다하고, 음식 먹는 사람과 같이 소통해야겠다고 저도 계속 배워요. 강 셰프의 요리를 보면 실제 성격처럼 수줍음 가운데 성의, 열정이 보여요. 그래서 밍글스에 다녀오면 항상 마음이 좋아요. 단 한 가지 음식이라도 열과 성의를 다한 음식을 먹으면 제 안의 에너지가 꽉 차거든요.
MG 얼른 와주세요. 여름 채소 좋을 때 와주세요.
GQ 스님을 레스토랑으로 모시는 게 셰프 자신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 일종의 테스트로 느껴지네요.
MG 그렇죠. 미쉐린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당분간은 지금을 잘 유지하고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큰 변화를 꾀하기보다는 하고 있는 것을 더 다듬고 잘 해나가야 할 시기인데 스님 오시면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니까요, 설레죠.
JK 곧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