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예능계에 송은이가 벌린 판

2018.04.20GQ

소외된 여성 예능인으로서 송은이는 하는 수 없이 스스로 판을 벌렸다. 그리고 몇몇 예능인이 ‘유튜버’로 주류 미디어의 뒤통수를 칠 때, 송은이는 제작자가 되어 주류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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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송은이가 김신영, 김영희, 신봉선, 안영미로 구성된 셀럽파이브 멤버들과 함께 시작한 웹 예능의 제목은 <판벌려>다. ‘판을 벌이는 여자들’의 줄임말인 이 제목은, 지금까지 송은이의 행보를 단 세 글자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예능이 내게 판을 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지? 그럼 내가 판을 벌일 수밖에. 마치 셀프 고민 상담으로 해결법을 찾아낸 듯이 송은이는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5년, 송은이가 연예계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로 꼽는 김숙이 한 예능 프로그램 타이틀 촬영 전날, 이유 없이 하차당한 뒤의 일이었다. 그해 말, 김숙이 MBC <무한도전> 예능총회에 나와 2015년 예능의 문제점은 ‘남자 판’인 점이라고 지적했지만 묵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팟캐스트 ‘비밀보장’이 화제가 되어 두 사람이 지상파 라디오인 ‘언니네 라디오’를 맡게 되고, 김숙이 <최고의 사랑>을 통해 가모장 캐릭터를 확고히 다지며 잠시나마 여성 예능의 물꼬를 튼 것이 2016년의 일이다. 그사이 송은이는 콘텐츠랩 비보를 차려 대표가 됐다. 그리고 2017년이 찾아왔다. 송은이는 그간의 기획을 제대로 된 콘텐츠로 생산해내는 데 주력했고, 팟캐스트의 한 코너였던 <김생민의 영수증>을 지상파에 편성시켰고 2017년의 예능으로 말 그대로 빵 터뜨렸다. 타이밍을 아는 송은이는 동시에 ‘더블V’로 김숙과의 콤비네이션을 이어가고, 다른 여성 코미디언 동료들과 함께 결성한 셀럽파이브를 가지고 판을 키웠다. 2018년. 언제나 한 박자 늦은 지상파가 편성표 밖에서 화제가 된 이들을 모셔가기 시작하자 송은이의 기획력과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벌어진 일은 송은이의 경력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송은이는 만 스무 살에 KBS 특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올해로 26년 차 코미디언이다. 대학 선후배 사이이자 절친한 친구인 유재석 같은 국민 MC는 아니었지만, 송은이는 부침 없이 재능 있는 MC였고, 패널이었으며, 꾸준히 TV에서 만날 수 있는 뛰어난 방송인이었다. 이제야 ‘송은이 사단’으로 불리는 여성 예능인들이 함께 모였던 <무한걸스> 방영 내내 최연장자이자 리더로 자리를 지켰다. 어디서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질문을 들어야 하지만, “내 자궁은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대답하며 안경을 쓰고 나오는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서의 송은이의 가치는 지금의 활약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지금의 송은이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경력이다. 치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음에도 날이 갈수록 입지가 좁아짐을 느끼던 비혼의 여성 코미디언이 40대가 된 후 지켜온 자리가 언제든 한순간에 남의 차지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정확히 이 다음부터 송은이의 선택이 중요하다. 누군가 밀어내면 언제든 떠나야 하는 판에 어떻게든 남아 있을 것이냐, 아니면 내 판을 만들 것이냐. 송은이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미 성공적으로 기획자로 안착한 현재의 상황에서 송은이의 기획력과 재능을 칭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송은이는 빠르게 트렌드를 읽고 시청자(청취자)의 필요를 파악하며 그 소재를 웹이라는 매체에 걸맞은 형태로 콤팩트하게 만들어낼 줄 아는 탁월한 기획자이고, 제작자다. 콘텐츠랩 비보를 시작하며 엑셀을 배워 실무에 적용할 만큼 성실하고, 양희은의 노래 ‘나영이네 냉장고’ 뮤직비디오를 연출했을 만큼 영상 연출 작업에 대한 이해도 프로 수준이다. 동시에 언제나 함께하는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영리한 진행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송은이와 김숙을 판에서 밀어낸 구조의 존재다. 결과적으로 아무리 긍정적인 상황이 되었다 한들, 이런 송은이가 왜 애초에 유재석과 같은 자리까지 갈 수 없었는가를 묻지 않고 현재의 송은이의 행보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송은이와 유재석은 비슷한 경력에 부드럽게 상대를 배려하고 언제나 시청자를 의식하는 비슷한 진행 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재석은 지난 10년 이상 국민 MC의 자리에 있었고, 송은이는 그냥 송은이였다. 