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문화예술회관과 구미시청은 마주 보고 있다. 구미는 한국의 산업화 시대와 마주 보고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미역에서 내려가자 시내버스가 보였다. 버스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는데 20분쯤 걸어 중앙시장의 돼지국밥집에 앉았을 때야 이유를 깨달았다. 버스 색깔이었다. 녹색과 노란색, 새마을 운동 깃발의 그 색과 그 조합. 역시 구미였다. 시내버스와 달리 별 특색 없는 돼지국밥을 먹고 간 곳은 시청이었다. 애초 목적지는 시청 옆 구미문화예술회관이었는데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길이 섰다. 그야말로 1970년대풍 건물이었다. 무표정한 입방체에 답답하도록 작고 비례감 없는 창문, 회색 전면을 위압적인 수직으로 분할하는 흰색 장식 기둥들. 청사 왼편은 아직도 방첩대원들이 상주할 것 같았다. 역시 구미라는 생각에 피식 웃은 한편 불편했다. 1970년대와 그 시대의 관공서라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건물이었다.
구미문화예술회관은 시청과 정반대에 놓인 건축물이다. 어떤 시대도 사회도 읽히지 않는, 오로지 그 자체로 고유한 건축물. 건축가 김수근의 유작답게 완공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구태가 되고 만 부분은 찾을 수 없다. 아마 20년 뒤에도 이 직육면체 덩어리를 어떤 방향에서는 율동감이 느껴지는, 또 어떤 방향에서는 웅장해 보이게 끼워 넣고 맞붙이며 배치한 건축가의 대담하면서 치밀한 구상과 솜씨만 또렷할 테다. 어떻게 이런 건물이 시내버스마저 새마을 운동 깃발로 만든 구미 같은 곳에 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도 가능했다. 공단과 함께 경제적 부와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구미에 이런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구미시청과 문화 예술회관은 철학적으로 충돌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입지처럼 나란했다. 그것은 산업화 시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늘 맞닥뜨리는 장면이기도 하다.
신평동에는 오래된 사원 아파트가 무리 지어 있다. 1세대 주공아파트와 흡사한 5층 아파트로 살림의 흔적이 없고 외벽 페인트는 너덜너덜했다. 구 금오공대 캠퍼스도 공단 지역으로 이전해 지금은 터와 빈 건물만 남아 있었다. 두 곳 모두 젊은이가 북적이던 때도 있었다. 입주 기업들은 공장과 함께 사원 아파트를 지어 생산 인력을 유치했고, 정부는 학비뿐 아니라 기숙사비와 생필품비까지 지원해 가난한 수재들을 구미로 불러들였다. 그것은 나날이 부흥하고 번성했던 구미의 원동력이었지만 이제는 그 시대가 가버렸음을 의미하는 유적이다.
역으로 돌아가는 택시는 박정희로를 지났다. 쭉 뻗은 도로 옆에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너머로 경부선 철로가 보였다. 경부선이 깔리고 구미역이 생기기 전까지 구미는 선산군 구미면이었다. 읍으로 승격한 뒤에도 전국 최초 산업 공단인 구미1공단이 건설되기 전까진 선산읍에 미치지 못했다. 선산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쓴 곳으로 1995년에 군명을 잃고 구미시로 통합됐다. 예전의 속도는 꺾였지만 구미는 여전히 신공단과 신시가지를 건설 중이고 인구도 계속 늘고 있다. 나는 다시 구미에 올까? 어느 쪽이든 궁금하기는 할 것 같았다. 모든 시대는 역사가 되고 도시는 유적이 되기 마련이니까.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이강혁
- 글
- 이혁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