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한이 건축하는 몽상.

GQ 여기 작업실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GH 2020년부터요. 이 동네가 조용하고, 을지로 금속 거리나 충무로 인쇄 골목같이 작업에 필요한 동네들과 가까워서 좋아요. 그런데 처음 이 작업실을 구할 때만 해도 작가가 돼야겠다, 평생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막 졸업한 때라 학교에서는 작업을 더 이상 못 하게 됐고, ‘나이키 시리즈’ 프로젝트 하느라 급하게 작업실이 필요했어요.
GQ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 나이키 의자 말이죠?
GH네. 전공으로 가구와 리빙 디자인을 공부했는데, 저희 과가 포커싱한 건 더 조형적이고 더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향이었어요. 실제 크기 의자를 만들기 전에 모델링하는 친구도 있고 드로잉해서 바로 실제 크기 제작으로 넘어가는 친구도 있었는데, 저는 일단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고 카드보드 박스들로 작은 비율의 의자들을 만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나이키 박스로 의자를 만들게 된 거죠. 어릴 때 신발이나 패션을 너무 좋아한 학생이어서 집에 좀 많이 쌓여 있었거든요, 나이키가. 그리고 지난번 <지큐> 기사에 참여했을 때도 보여드렸지만 저는 잘 안 버려요. 10대 때부터 텍도 그렇고, 영화표도 그렇고. 그런 제 소비 습관이나 패턴이 작업에 적용됐다고 느껴요. 자연스럽게. 운 좋게. 그래서 나이키 박스로 작은 미니어처 의자부터 만들다가 ‘실제 크기로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합판으로 의자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나이키 신발 상자로) 커버업을 했죠. 작년부터는 코팅까지 진행해서 이번 전시에서는 뭐랄까, 탕후루같이 코팅된 의자도 나올 거예요. 이렇게 계속 디벨롭해 가는 과정 같아요.

GQ 일단, 전업 작가가 돼야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은 건 아니군요.
GH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준비도 안 된. 지금도 많이 부족해서 배우고 있는 단계라고 느끼는데, 그러니까, 작업이 제 기준에는 조금 어렵고, 그때는 스물다섯 살이었으니까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더 몰랐죠. 비즈니스적인 면에서도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너무 감사하게도 당시 분더샵 나이키 스토어에서 제 나이키 의자를 전시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셨고, 그때 아주 재밌게 만들면서 그게 커리어의 시작이 됐어요. 그걸 보고 또 다른 분이 제안을 주시고, 주시고···. 계속 연장선이었어요. 그리고 결과물을 냈을 때 사람들이 좋아해주시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손으로 만드는 것도 재밌고. 그러면서 받아들인 것 같아요. 매력적인 직업이구나. 힘든 점도 물론 많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 점점 잡아가고 있는 상황 같아요. 지금부터.
GQ 앞서 참여한 1년 전 <지큐> 기사 주제가 ‘Old But Gold’였죠. 그때 취재 요청하며 제가 이렇게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빠르게 소비되고 지나가는 나날, 그 안에서 오래도록 아껴 쓰고 곁에 두고 있는 물건을 현재 컬처 신의 여러분께 묻고 모아보고자 합니다.” 어떤 물건 소개했는지 기억하나요?
GH 여기, 아직도 있어요. 초등학생 때 한지공예반에서 만든 한지함.
GQ 여기 있구나, 맞아요. 그때도 만져보면서 손맛이 좋다, 초등학생이 꼼꼼하게도 만들었다 싶었어요.
GH 초등학생치곤.(웃음) 아마 선생님이 도와주셨을 거예요. 초등학생 때 못하면 다 도와주시잖아요. 그런데 진짜 어릴 때 한 경험이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건 되게 못하고 별로 안 좋아했는데 손으로 만드는 건 좋아했어요. 손으로 만드는 건 제가 생각한 게 바로바로 나온다고 해야 하나? 그런 스타일의 작업을 좋아했어요.