현재 송은이의 재능이 이전에 없다가 길러진 것이 아님을 생각해본다면, 이 두 사람의 길이 갈린 데서 성별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친구가 국민 MC로 지상파 주요 프로그램에서 일주일 내내 활약하는 동안 송은이는 패널, 초대 손님,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커리어를 유지해왔다. 그와 김숙의 출연 프로그램은 성공한 남성 예능의 스핀오프인 경우가 많았다. 남자 중심의 예능이 성공하면 비슷한 형식의 여성 예능을 만드는 게 기존 미디어가 겨우 내주는 자리였고, 그나마도 현저히 줄어들던 시점이 바로 송은이가 새 판을 짜려고 결심한 때였다. 3년이 지난 현재의 송은이는 정확히 유재석의 대척점에 있다. 송은이가 주류 미디어 밖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지금, 어느 순간 화제성조차 가져가지 못했던 유재석의 <무한도전>은 종영을 알렸다. 송은이가 뜨자 유재석이 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건 송은이를 밀어냈고, 송은이가 ‘우리’라고 부르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잘리지 않는 일터를 만들어내게 한, 공고했던 구조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2015년 ‘남자 판’이라는 김숙의 진단을 무시하던 남자 예능인들이 ‘식스맨 되기’를 통해 라인의 끝에 설 자격을 부여하는 데 열을 올리는 동안, 송은이는 “우리끼리 하자”는 말로 김숙을 설득했고 그 설득은 결국 통했으며, ‘우리끼리’가 불가능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송은이가 유튜버가 아니라 제작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택한 것 때문에 주류 미디어와 다른 길을 선택해 성공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송은이가 제작하는 콘텐츠는 뉴 미디어 맞춤 콘텐츠로 보기는 어렵다. 송은이는 원래 해오던 예능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플랫폼만 옮겨 콘텐츠를 만들었다. 회당 5분 이하의 영상으로 끊기도록 클립 형식의 편집을 했지만 이어붙이면 바로 방송이 가능한 수준이다. 이게 바로 <김생민의 영수증>이 화제가 되자 빠르게 지상파 방송으로 옮겨 갈 수 있었던 이유다. 1인 미디어 형식으로는 기존 미디어로의 진출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버라이어티 예능 중 작은 코너의 형식으로 대규모 예산이나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수증>과 <쇼핑왕 누이>가 스몰 토크쇼 형식이라면, <판벌려>의 셀럽파이브 프로젝트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오프닝 같은 것이다. 재능 있는 코미디언들은 그 안에서 충분히 자신의 매력과 재능을 보여주고 웃길 수 있다. 송은이는 새 판만 벌인 게 아니라 그 판이 확장되어 기존 판에 연결될 수 있게 했고 더 많은 대중에게 노출되는 미디어에 여성 코미디언의 자리가 생겨날 수 있게 했다. 이게 바로 남자 판 예능이 자가 복제를 반복하고 서로 줄 세우기를 하며 밀어주고 끌어주는 동안, 그 어떤 남자의 도움도, 때 되면 남자 연예인들에게 상 주고 격려하는 방송국도 없이 송은이가 해낸 일이다.

송은이가 계속 방송을 하면서도 콘텐츠랩 비보의 일을 병행하고, 또 웹이라는 기반을 놓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많은 주목과 칭찬을 새롭게 받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 방송의 대부분은 남자 출연자가 진행하고 있고, 셀럽파이브를 비롯한 여성 코미디언들은 아직도 초대 손님이다. 미디어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기에 송은이는 대중을 만나는 창구로서, 일자리로서, 더 큰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으로서 TV가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송은이가 시작한 MBC 새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이영자 대상’이며, 올해 띄우고 싶은 예능인으로 멤버 중에서도 가장 어린 축에 드는 안영미와 박지선을 꼽은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판벌려>라는 제목에서 ‘여자’를 분명히 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송은이가 벌인 판은 동떨어진 섬이 아니다. 송은이의 판은 기존의 판에 연결된, 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같이 갈 사람으로 송은이는 여성 예능인 선후배를 택했다. 본 적 없지만 기다려온 리더의 탄생이다.

    에디터
    손기은
    윤이나(대중문화평론가)
    사진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