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마피아의 도시에는 위험하지 않은 사랑이 있다.
2년 전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한 신혼부부를 만났다. 여자는 내 또래의 한국 사람이었고 남자는 러시아 사람이었다. 그 여자와 나는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말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반가웠다. 전국에 한국인이 300명 정도 되는 엘살바도르에서 내 또래 한국인을 만났으니까. 그 여자도 내가 이곳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다 결혼까지 한 두 사람은 큰 차를 캠핑카처럼 개조해 미국에서부터 차를 타고 내려와 중미의 산살바도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조금 살다가 남미의 끝자락인 아르헨티나까지 차를 타고 갈 계획이었다. 두 사람의 몸은 강한 햇살에 빨갛게 익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강박적인 삶에 찌든 흔적이 없었다. 나는 왜 더 좋은 데서 신혼을 보내지 않고 왜 위험한 이곳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지구 어딜 가도 한국인이 많은데, 이곳은 한국인도 없을뿐더러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했다. 엘살바도르가 자유로운 나라라는 뜻인지, 한국인이 없어서 자유롭다는 뜻인지 더는 묻지 않았다. 보나 마나 “둘 다”라는 대답이 나오리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뒤이어 엘살바도르에 오기 전엔 통계만 보고 위험한 나라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라고 했다. 그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점점 그녀의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기댈 곳 없는 이방인인 나를 위로한 건 ‘고향 생각’이 아니라 엘살바도르의 사람들이었다.
엘살바도르는 ‘구원’이라는 뜻을 지닌 중미의 작은 나라다. 서울의 3배 정도 되는 면적에 670만 명이 산다. 마피아가 남미에서 재배한 마약을 미국으로 가져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엘살바도르의 신문 1면에는 매일같이 마피아 세력 간의 싸움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보도된다. 밖에서 보면 엘살바도르는 가난하고 위험한 미지의 나라다. 나는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흰 페인트가 칠해진, 정원이 딸린 단독 주택에 방을 얻어 살았다. 집의 얇은 철근 지붕은 열대 기후의 뜨거운 태양열을 그대로 흡수해 집을 찜통처럼 달궜다. 오후 3시쯤 집에 있으면 더위에 빈혈이 일었고, 밤에 모기에 물리면 너무 가려워 잠을 잘 수 없었다. 산살바도르 모기는 유난히 크다. 이국적인 맛이 났는지 특식인 양내 피를 좋아했다. 밤에 화장실에 가서 불을 켜면 마음대로 공간을 누비던 바퀴벌레들이 화들짝 놀라 세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도 놀라서 소리 질렀고 같이 사는 아주머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겁쟁이라고 놀렸다. 아주머니는 슬리퍼를 벗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퀴벌레를 잡았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 5분 안에 해야 했다. 5분이 넘어가면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태양열로 물을 데우는데, 아침에는 태양이 아직 무르익지 않기 때문이다. 내 머리는 거의 매일 부스스했고 얼굴은 화장을 잘하지 않아 까무잡잡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출근할 때는 미국 영화에서 보던 노란색 ‘치킨 버스’를 탔다. 버스는 사람이 붐벼 강도가 많았지만 저렴했다. 25센트, 우리 돈 3백원이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모두 버스를 이용했다. 차가 없고, 요금이 버스의 20배에 달하는 택시를 탈 수 없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이 붐비다 넘쳐 버스 문 밖에까지 대롱대롱 매달렸다. 버스는 문을 닫지 못한 채 쌩쌩 달렸다. 앞사람을 비집고 밀치며 버스에서 겨우 내리면 ‘후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이처럼 생활 수준이 낮아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곳이어도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근무 시간은 8시부터지만, 성실하게 8시에 회사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일할 때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았고 누군가의 생일이면 다 같이 모여 생일 파티를 했다. 회사에서 체육대회를 하면 20대 후반에서 50대인 직원 대부분이 참석해 얼굴이 빨개지도록 뛰었다. 1등을 하면 환호하며 기뻐했다. 한국으로 치면 사내 체육대회보다는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같았다. 회사에서 외국인은 나와 일본인 한 명을 포함해 총 10명이 되지 않았다.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동료들은 따뜻했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디에서 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척박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량이란 배부른 지갑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 마음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나를 ‘Mi Hija’(내 딸)이라고 부르던 50대 직장 동료가 있었다. 금요일이면 퇴근길에 종종 나와 그녀의 진짜 딸을 데리고 야경을 보러 갔다. 우리는 전망대에 올라 산살바도르의 반짝이는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가져온 따뜻한 코코아를 마셨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지만 이상하게도 춥지는 않았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나와도 공유하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았으니까. 