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흐름, 질서 없는 자유 속에서 완성된 양정웅, 장영규, 김보람이라는 새로운 장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10주년을 맞아 각자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언어를 구축해온 세 사람이 창작 공연 ‘제비노정기’로 다시 한 무대에 모였다. 연출가 양정웅, 음악감독 장영규, 안무가 김보람.
이들이 그려내고 있는 무대는 완벽하게 정돈된 조화가 아닌, 질서 없는 자유 속에서 피어나는 어떠한 완성. 그 무대가, 궁금하다.
GQ 이번 공연은 다소 색다른 시도인 것 같습니다. ‘흥보가’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JU 많은 작업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어려운 작업은 처음입니다. 제가 워낙 이날치와 앰비규어스의 팬이라 개인적으로 부담도 크고, 고민도 많은 프로젝트예요. 전통 판소리인 ‘흥보가’를 다룬다고 해서 스토리텔링 중심의 창극을 기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해보고 싶기도 했고요.(웃음)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두 팀이 그동안 해온 방식과 에너지를 바탕으로 더 직관적이고 리드미컬한 콘서트 형식으로 접근하려 합니다. 각자의 개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조화롭게 엮을지가 연출자로서 가장 큰 고민이죠.
YK 원래 이날치로 활동하면서 ‘다섯 바탕’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어요. 밴드로서 기존의 이야기를 또 풀어내는 게, 어느 순간 너무 편한 선택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이번처럼 함께 모여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공연이라면, 그리고 그 작품이 ‘흥보가’라면 다시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 판소리를 이날치만의 색으로 재해석하는 건 여전히 흥미롭고, 즐거운 작업이니까요.
GQ 콘서트 형식의 공연이라, 구상도 남다를 거 같아요.
JU 이날치의 음악은 원래 공연장에서 이루어지는 즉흥성과 라이브의 에너지가 큰 매력이잖아요. 앰비규어스도 콘서트처럼 관객과 호흡하는 형식에 익숙하고요. 그래서 이번 공연도 단순한 무대극이 아니라 시각과 청각, 그리고 관객의 리액션이 함께 작용하는 하나의 ‘콘서트’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죠.
GQ 이날치의 음악적 방향도 기존과는 다르게 설정하셨다고요.
YK 예전 작업은 1980년대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그보다 더 이전, 원초적인 감각의 리듬과 에너지를 가져가고 싶었죠. 결과적으로 사운드가 조금 더 거칠어지고 강해졌어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GQ 안무 역시 이야기 중심이 아닌, 개개인의 존재감에 집중했다고요.
BR 이번 작업은 딱 짜인 안무를 따라가기보다는, 무용수 한 명 한 명이 주인공이 되는 방식이에요. 각자의 호흡과 감정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풀어낼지에 초점을 맞췄죠. 정해진 동작을 익히기보다는 음악에 반응하고, 개성 있는 움직임을 찾아가는 식의 실험적인 방향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GQ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시도하는 의상 콘셉트가 있나요?
BR 의상은 또 하나의 질문이에요. 완성된 콘셉트를 제시하기보다,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들이 무대 위에서 부딪히는 과정을 즐겨요. ‘이 옷을 입고 춤추는 몸은 어떻게 보일까?’, ‘이질적인 것들이 만났을 때 어떤 감각이 생길까?’ 같은 호기심이 출발점이죠.
끊임없이 움직이는 몸에 비현실적인 색을 입히거나, 상징적 이미지를 본래 의미에서 떼어내고 ‘날것’의 몸만 남겨보기도 해요. 완벽한 결과물보다 ‘저게 뭐지?’라는 궁금증을 남기는 상태가 더 매력적이죠. 그게 바로 ‘앰비규어스’라는 이름의 이유이기도 합니다.(웃음)
GQ 김보람표 안무는 늘 예측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엔 어떤 ‘예측 불허’를 준비하셨나요?
BR 저는 음악이 무대를 지배하는 규칙이라고 생각해요. 무용수들은 그 규칙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찾죠. 예측 불가능성은 그 지점에서 발생해요. 작곡가가 숨겨둔 아주 미세한 소리나 파편까지 찾아내고, 무용수들에게 그 소리를 각자 책임지게 해요.
관객은 하나의 음악을 듣지만, 무대 위에서는 사실상 수십 개의 다른 음악이 각기 다른 몸을 통해 동시에 연주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무엇을 볼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해요. 정답을 주기보다 음악과 춤으로 수많은 질문을 해요. 관객이 그날의 공연을 능동적으로 편집하고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전하고 싶은 예측 불허입니다.
