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이지만, 소백산천문대는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 없다. 소백산천문대 성언찬 대장이 찍은 이 사진들에서 이미 알아차렸을 테지만.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의 생명 나무들은 뿌리와 뿌리가 연결되는 생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지구 생태계에서도 나무들은 땅 밑에서 흙을 매개로 화학물을 분비해, 시냅스처럼 뿌리에서 뿌리로 신호를 전달한다. 시냅스는 뇌의 신경세포들을 연결하는 통로다. 신경세포 하나하나보다는, 이 신경세포들 사이의 시냅스가 얼마나 많이 연결되어 있느냐가 뇌의 기능을 좌우한다. 최근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서는 타인과 연결되어 더 크고 더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하는 인간의 특성을 주목한다.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도 타인에게 신경쓴다. 이메일, SNS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는 것조차 누군가와 연결되는 일이다. 나비족의 나무들처럼, 인간과 인간이 신경으로 연결되어 네트워크화한 것이다. 한국의 지역들 중 개별적 특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사이와 경계에 위치하며 이런 ‘연결성’을 갖는 공간으로 소백산천문대가 있다.
지역과 지역 사이 소백산천문대 초입엔 죽령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도로에 면한 죽령휴게소에서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라고 크게 쓰여있는 표지판들이 한 시야에 보인다. 소백산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 사이의 산이다. 강원도로 갈라지는 북쪽 경계에는 영월군이 있다. 오늘날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가 나뉘듯, 삼국시대에 백제, 신라, 고구려가 갈라지는 국경이었다.
땅과 하늘 사이 이제 소백산 초입에 들어서 산을 오르면, 천문대에 이르는 탐방로가 나타난다.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는 길이다. 7킬로미터에 이르는 탐방로에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그들 사이 실제 거리가 그대로 축소된 비율의 장소에 드문드문 위치한다. 태양계 탐방로의 중심인 태양은 소백산 연화봉에 놓여 있다. 자연스럽게 다른 끝 소백산 초입은 해왕성이다. 2006년에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명왕성은 쓸쓸하게도 태양계 탐방로 바깥쪽 길 건너에서 한때나마 태양계의 행성이었던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지구는 연화봉 아래편, 이 이야기의 중심인 소백산천문대에 놓여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소백산천문대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의 ‘과학과 문화예술 소통 워크숍’이 1년에 두 번 이곳에서 열린다. 서울, 수원, 안산, 대전, 부산, 포항 등 전 국토를 가러질러, 이 ‘경계’의 지역 소백산에 사람들이 모인다. 동시에 과학과 예술, 즉 분야와 분야가 만난다. 고립된 공간이기에 역설적으로 2박 3일간의 만남은 더 끈끈하다. 워크숍이 시작되면 소백산천문대장 성언창 박사가 천문대를 안내한다. 과학과 예술 강연들로 일정이 채워지고, 태양계 탐방로의 지구에서 태양까지 함께 트래킹하며, 밤에는 별을 바라본다. 운이 좋으면 실제 토성의 귀여운 고리와 목성의 또렷한 줄무늬도 볼 수 있다. 이 특별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형성되는 유대감은 참가자들의 마음에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행성과 행성 사이 소백산 초입에서는, 태양계 탐방로를 본격적으로 여는 해왕성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볼 수 있다. 행성들은 태양에 의해 끌릴 뿐 아니라, 약하게나마 서로가 서로를 끈다. 이 힘은 행성들의 운동과 궤도를 미세하게 바꾼다. 천문학자들은 천왕성이 진로에서 약간 벗어나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행성이 힘을 작용시켜 천왕성을 끌고 있는 것이었다. 해왕성은 이런 예측을 근거로 계산을 통해 발견되었다. 저 머나먼 우주 속에서도 서로를 끄는 힘, 관계를 맺고 궤도를 이탈하도록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어, 천왕성과 해왕성이 온몸의 질량으로 서로를 끌어 연결되며 서로의 존재를 불러낸 것이다. 나는 행성들도 인간처럼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 人間’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이 間’가 들어 있다. 동아시아인들은 오래전부터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체 人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間에서 연결이 일어날 때 인간이 진정 인간답다는 사실을. 소백산 천문대에서는 이 ‘사이’가 헤아려진다.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성언창
- 글
- 유지원(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겸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