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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첫 섹스

2018.01.05정우영

‘우리’는 처음 만난 날 섹스했다

우리는 처음을 기억한다. 도로 위의 백색 점선처럼 기억은 단속적이지만 처음 언제 어디서 어떤 얘길 나누고 뭘 했는지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누구나’ 처음을 기억하는 건 아니고 ‘우리는’ 처음을 기억한다. 단지 세상에 둘만 남은 듯했던 너와 나의 처음. 처음 만난 날 침대 위에서 ‘우리’가 되었던 처음.

처음 만난 날 섹스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 번 더 기다려야 한다고?”라고 되묻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섹스를 쾌락만이 아닌 어른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스러운 관계는 커녕 남자들더러 애 같다고 하는 배경에는 처음 만난 날 자는 걸 무용담으로 삼는 남자들의 삐뚤어진 성 관념이 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어린이 A는 말했다. “첫날 자면 안 돼.” 누구보다 여자에게 적극적이고 야간활동이 왕성한 그가 꺼낸 뜻밖의 말. “내 노하우랄까, 처음 만난 날은 여자가 긴장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많고 내가 무리하기도 쉬워. 나는 첫날 일부러 안 자. 먼저 안심시키는 거지.

나는 첫날 일부러 안 자. 먼저 안심시키는 거지. 당연히 잘 거라고 여기고 함께한 여자라면 두 번째 만날 때 더 적극적이기도 하고.” 이 무슨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플레이 하는 소리? 일찍이 박진영이 말하긴 했다. “섹스는 게임이다.” 아니, 다들 집에 컴퓨터도 없나?

자신감을 아이템으로, 대화를 무기로, 두 번째 만남을 레벨 상승으로 본다면 그 상상력의 빈곤이 딱할 지경이다. 두 장의 백지로 만나 서로의 호기심과 인정과 욕구가 대책 없이 뒤섞이지 않으면서 시작하는 처음은 뭘까? 세상에는 단지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이전의 처음이 있고, 그 처음으로서 그는 ‘우리’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겠지만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사정을 좋아하는 것이다.

경험이라면 남자 A 못지않은 여자 B의 말은 사뭇 달랐다. “잘 모르는 사이에서는 일단 외모에 끌리기 마련이지. 근데 그런 사람이랑은 한 번도 처음 만난 날 잔 적이 없다?” 본인 취향의 외모가 따로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아니, 공통점을 뽑자면 압도되는 게 있었어.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고 술을 좀 더 마시고 싶고 단지 좀 더 걷기라도 해보고 싶은 것? 그 ‘좀 더’까지 정신없이 흘러가. 그때는, 그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만나온 것처럼 느껴진달까?”

어제보단 좀 더 나은 시도를 할 수 있는, 하다못해 경험이라도 쌓여 견고해진 다음이 ‘우리’의 지금이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약속하지 않고 지금이 폭발하는 순간. 당연히 그 순간에 취했을 확률이 높고 매우 부정확한 판단이겠지만 하여튼 ‘우리’는 처음을 기억한다. 그 무엇에 비할 데 없이 깨끗한 순간으로서.

하지만 첫 만남, 첫 섹스는 생각만큼 원활하지 않다. 남자 C가 은밀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술에 취해서 여자 엉덩이에 잘못 넣은 적이 있어. 갑자기 집에 가겠다고 침대에서 나가는데 이유도 말 안 하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미칠뻔 했지. 한참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얘기해주더라고. ‘잘못 걸린 줄 알았대. 하하.” 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처음이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아니, 그다음이 뭘까? 백색 점선이 나타난다면 차선을 바꾸겠지만 지금 백색 실선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날을, 처음처럼 기다릴 것이다.

    에디터
    정우영
    일러스트레이터
    Kimi and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