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준은 존재와 고독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빛보다 어둠이 편한, 기척 없이 움직이는 한 남자.
눈이 묘하네요. 그래요?
색이 옅어서 홍채 무늬가 보여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저처럼 눈동자가 밝은 사람은 체질적으로 햇빛이 안 맞는데요.
햇빛을 받으면 어떤데요? 힘이 빠져요. 집에선 암막 커튼 쳐놓고, 밤엔 형광등 대신 약한 불빛만 켜요.
야행성인가요? 보통 새벽 5시쯤 자고 낮 12시쯤 일어나는 리듬이에요. 밤은 오롯이 제 시간이에요. 고양이들이랑 놀다가, 적적하면 책도 들춰보고, 숨 쉬는 것도 느껴보고. 그냥 시간이 흐르게 둬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 같네요. 맞아죠. 친구도 몇몇이 전부예요. 사실 제겐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있지만, 그게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되면 좋겠단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거든요. 그냥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인 거죠.
신기할 정도로 소유욕이 없네요. 전 인맥이나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이 신기해요. 집에도 딱 있을 것만 둬요.
그런 서강준과 친구가 된 건 어떤 사람들이에요?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 벽이 높은 건 아니에요. 사람을 싫어해서 문을 닫고 있는 게 아니라 애쓰지 않는 것뿐이니까.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쓱 들어오기도 해요.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돼서, 다가서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티 안 내고 마음에만 품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들어왔을 때, 상대의 의사와 마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표현하죠.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만날 사이였으면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외롭지 않아요? 외롭지만 저한텐 당연한 거예요. 사춘기 때는 친구들을 원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을 느꼈죠. 함께 있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걸 하게 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하고. 같이 있어도 같을 수 없다는 걸 알았죠. 함께 있는 게 더 외로워서 맨날 울었어요.
이건, 기질적인 외로움 같기도 하네요. 네. 전 가정환경도 평범하고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로움을 갖고 있었어요. 사람들 속에서도 항상 공허했고, 그 공허라는 단어조차 몰랐을 때조차 늘 그랬어요. 독립적으로 커가면서 이젠 그게 저한테 당연하고 편한 게 된 거죠. 전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아요.
어린 시절 날 외롭게 하던 존재들, 타인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날 사랑해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도 이해하게 됐어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안 하게 돼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니까.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까.
소유욕 없는 서강준이 가장 동하는 건 뭔가요? 커리어도, 사랑도, 인정도 아닌 그냥 연기요. 재미있거든요. 연기에 푹 빠지면, 주변이 안 보여요.
배역에 깊게 몰입해서요? 주변을 삭제하고 내가 서 있는 이 장소, 풍경, 상황에만 빠져들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조금씩 달라졌어요. 내가 연기하는 인물과 동시에, 관객의 눈인 카메라도 여기 있잖아요. 관객들과 함께 있는 거예요. 이젠 이야기 속 나와 카메라에 담기는 내가 동시에 느껴져요. 몰입하는 동시에 객관화하는 건데, 집중하면서도 순간순간 카메라의 시선으로 내가 보여요. 신기한 경험이죠.
스스로 배우로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내성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너무 안 타고났죠. 하지만 노력하고 고통받는 만큼 성장하는 것 같아요. 어떤 배우는 아무 노력도 안 하는데 그냥 나온다고 말한대요. 전 그가 정말 타고났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긴 결국 인내가 중요한 곳이에요. 제가 타고나지 않아서, 노력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죠.
배우를 성장시키는 고통이란 어떤 건가요? 영화 <스타 이즈 본>을 보면, 잭슨이 비극적인 선택을 해요. 그는 자기 존재 자체가 고통스러운 사람이에요. 대중에게 사랑을 받지만 그 사랑과는 먼 괴리에서 오는 고통이죠. 영화에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나왔지만 저한텐 그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사실 전, 고통에 대한 얘기를 좋아하진 않아요.
어째서요? 내 고통을 남에게 전시하기 싫거든요. 방송에서는 시청자들에게 안쓰러움을 유발하고 응원 받는 ‘클리셰’ 레파토리가 많잖아요? 저는 도저히 못 꺼내겠어요. “뭐가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들엔 답하고 싶지 않죠. 사실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피부로 와 닿기 힘든 법이고, 저는 결코 이해를 바라지 않아요. 그건 나만 알고 있는 것이고, 나만 느끼고, 혼자 처리하고 싶어요.
