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길러오나요, 해갈의 기운을.

김연덕ㅣ시인
영감이 메말랐을 때 찾는 곳 덕수궁 석조전 앞 계단을 찾는다. 궁궐의 다른 부분들은 굳이 보지 않고, 오로지 이 계단에 앉아 건너편의 분수를 바라보기 위해 입장권을 살 정도로 여기서 볼 수 있는 장면을 사랑한다.
거니는 시간대 주로 한낮과 해 질 무렵에 간다. 한낮에는 몸체가 하늘색으로 칠해진 분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해 질 무렵에는 점차 어두워지는 광경 속에서 여러 빛깔로 빛나는 분수를 볼 수 있다. 사이키델릭한 노랑, 분홍, 초록, 파랑, 하양, 보라색 조명. 그늘이 많아 한여름에도 들어와 보기에 좋다.
반드시 즐기는 행위 분수의 투명하고 가느다란 물줄기만 집요하게 쳐다본다. 음악 없이 물줄기 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보면 복잡하게 흐르거나 날뛰거나 소리치던 상념들이 멎고, 내 몸도 정신도 한 점으로 모아지곤 했다. 분수 바닥에 무슨 주문이라도 걸어둔 것인지, 이 물줄기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강하고 평평하고 조용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그곳에서 얻은 힘으로 맺은 창작물 서울문화재단에서 주관한 전시 <림보>의 연계 텍스트로 덕수궁 석조전 계단과 관련한 산문을 한 편 썼다. 텍스트는 메일링으로도 전송되었고, 전시관 한쪽에도 작게 인쇄된 종이 형태로 전시되었다.
다시 영감을 찾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지금의 과제 네 번째 시집을 천천히 집필 중이다. 아마 공간과 사물의 물질성에 더 집중한 시집이 될 것 같은데, 내가 공간에서 감지하고 있는 빛과 어둠, 강한 질감들이 이 석조전 계단에서부터 더 흘러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이승민ㅣ갤러리 홍보 · 아트 프로젝트 디렉터
영감이 메말랐을 때 찾는 곳 일상이 무미건조할때면 서울 시내의 전통시장을 찾아다닌다. 심적인 우울 혹은 매너리즘에 잠식될 겨를 없이 오로지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내는 삶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힘을 얻은 곳은 경동시장이다.
거니는 시간대 오전에 방문하기엔 게으른 탓에 보통 오후 2~3시경에 방문한다. 더 늦으면 문을 일찍 닫는 상점들이 있기 때문에 자칫 시장의 그 온전한 북적거림을 놓칠 수 있다.
반드시 즐기는 행위 일단 수많은 출입구 중 한 곳으로 입장했다면 스마트폰 지도 애플리케이션 없이 길을 잃어본다. 무작정 발을 내딛다 보면 호떡, 분식, 빈대떡 등을 판매하는 가판대를 지나 갑자기 제철 나물과 한약재 상점들이 나타나고, 별안간 문어, 갈치 같은 해산물이 등장하며 오감을 자극한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어깨를 살짝씩 부딪치며 끊임없이 걷는다. 조금만 가판대 앞을 서성여도 적극적으로 영업하시는 나이 지긋한 사장님들을 보며 나의 ‘힘듦’이 오만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30~40분 돌아다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호떡을 사서 후련한 마음으로 귀가한다.(사실 그 호떡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해치운다!)
그곳에서 얻은 힘으로 해치운 짐 경동시장을 다녀온 날은 집에 와서 밀려 있던 업무 연락들을 그날 안에 모두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영감을 찾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지금의 과제 6월 말 개최 예정인 전시를 기획 중인데, 한국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좀 더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 행사다. 전시와 프로그램 기획 전반을 담당하게 되어 부담이 커서 그런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쉽사리 되지 않는다. 곧 시장의 힘을 빌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김사월ㅣ싱어송라이터
영감이 메말랐을 때 찾는 곳 서울 아트 시네마에 가서 혼자 영화 한 편 볼 수 있다면 가장 화끈하게 기운을 충전할 수 있겠지만, 꼼짝없이 주어진 마감을 해야 할 때는 움직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이럴 때 메마름을 가까이서 빨리 채울 수 있는 나만의 장소는 바로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의 동네 단골 카페다. 동아리방, 누군가의 작업실, 헌책방이나 중고 음반 가게의 장점들을 합친 듯한 느낌의 공간이다. 사진을 찍는다면 예쁘게 나올 만한 느낌이지만 그런 것이 주된 공간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스타그램적으로 꾸미지 않은 카페라서 예쁘다. 아담한 크기의 카페 중앙을 가르는 가벽 때문인지 기분 좋게 딱딱한 가벼운 의자 덕분인지 이곳에 앉아 있으면 미묘하게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기분이 든다. 카페 귀퉁이에는 소설책들이 마구 쌓여 있고 다른 쪽에는 분명 오래 모아왔을 것으로 보이는 테이프와 시디들이 가득하다. 손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혼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자신만의 작업을 하고 있다.