GQ ‘시리렁 시리렁’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JU ‘시리렁’은 전통 판소리 ‘흥부가’에서 박을 타는 대목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소리예요. 흥부가 박을 타며 가족의 희망을 품는 장면인데, 그 행위와 기대, 염원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죠. 애초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제비노정기>라는 가제로 시작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흥부가’의 서사나 드라마에 의존하기보다는 비선형적인 구조로 풀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직관적이고 음악적, 감각적으로 와닿는 제목을 택하게 됐습니다. 이날치 음악 중에도 ‘시리렁’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곡이 있고요. 무엇보다 이 단어가 글로벌한 맥락에서도 한국의 순수한 말로 직관적으로 퍼져나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이 공연은 ‘이해’보다 ‘경험’에 가까운 무대가 되길 바랍니다.
GQ 세 분의 색이 한 무대에 모였을 때, 무대는 어떤 장면으로 완성될까요?
YK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질서 있는 난장판’이에요. 연주자, 무용수, 제작진 모두가 한데 섞여 있지만, 그 안에 뭔가 명확한 흐름이 있는 상태랄까요.
JU 사실 아직까지도 이 공연은 저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예요. 각자의 색이 워낙 강한 분들이라, 제 욕심대로 밀어붙이는 연출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지금은 조율자 혹은 편집자의 입장에 가까운 것 같아요. 떠오르는 장면요? 장영규 감독님의 표현이 딱이에요. ‘질서 있는 난장판’. 겉으론 마구 뒤섞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결이 살아 숨 쉬고, 묘한 균형이 흐르고 있어요. 그걸 보는 게 관객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될 거예요.
BR 개인적으로는 관객의 에너지를 쭉쭉 끌어당기는 ‘빨대’ 같은 공연이 됐으면 해요.(웃음) 함께 즐기고, 몰입하는 무대.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수인지 무용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다양한 역할이 드러나는 무대요.
GQ 이번 공연의 무대 연출이나 키 비주얼에서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JU 아직 확정된 연출안은 아니지만, 콘서트 무대처럼 질서 있는 난장판의 개념을 비주얼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을 그리고 있어요. 무대는 다채롭고 자유로울 예정이고요. 사이키델릭하거나 팝아트적인 느낌, 그리고 뉴트로한 질감도 담기게 될 것 같아요. 특히 이날치의 펑키한 사운드에서 나오는 직관적인 이미지와 색감들을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
GQ 작업을 하다 보면 서로에게 영감을 받은 순간도 있을 거 같아요.
JU 장영규 감독님과 작업할 때마다 늘 새로운 자극을 받아요. 머릿속에 그려놓은 장면이 장 감독님의 음악과 만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선율과 리듬이 덧입혀지며 폭발하죠. 생명력을 얻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요. 늘 상상 그 이상을 만들어내세요.(웃음) 김보람 안무 감독님과의 작업에서는 즉흥성과 우연성, 그리고 리듬을 쪼개는 디테일한 움직임에서 큰 영감을 받아요. 무엇보다 그 모든 게 재미있고 신나요. 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김보람 감독님의 에너지는 큰 활력이 되어주죠.
BR 양정웅 연출님과 장영규 감독님, 두 분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큰 배움이고 감사한 시간이죠. 함께할 때면 늘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예요. 그만큼 이번 공연에는 앰비규어스만의 스타일과 디테일로 제대로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GQ ACC(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10주년을 맞아 이 무대가 열리는 것도 의미 있는 포인트죠. 세 분에게는 이 무대가 어떤 의미일까요?
JU ACC와는 여러 작업을 함께해왔어요. 이번 공연은 1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앞으로 20주년, 30주년을 향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해요. 이 무대를 통해 앞으로의 ACC가 나아갈 길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YK ACC와는 개관 당시 음악 프로그램을 함께한 인연이 있어요. 다시 이 무대에서 작업하게 된 건 저에게도 의미 있는 재회죠. 특히 서울이 아닌 곳에서 실험적인 예술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ACC는 창작자에게 매우 특별한 공간입니다. <제비노정기> 역시 그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더욱 유의미하게 펼쳐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GQ 마지막으로 공연에 대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JU <GQ> 독자들은 누구보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감각적인 분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라면 이 공연이 얼마나 특별한지 단번에 느끼실 거예요.(웃음) 가장 힙하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즐거운 공연이 될 겁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BR 광주에서 선보이지만, 지역에 국한된 공연은 아니에요.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 주셨으면 해요. 무용수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드러나는 새로운 방식의 공연이라, 평소 무용이나 판소리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YK 공연은 딱 그 순간에만 존재하잖아요. 같은 멤버, 같은 콘텐츠라도 다시는 똑같이 만들 수 없어요. 그래서 이번 공연은 단 한 번뿐인 특별한 경험이 될 거예요. 그 순간을 함께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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