연기의 즐거움이 그 고통을 압도한다면 좋겠네요. 다행히, 저한텐 그래요. 연기는 인간에 대한 탐구거든요. 배우는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직업이고요. 연기 공부를 하면 비평 이론이나 철학을 배우며 인간 자체에 접근하게 돼요. 전 아직 겉핥기긴 하지만. 언젠가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자아에 대해 철학자들의 이론을 논박하고 옹호하는데 흥미롭더라고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주체에 반대하고, “존재자 이전에 존재가 있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따르는 책이죠. 어느 쪽에 동의해요? 전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설득력 있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게 제가 살아온 방식 같아요. 저는 오직 제 판단만 믿거든요. 전 죽음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살만큼 살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더는 없다고 생각될 때 제 선택으로 가고 싶어요. 물론 이걸 충동적인 죽음과 혼동하면 안 되겠죠. 저는 제가 아주 온전한 상태일 때 선택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질문 뻔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서강준은 왜 사나요? 전 어떤 원동력으로 살지 않아요. 단지 살아지는 거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생각해보면 배우도 제 꿈이지, 삶의 목적은 아니죠. 지금은 연기를 하고, 언젠가는 아빠가 되고,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 살다가 제 선택으로 조용히 떠나고 싶어요. 그게 전부예요.
어쩐지 서강준의 모든 말이 좀 쓸쓸해요. 가장 밑엔 허무와 비관의 정서가 깔려 있는 것 같아요. 비관적이진 않아요. 제 안에 아픔이나 슬픔은 없어요. 기대하는 게 없어서 잘 상처받지도 않고요.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더 듣고 싶어요. 어떤 영화 좋아해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처럼, 우리 삶을 가까이서 적나라하게,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고.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도 정말 좋아해요. 진짜 사람 얘기예요.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볼 수 있는 작품은 잘 없는 것 같아요. 영화 속에 누군가를 위해 총 맞아 죽고, 피 흘리며 지키는 장면은 넘쳐나지만, 거기에서 진짜 말과 마음들은 보이지 않거든요. 전 그저 진실한 걸 좋아해요.
어떤 게 진실하다고 생각해요? 솔직한 것. 솔직하다는 건 단지 마음속 말을 다 내뱉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살면서 선의의 거짓말이나 가식, 의례적 예의도 필요하지만, 전 필요한 선까지만 지키고 다른 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솔직하게 해요. 제 마음이 원하는 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매 순간 진실하고 싶어서요? 진실하지 않기가 더 힘들어요, 저한테는. 꾸며내는 건 정말 못하거든요.
솔직하게 묻자면, 최근에 한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썩 좋진 않았죠. 아쉽진 않나요? 그게 목적이 아니니 신경 안 썼어요. 높게 나왔다면 기분은 좋았겠지만, 그건 제게 기분 좋다는 느낌을 줄 뿐이에요. 제 목표는 대중의 평가와 인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해소감과 만족감, 보람을 느끼는 거니까요. 소속사와 의견 차이가 있을 때도 있어요. 회사는 대중적으로 많이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을 권하지만, 전 마음이 가는 게 제일 중요해요.
한창 활동 중인 이십 대 배우로선 갖기 쉽지 않은 마음인데, 서강준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겠어요. 사랑은 따라올 수도 있고 영영 못 받을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사랑하는 것들을 해서 딱 그만큼의 사랑을 받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이토록 주관이 뚜렷한 서강준이 흔들리기도 하나요? 끊임없이. 마음이 소란해지면, 그냥 흔들리는 대로 맡겨요. 고층 빌딩이 바람에 흔들려도 무너지진 않잖아요?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고요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서강준이라면 그걸 티내지 않겠네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타인은 영영 날 모를 수도 있겠다.
인공지능 로봇을 연기한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의 대사가 떠오르네요. “내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보이는 대로 믿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시죠….”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니까.” 저만 아는 저도 있듯 남들이 보는 저도 저겠죠. 어쨌든 저는 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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