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을 ‘기품’의 소설로 읽기 위한 하나의 시론>으로 데뷔한 문학평론가 박준석이, 그로부터 8년 후 김애란 소설의 변화와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한다.
소설가를 거칠게나마 ‘해일러’와 ‘조개러’로 구분한다면, 김애란은 ‘조개러’라고 부를 만하다. 해일과 조개의 대비는, 아마도 짐작했겠지만, 15년 동안 수시로 호출되며 한국 여성주의 연대에 공헌한 그 말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에서 가져왔다.
해일러와 대비되는 조개러의 소설이란 뭘까.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시체가 되어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솔리니의 애인 클라라의 치마가 뒤집혀지자, 이 광경을 보며 즐거워하는 군중 사이로 누군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치마를 올려주고 자신의 허리띠로 묶어서 뒤집히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대화를 나눈 후에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나는 늘, 최소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치마를 올려주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날뛰고 소란 피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섭기도 하고. 하지만 최소한 있지, 뒤집힌 치마 정도는 바로잡아줄 줄 아는, 뭐 그게 무리라면 치마를 바로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해.” 커다란 파도는 막을 수 없어도, 그 속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잊지 않는 태도를 간직하는 것이 조개러의 소설이다.
그런데 조개러의 소설이 말하려는 내용이 조개가 해일만큼 가치가 있다는 얘기일까.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세계가 달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에게 해일만큼 중요한 일이 다른 이에게는 조개만큼 하찮을 수 있다. 이쪽의 조개가 저쪽의 해일이 되는 일도 사방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개러’의 소설에서는 굳이 조개를 해일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개는 조개만큼의 분명한 가치가 있음을 알며 해일의 자리를 노리지 않는다. 입장에 따라 가치의 상대적 무게가 달라지는 상황에서도, 그 국면의 조개를 주우며 치마를 올려주는 일에 집중한다.
2002년에 데뷔한 김애란의 소설에는 “관계에선 의도하지 않아도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끊이지 않고 변주되면서 등장한다. 그만큼 주워야 할 조개가, 올려야 할 치마가 많은 셈이다. 초기작에서 김애란의 소설은 아무래도 개인의 탈바꿈과 사회의 틀바꿈 중에서는 전자에 주목했다. 살아남는 것이 시급한 세상에서 우선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을 테니. 그럴 때 김애란의 인물들은 과잉-개인화되어 거대한 사적 영역을 갖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과소-사회화되어 작은 공적 영역을 갖고 있었다.
초기작들이 비교적 좁은 관계에 주목했다면 최근작들은 관계의 범위가 확장되었고, 상처 역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다 넓어졌다. 예전에는 ‘나’ 또는 ‘우리 세대’ 안쪽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앞세대와 뒷세대를 향해, 곁과 옆을 넘어 건너편을 향해 저만치 고개를 돌리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단편 ‘가리는 손’은 이러한 변화가 두드러지게 감지되는, 두터운 겹을 가진 소설로, 이 소설로부터 김애란의 지금에 대해 말해보면 좋겠다. 차별과 혐오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엄마와 단둘이 사는 중학생 혼혈아 소년은 어느 살인사건 현장의 목격자가 된다. 소년은 중학생들이 폐지 줍는 노인을 폭행해 숨지게 만든 사건의 동영상에 목격자로 나타난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벌써 얼마나 많은 차별과 혐오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여성 혐오, 인종 차별, 가난 혐오, 노인 혐오.
이런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뿐만이 아니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동남아라면서요.”, “재이야, 너희 아빤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야.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어. 고향집에 하인도 있었대.” 이와 같은 말들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누구를 대상화하는가. 차별과 혐오에 둘러싸인 사람이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으로 살아갈 때, 김애란은 차별과 혐오의 중첩된 지형학을 펼쳐 보이며, 독자에게 당신은 어떤 조개들을 주웠는지 묻는다. 해변에 흩어져 누구에게나 보이는 조개들뿐만 아니라, 모래에 파묻혀 보일 듯 말 듯 숨겨진 조개들까지.