GQ 공예가로서의 시작점을 꼽아본다면 어떠할까요?
GH 사실 제가 하는 작업, 정체성에 혼란이 아직도 있다고 해야 하나? 왜냐하면 저는 완전한 공예가도 아니고, 완전한 디자이너도 아니고, 완전한 파인 아티스트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에게 작업자라는 표현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모르겠어요. 이번 개인전 주제가 그래서 ‘Delusional Craft’예요. 부정적인 의미로는 망상적인, 비정상적 공예라는 뜻인데, 그런데 그게 맞는 게 저는 보수적인 틀에서는 굉장히 비정상적인 공예를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맥도날드 포장지에 한지를 배접해서 등을 만들거나, 나이키 박스로 의자를 만들거나, 실용성과 조형성의 중간에 있는 것들을 만들기도 해요. 이번 전시에서는 보다 실험적으로 기능 없이 아주 조형적인, 그런데 제 스타일을 가미해서 상징적인 아이콘과 또 다른 소재를 섞는 그런 작업물이 많이 나올 예정이에요. 그래서 공예가로서···, 글쎄요, 저는 작업자라고 하는 게 제일 좋아요.
GQ 흥미롭네요. 마지막에 그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거든요. 지난 작업을 훑으며 궁금했어요. 이규한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싶을까. 한지공예가? 아티스트? 예술가?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군요.
GH 네. 왜냐하면 디자인 공부를 한 학생이긴 하지만 거기서 배운 건 또 완전한 디자인 언어와 관련된 것보다도, 예를 들어 제게 오늘 촬영 때 앉은 의자를 선물해주신 황형신 교수님은 도널드 저드라든지 좀 더 파인 아트적인 것들을 알려주셨거든요. 제 작업도, 저도, 그러려고 노력해요. 다양한 요소를 한 작업에 섞고 싶어요. 팝적인 요소지만 형태는 굉장히 미니멀하다든지, 그런. 그래서 저는 음, 디자이너도 아닌 것 같아요. 공예가도 아니에요. 다른 공예가와 작업을 많이 해요. 부채를 만들 때는 전주의 부채 장인 선생님이나 인사동의 한지 선생님과 계속 호흡 맞춰가면서 여쭤보기도 하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저기 가죽 케이스에 쓴 금속 같은 경우에는 을지로의 선생님과 의논하면서 틀을 만들고, 제가 생각하는 실제 공예가 선생님들과 협업하면서 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다양한 요소를 한 작업에 녹여내는 작업자라고 생각해요.

GQ 그 작업이 모일 9월 개인전 이야기 전에, 지금까지 보여준 작업들에서는 아이코닉한 심벌, 패션, 트렌드가 주로 읽힌다고 느꼈어요.
GH 맞아요. 그런데 트렌드를, ‘하입 Hype’을 좇는 건 아니에요. 나이키는 실제로 제가 어릴 때부터 소비했고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이고, 맥도날드는 제가 다닌 중학교 바로 앞 골목에 있었고, 그리고 맥도날드 조명 작업이 나온 이유도 코로나 시즌 때 밖에 나갈 수 없으니까 제일 자주 시켜 먹었거든요. 이번에 에르메스 기름종이로 한 작업은, 제가 실제로 에르메스를 소비하지는 않지만 공부하거나 쉬러 도쿄에 자주 가는데 긴자의 에르메스 빌딩을 봤어요. 제가 좋아하는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디자인한 건물인데 유리 블록으로 이뤄져 있어요. 저녁에 갔을 때 그 건물이 한 도시의 조명 같았어요. 도시를 밝히는 큰 조명처럼 느껴졌어요. ‘멋있다’ 생각하고 지냈는데 에르메스에서 기름종이가 나온 거예요. 어, 종이? 에르메스? 그래서 일단 구매했죠. 그리고 기름종이 한 장을 유리 블록 하나라고 치환해서 긴자에서 본 에르메스 건물을 미니어처화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형태의 직선으로. 그래서 저는 트렌드나 ‘하입’보다는 그냥 제가 경험하고 본 것들을 제 작업으로 치환하는, 번역하는, 옮기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GQ 이규한이라는 작업자는 결국 본인이 소비하고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작업에 녹여내고자 하는군요.
GH 그래서 아이디어가 안 나오거나 할 때는 그냥 돌아다녀요. 그냥 나가서 봐요. 저는 제가 건축의 형태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30년 동안 서울 송파구에서 살았어요. 지금도 살고 있고. 송파구에는 정말 빌딩밖에 없어요. 맨날 같은 건물을 보고 아파트 안에 갇혀 있는 건데, 어떻게 보면 그게 제게는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비주얼인 거예요. 저는 자연보다 렌조 피아노가 지은 에르메스 건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웃음) 그런 생활 반경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걸 내 작업으로 표현해보자.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제가 일상에서 느끼는 것, 실제로 보는 것, 간판들, 맨홀 뚜껑, 도시에서 보는 것들. 모두가 볼 수 있는 것들. 저는 그게 팝 Pop이라고 생각해요.

