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은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이모티콘과 함께 사자성어 ‘줄탁동시’를 인스타그램에 올린 뒤 인터뷰 장소로 나왔다. 그리고 씻은 듯이 말끔한 기분과 날아갈 듯 가벼운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지금 제일 궁금한 건 <버닝>이에요. 더 정확히는 이창동 감독 작품 속에서의 유아인. 장황하게, 대단한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하면서 살아요, 요즘. <버닝>을 찍으면서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는 나, 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 같은 거…. 줄탁동시. 이 말이 이 순간과 어울릴 것 같아요.
무슨 뜻인가요? 김경묵 감독이 연출한 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동시에 여러 의미를 내포해요. 사제 지간을 비유하기도 하고, 부화되지 않은 세계가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을 빗대기도 하고요. 알을 깨는 병아리와 알을 쪼는 닭이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그 순간. 이번에 함께 사진 작업을 한 니콜라이와도 그걸 느꼈어요. 내가 닭이 되어 알을 쪼고, 니콜라이가 알을 깨고 나오고, 그로써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저는 또 이창동 감독님과 그 작업을 함께하고 있고요. 지금 저를 표현하는 말로 줄탁동시보다 더 정확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갑자기 터닝 포인트라는 말이 납작하게 느껴지네요. 뭐, 그렇죠. <바닐라 스카이>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매 1분마다 내게 인생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고요. 지금 이 순간 매 1분이,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식상한 말에 담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고, 이건 뭐, 완전히 혁명적인….
<버닝>이 끝나면 유아인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보면 그 혁명적인 것이 무엇인지 가늠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했던 <사도>나 <베테랑> 속 역할마저도 그런데, 다소 표현적이고 과잉되어 있고, 과열되어 있는 감정들, 공기들, 그런 게 아니라 내면적으로 오롯이 느끼는 것을 화면 앞에 보여주는 거예요. 대사가 정말 없고 리액션을 많이 해야 돼요. ‘이걸 느끼고 있는 내 얼굴을 이렇게 창조해내야지’가 아니고, 느끼는 것 자체를 드러내는 거죠. 표현에 대한 강박 없이 카메라 앞에 존재해야지, 늘 이 생각을 지향해왔지만 사실 그런 연기를 하는 현장은 뭐, 대한민국에서 거의 말살됐어요. 독립영화 신에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배우가 고집해도 되지만 그럼 전체 흐름에서 아주 도드라지게 달라져버려요.
그렇다면 기회다운 기회가 왔네요. 뭐, 아무튼 대박이에요. 이럴 순 없어요. 흐흐흐.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에요. 몇 개의 화려한 말들보다는 화보 속에 드러나는 내 얼굴, 가장 말쑥하고 가장 진실한 내 얼굴로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요. 변화, 미래, 앞날 이런 것들에 대한 강박도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항상 개념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를 외치며 살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그 플로를 타본 적이 없어요. 진짜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이제는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촬영장에 가는 일은 늘 나에게 불행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몸을 던져서 해요. 죽어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항상 촬영에 임하거든요.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쯤부터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잖아요. 저는 시나리오를 잘 안읽고 밑줄 치는 것도 안 해요. 내가 감지하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으로 연기하다 보니 제가 그 인물들과 그냥 혼재되어 있어요. “유아인, <베테랑> 조태오에서 못 빠져나왔어” 이런 말들…. 빠져 나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난 그냥 조태오고 조태오는 유아인이고 조태오는 엄홍식이고. 선재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사도세자조차도요. 전적으로 나를 반영한 복합적인 인물이 되는 거죠. 정성주 작가님한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선재가, 어떤 괴물 같다고요.
“나는 아티스트다”라는 말은 어때요? 최근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역할 수행에 충실한 사람이다. 역할에 몰두할 때 나오는 어마어마한 순간이 있어요. 배우로서는 캐릭터라는 역할을, 한 인간으로서는 아들의 역할을,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운영하면서는 사장의 역할을…. 전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고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인 거 같아요. 놀랍게도 전 일면 대한민국 최고 갤러리스트라고 생각해요. 온갖 페어를 다니며 몇천만 원짜리 그림을 파는 갤러리스트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하지만 난 자부해요. 내가 만드는 결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잣대는 내 진정성이죠. 그리고 다른 세계와 충돌하면서 만들어지는 시너지들을 발견하고, 작은 흐름과 변화를 감지하면서요.
그 말을 의심 없이 밀어붙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사실 우주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데,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1퍼센트라도 아는 걸까요? 기꺼이 자신의 무지함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는 아티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현재성과 시대성이라고 생각해요. “시대를 반영하지 않고 어떻게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겠어요”라고 니나 시몬이 이야기했죠. 절절하게 통감해요. 완전 맞는 소리예요. 우아 떨고 허세 떨고 예술가인양 할 게 아니고요.