인물들은 방관자, 피해자, 가해자의 자리를 옮겨가며 숨 쉬듯 차별한다. 이 차별의 피해자인 엄마는 저 차별의 가해자가 되고, 여기서 피해자의 자리에만 있을 것 같은 아들은 저기서 방관자이자 혐오의 가해자가 된다.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혐오의)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에 엄마는 목울대가 매캐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독자는 그나마 안심한다. 노인을 향한 혐오 발언을 듣고 새어나온 웃음을 손으로 가리기라도 해서. 터진 웃음이 혐오를 드러낸다면 그걸 가린 손은 일말의 부끄러움을 간직한다. 소년에게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희망은 그 ‘가리는 손’에 있을 것이다. 조개를 줍는 손은 그렇게 ‘가리는 손’이다. 희망이자 그만큼의 모순과 한계이기도 하다.
작은 것에 집중하며 큰 그림을 자제하는 ‘조개러’의 소설은 ‘바깥은 지옥’인 현실에서 어떤 쓸모가 있을까. 김애란 소설에 공감하는 마음이 세상의 현실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검증할 수 있을까? 미투 운동의 한 장면을 빌려본다. 배우 조민기가 연이은 성폭력 가해 증언 이후 자살했다. 가해자로서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선택을 했는데, 영화 <밀양>에서 가해자가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 운운한 것의 다른 버전인 셈이다. 자살은 가해자에게 처벌이 아니라 구원이다. 조민기는 가해자로서 정당한 처벌을 받고, 처벌 이후의 삶을 살아냈어야 했다. 왜냐면 처벌은 처벌받는 사람이 처벌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처벌 ‘가능한’ 존재라는 말은 가해자가 윤리적 주체라는 말이고, 그래서 그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해자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손쉬운 길 대신 정당한 처벌이라는 어려운 길에 나서는 것이다. 자살한 조민기는 그 기회를 차버렸고, 그것은 자신의 불명예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맞바꾸는 선택이다. 한국 사람들은 조민기의 자살이 그에게, 사회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미투 운동 내내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비판과 처벌은, 가해자의 인간적 모욕은 최소화하고 사회적 명예의 손실을 겨냥해야 한다. 주워야 할 조개는 이때 등장한다. 연대의 같은 전선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조민기를 향한 모멸의 언어가 들려올 때, 마치 탄핵 촛불집회에서 박근혜를 향한 여혐 발언을 듣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 소설 <가리는 손>에서 봤듯이 사람은 하나의 기울어진 판에만 서 있지 않다. 성별, 인종, 계급 등 여러 겹의 기울어진 판 위에서 이쪽에서는 아래에 있지만, 저쪽에서는 위에 있다. 다중 피해자와 가해자도 있고,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도 있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도 있다. 조민기가 얼마나 최악의 가해자로 남았는지 비판하면서, 구태여 그의 가족에게까지 상처를 더해줄 필요는 없다. 가해자 가족에 대한 한국적 모멸이라는 기울어진 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의 무능일 뿐이다.
미투 운동은 더 불타올라야 하고, 가해자에 대한 고발과 비판은 더 가열차도 좋다. 그 과정에서 조개러가 할 일은 아주 구체적인 작은 요구들에 눈감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운동의 향방 등에 관심을 쏟는 해일러에게 조개를 줍자는 요구는 일종의 사소한 내부 비판이라서, 그만큼 서로가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해일러가 도래할 미래를 선언하고 앞당기는 방식이라면, 조개러는 미래를 가능한 만큼 지금 살아내는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짧게 고쳐 말하자면, 조개를 줍는다는 것은 “앞사람이랑 싸우다가 옆 사람 때문에 다치고 상처받는 경우”를 줄이려는 노력이다. 조개를 줍는 손은 연대를 해치는 분탕질이 아니고,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우선하는 태도도 아니다. ‘우리’는 피해자를 중심에 두고서도 조개를 주울 수 있다. 이 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선택이 아니다. 비판을 하다가 모멸의 말로 들어서지 않는 마음의 습관. 매번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으려는 자제심. 김애란 소설에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 에디터
- 정우영
- 글
- 박준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