GQ 주제가 ‘Delusional Craft’인 이번 개인전을 예고해본다면요?
GH 제가 ‘Delusional’이라는 단어를 최근에 알았어요.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를 되게 좋아하는데 그가 최근에 컨버스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몽상가, 망상가래요. 그런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믿어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대요. 그 인터뷰를 보고 ‘Delusional 망상성의’이라는 단어에 꽂혔어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작업도 표면적으로 보면 이어나가는 게 쉽지 않거든요. 나이키 박스도, 포장 봉투도, 더 많이 필요하니까 어렵게 구하러 다니고, 화방에서 재료를 편하게 살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재미있고 어떻게 보면 특이한 방식이거든요.
GQ 아까 작업실 둘러볼 때 저기 놓인 새 작업을 위한 프라다 신발 박스는 어디서 샀다고 했죠?
GH 번개장터.(웃음) 제가 봐도 웃겨요. 아직도 ‘나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내 상상이고 망상이고 말이 안 되는 건가 싶을 때 ‘Delusional’이란 표현을 알았고, 그래,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상상하는 것, 진짜 내 상상을 보여주자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 신작에는 가상의 건축이 많아요. 몽상의 건축인 거죠. 예를 들어 프라다 신발 박스로 만들 작업을 간단히 설명 드리면, 제가 구찌 전시(<Gucci Horsebit Society>, 2023)에 참여하게 되면서 밀라노에 처음 가봤거든요. 그때 금박에 덮인 프라다 아트 파운데이션 건물을 봤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저게 뭐지? 제가 느끼기에 금박은 굉장히 동양적인 요소인데 이게 프라다 건축물로 구현된 게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건 가상의 프라다 건물을 만드는 거예요. 을지로의 요소를 더해서. 셔터 문, 지금 여기 건물의 것 같은 오래된 섀시 창틀···, 밀라노에서 본 프라다를 제 시선으로 변화시켜보는 거죠.

GQ 그래서 아까 누군가와 통화하며 “셔터 컬러를 조금 더···” 이렇게 저렇게 말했군요.
GH 맞아요.(웃음) 2024년 11월에 홍콩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지만, 이번 9월 서울 전시는 스스로 마음가짐이 다른 첫 번째 개인전이라고 임하고 있어요.
GQ 어떻게 달라요?
GH 조금 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설렘이 생겼어요. 조금 더, 정말 상상하는 것들을 하려고 해요. 제가 탐 삭스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작년 9월에 소호에서 쇼케이스를 했는데, 탐 삭스의 작업실이 소호에 있어요. 운 좋게도 만나게 됐는데, 그때 그가 안아주면서 잘하고 있다고, “계속 상상하라”고 얘기해줬어요. 그 말이 무척 울림이 있었어요. 더 해야겠다. 시도도 더 많이 해봐야겠다.
GQ 상상하라.
GH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처음이었거든요. “이제 다른 거 해봐”, 아니면 “작업 예뻐. 어떻게 만들어?” 이런 말은 주변에서 많이 들었지만 “더 상상해봐”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신기했어요.
GQ 요즘 이규한 작업자는 어떤 상상을 하고 있나요?
GH 이번 전시에서 보여드릴 거라 아직 비밀인데 (책상 위의 어느 미니어처 모형을 가리킨다) 이거. 이걸 제 식대로 재해석한 조각도 보여드릴 거예요.
GQ 이 조립 모형이 그래서 여기 있구나.
GH 이 비례나 형태를 살펴보려고 여기저기서 찾아서 구하고 있어요. (맥도날드 포장지로 작업한) 병풍과 같은 접근인데, 아주 한국적이잖아요. 보통 사람이 한국적인 걸 생각했을 때 떠올리는 한옥이나 그런 키워드보다 재밌는 게 뭐가 있을까, 재밌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서칭하다가 떠올랐어요. 상징적이잖아요. 17 대 1로 싸운 느낌이잖아요. 살아남은 엄청 센 존재잖아요. 이걸 풀어보려고요. 제 식대로.
이규한의 개인전 <Delusional Craft>는 2025년 9월 갤러리 도큐먼트에서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