스스로를 정의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었죠.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휘젓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맞아요. 지금도 여전히 그래요. 생각을 휘저어놓지 않으면 새로운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 생각에 고착되어 있잖아요, 완전히.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난 내 몸을 던지고 있다는 거. 내가 잔다르크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지만, 어찌 보면 희생이 정말 즐거워요. 나를 보람되게 하고 날 살찌우기 때문에요. 오죽하면 ‘내 시대에게 고함’이라는 그 장문의 글을 써서 세상에 공개했겠어요. 기꺼이 화형 당해가면서. 흐흐.
왜요? 굳이 왜? 세상 속에서 내 존재를 느끼는 방식이죠. 이창동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너는 아마도 내가 만난 배우 중 자의식이 가장 센 배우일 거야.” ‘나’가 없어서 오히려 자의식이 많은 게 아닐까요, 했더니 공감하셨어요. 자의식을 아주 날카롭게 드러내는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없어요. ‘자신’이 없다는 건 용기가 없다는 뜻도 될 수 있지만 그보단 ‘Self’가 없다는 중의적인 뜻으로 한 말이에요. 예전에는 같은 질문에 “외로움에 대한 응답이에요”라고 했어요. 외로워서 나를 세상에 던지는 행위. 지금은 마음의 자세가 조금 달라졌어요.
지금 유아인에게 제일 무서운 건 뭐예요? 감정이죠. 정말 그게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개념, 판단, 정답, 그 모두가 밖에 있는 것들 같고 내 안엔 감정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유스>에서 그러잖아요. “감정이 우리가 가진 전부야.” 우리는 사회관계망 안에서 가까워지고 있지만, 그냥 껍데기를 누가 더 잘 드러내느냐의 전투만 하고 있고, 정작 내 감정이 뭘 반영하는지 살피는 덴 두려움이 커요. 제가 흔히 받은 공격 코드들 있잖아요. 중2병, 오글거림, 허세. 근데 쿨, 쿨, 쿨, 시크, 시크 이런 트렌디한 걸로 정작 정서가 피폐해져가는 건요? 전 감정이 전부라는 걸 말하면서 인간성을 환기시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감정과 기분을 가져야 하는지조차도 통제되는 건 아닌지.
유명인의 역할 영역을 넓히고 싶나요? 사실 아티스트가 조심스럽게만 이야기하고, 진실만 던지는 건 무책임한 일일 수 있어요. 영화로 말을 걸 수도 있고, 글로 말을 걸 수도 있겠죠. 내가 배우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땐 대체로 이 방향을 향하고 있어요. 몇천만 원 받고 옷 팔고, 몇억 받고 화장품 팔고, 그것도 물론 좋은 일들이죠. 근데 세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우리 알고 있잖아요. 음모론까지는 꺼낼 것도 없어요. 이제는 뻔뻔하게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가면도 안 쓰고 그냥 사람들의 멱을 딴다니까요. 이걸 다 볼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더 칼날을 갈아야 돼. 일어나야 되는 거죠. 나는 얼굴 팔리는 셀럽이면서 비즈니스도 하고, 동시에 한 명의 시민이고, 한 명의 소년이고, 한 명의 어른이 되어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책임감도 느껴요. 이 모든 게 뭉뚱그려진 나를 세상에 던지며 표현해요. 예술은 이렇게 발현되는 것 같고요.
그저 어른이 되어가는 유아인에게 궁금한 것들도 있어요. 아침에 눈 뜰 때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뭔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뭔지…. 몸 아파 죽겠다는 생각? 흐흐. 진짜예요.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두통약도 달고 살고. 내가 몸을 과열시키고 있나?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 사랑이 넘친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요? 균형. 그게 키워드예요.
요리도 하던데요? 요샌 안 해요. 옛날엔 잘 먹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나서부턴 안 해요.
넷플릭스는 요즘 뭘 봐요? 다큐, 드라마…. 넷플릭스가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해요. 다음 시대를 바라보고, 사람들을 일깨우고, 새로운 개념들을 제시하고 제안하는. 100년이 흘러도 우리나라 TV에선 못 볼 것 같은 콘텐츠가 거기 있으니까요. 콘텐츠 갭이 말도 안 돼요. 어떤 면에선 넷플릭스가 ‘wake up call’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생각들을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감상적으로, 미학적으로 던지면서요.
유아인처럼? 좋은 꿈이면 안 깨어나도 되죠. 근데 과연 지금 이 세계, 이 헬조선이, 과연 깨어 있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길몽 같은 것인지 저도 묻고 싶은 거예요. 다들 깨고 싶지 않아?
마지막이자 어쩌면 가장 궁금했던 질문 하나. 늘 유아인의 비일상적인 ‘말’에 대해 궁금했어요. 글로 쓸 것 같은 개념어와 관념어가 가득한 문장을 말로 한다는 점이 의아했어요. 그게 저한테는 일상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통념적인 말로 설명이 안 돼요. 더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트레이닝해요. 난 그냥 타고 태어난 게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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