게다가 직장동료와 그의 가족까지 동행하는 야경 구경이 한국이라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같은 부서의 알렉산드라라는 동료는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화장실에서 몰래 운 적이 있었는데, 창피하게도 그녀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알렉산드라는 그날 차로 우리 집에 데려다주면서 “난 네가 여기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야. 내가 도와주고 싶어”라고 말했다. 고마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운 이유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면 더 어린애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사건 후, 알렉산드라는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 한 번은 주말에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하더니, 나를 데리고 엘살바도르의 국경으로 올라갔다. 자동차를 빌리고 남자친구를 불러 음식과 텐트를 준비했다. 국경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데, 그날 추위를 유독 많이 탔다. 새벽이 되어서도 잠들지 못하자, 그들은 내게 털모자를 벗어주고 발에는 양말을 덧신겼다. 나는 추위 앞에 이내 염치가 없어졌다. 그전까지는 아량이란 배부른 지갑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 마음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동료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 나를 유명한 식당에 데리고 다니고, 야경을 보러 가고, 함께 여행을 갔다. 그들은 돌봐야 할 가정과 자식이 있고, 바쁜 자신의 삶이 있으며 삶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이 나라 근로자의 소득 수준은 매우 낮다. 한 달 최저 임금이 30만~40만원 선이었다. 내 동료들은 엘살바도르에서 소위 말하는 ‘신의 직장’에 다니는 셈이었지만, 신입의 경우 우리나라 돈으로 1백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받았다. 시간과 돈을 들여 가족도 아닌 직장 동료를 챙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섞인 호의일까? 그들은 그럴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평생 머물 사람도 아니고, 언젠가는 떠날 사람에겐 더욱. 우리가 더 가까워졌을 때, 사람들은 내게 이곳에서 매일 벌어지는 살인 사건과 가난한 환경, 심각한 부패 정치로 몇십 년째 발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절망감을 말했다. 내가 사는 집 주인아주머니는 어린 시절 총기 사고로 오빠를 잃었다. 대학생이었던 그는 클럽에서 어떤 남자와 시비가 붙었고, 그 남자는 클럽 밖에서 기다리다가 오빠가 나오자 쏘아 죽였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 엄마는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었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은 마음 깊숙이 무력감 혹은 슬픔과 절망을 품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땐 마음이 서늘하게 아프면서도 왜 그들이 내게 그토록 따뜻했고 내 외로움을 모른 척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고, 그들은 내가 감당해야 했을 스트레스를 모른 척하지 못했다. 우리는 교감했다. 국적이나 인종은 문제되지 않았다. 서로의 고통을 헤아려 함께 가슴 아파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직장 생활 관련 영상을 봤다. 회사 생활을 20년 넘게 한 강사는 “직장에서 왜 사랑을 하려고 하세요? 직장은 여러분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니에요. 사랑은 직장 밖에서 찾으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영상에 ‘좋아요’를 눌렀고 몇만 번이 공유됐다. 강사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내 동료들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다면, 그 척박하고 외로운 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직장이 사랑 없이 메마른 곳이라면 회사에서 적응을 잘 못하고 어울리지 못하는, 약점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낙오자가 되어야만 하나? 그게 대한민국에서 사회인으로 살아가려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면, 난 배부른 서울보다 가난한 산살바도르를 원한다. 나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되는 곳에 살고 싶다. 사랑이 없다면 도시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운 야경과 멋있는 고층 건물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질까. 나는 사랑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몸이 그렇듯 고향도 주어진다. 하지만 살아가고 싶은 도시는 선택할 수 있다. 이름을 바꾸듯 결단이 필요한 일만은 아니다. 부쩍 가까워진 세계 속에서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다만 살 수 없더라도 그곳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스스로 가늠해 나가다 보면, 지금 이곳에서는 불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만난다. 이달, < GQ >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인 도시에 관해 묻는다.
- 에디터
- 글 / 강지수(KBS 연예부 기자)
- 사진
-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