거니는 시간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가는 느낌이라 오후 2시 즈음 방문한다. 평일에 갈 수 있는 프리랜서의 형편이면서도 붐빌 게 분명한 주말에 자주 가게 되는데, 그건 주말까지 할 일을 못 마쳤을 경우가 많고 그래서 더더욱 그 카페의 기운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즐기는 행위 90퍼센트의 확률로 라테를 주문한다. 그걸 마시며 무심한 듯 신경 쓴 사운드 시스템과 음악 선곡을 느낀다. 그렇게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카페적 명상을 하다가 마음을 잡고 원고를 쓴다. 가끔 들어오는 강아지 손님들을 염탐한다. 가끔 여름에만 판매하는 오이 샌드위치를 먹는다.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
그곳에서 얻은 힘으로 맺은 창작물 매달 한 편씩 영화지에 싣는 에세이의 70퍼센트가 이 카페에서 쓰였다. 의외로 음악가들은 공연 소개라거나 서면 인터뷰라거나 텍스트를 쓸 일도 많은데, 2024년 이후 내가 쓴 텍스트는 이곳의 에너지를 빌린 적이 많다. 좋아하는 장소라는 부적을 믿어버리면 힘을 내서 쓸 수 있는 것 같다.
다시 영감을 찾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지금의 과제 현재 시점으로 12회 김사월 쇼 공연 준비와 장편영화 음악 작업을 함께 준비하며 여러 원고도 마감하고 있다. 어쩐지 잘 해내야 하는 일들은 한번에 몰리는 것 같다. 지금은 카페에 가서 마감할 여유도 없지만···. 지금의 과제들을 잘 풀고 나면 단골 카페의 라테와 오이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함지은ㅣ북디자이너 · 디자인스튜디오 상록 대표
영감이 메말랐을 때 찾는 곳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을 자주 찾는다. 독립하기 전 6년 반 동안 일했던 열린책들이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곡선으로 이뤄진 건물 외관과 계절마다 달라지는 주변 풍경이 인상 깊다. 파주출판도시는 자연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해서, 잠시 걸으며 햇볕과 바람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운영 중인 북디자인 스튜디오 사무실을 출판도시 안에 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거니는 시간대 근무하던 시절에는 점심시간에 찾았다. 지금은 정해진 시간 없이 때때로 찾는다.
반드시 즐기는 행위 커피를 마시며 서가를 둘러보고, 창 너머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을 좋아한다. 눈으로 덮인 겨울 풍경도, 초록이 가득한 지금 같은 계절도 각자의 매력이 있어서 새로운 기분을 준다. 전시가 열리고 있을 땐 천천히 관람하며 머물기도 한다.
그곳에서 얻은 힘으로 맺은 창작물 건물의 곡선과 풍경에서 받은 인상은 늘 새로운 영감을 준다. <죽음>(2019)부터 <2666>(2023),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2024) 등 열린책들에서 일하던 시절 만든 책 대부분이 이 공간의 영향을 받았다.
다시 영감을 찾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지금의 과제 독립 이후 마주하는 일들이 하나하나 과제처럼 느껴진다. 회사에 다닐 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환경을 갖추는 것에서부터, 기준을 조금씩 다듬어가는 일까지도. 크고 작은 고민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현재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곧 관람하러 가려고 한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탐구하며 구축한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손수현ㅣ배우
영감이 메말랐을 때 찾는 곳 제천을 즐겨 찾는다. 제천의 청풍호와 절벽에 간신히 걸쳐 있는 절정방사를 좋아한다. 주기적으로 자주 찾는 지역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고요해져서, 고요해진 마음에 무언가 들어앉기를 바라면서.
거니는 시간대 처음에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가곤 했는데 요즘은 주로 봄에 간다. 절벽에 매달린 절을 찾아가려면 커다란 숲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 길 위에서 녹지 않은 눈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봄에도 산은 여전히 눈을 품고 있다. 다 지나간 겨울을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품은 채 고요히 존재하는 걸 보는 게 좋다.
반드시 즐기는 행위 나는 무교지만, 도착하면 제일 먼저 커다란 부처님에게 인사를 한다. 부처님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 굽이굽이 올라온 산이 커다랗게 내려다보인다. 부처님이 언제나 바라보고 서 있을 산등성을 처마 밑에 앉아 나도 함께 본다. 그러고 있다 보면, 그래도 잘 살아야지, 그런 마음이 든다. 부처님의 마음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잘 살고 싶다.
그곳에서 얻은 힘으로 맺은 창작물 공저로 참여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초안과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에 수록된 몇 꼭지를 그곳에서 썼다. 그때도 이런 문장을 썼다. “숲은 무엇이든 오래 품어주는구나. 가끔은 영원히 안아주기도 하고 말이다.”
다시 영감을 찾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지금의 과제 쓰고 싶은 시나리오가 있다. 퀴어 청소년이 주인공인 이야기인데, 잘 풀리지 않아서 고민이 많다. 이번의 제천은 여름의 제천이 될까. 여름이 오기 전에 고민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고민을 안고서 만날 여름의 제천도 좋겠다.
- 일러스트레이터
- 유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