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스카이 캐슬] 이후의 김서형

2019.02.25GQ

김서형은 김주영을 지나칠 것이다. 김서형은 쉬지 않고 새롭다.

원 숄더 드레이프 톱, 피터 두 by 네타포르테.

벨벳 로브, 아크네 스튜디오. 벨루가 텀블러, 바카라.

레더 트렌치코트, CK 캘빈클라인. 이너 레더 브라 톱, 채뉴욕.

블랙 수트, 아바몰리. 앵클부츠, 브리아나.

원 숄더 드레이프 톱, 피터 두 by 네타포르테. 화이트 와이드 팬츠, 랄프 로렌.

레터링 브라 톱, 알렉산더 왕. 화이트 와이드 팬츠, 랄프 로렌. 화이트 에나멜 앵클부츠, 브리아나.

블랙 수트, 아바몰리.

실제로 만나니 그 무시무시하던 김주영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네요. 김서형은 좀 감성적이죠. 웃음도 눈물도 많고요. 강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역할에서 벗어나면 일부러 많이 웃으려 해요. 하지만 나도 캐릭터를 만나면서 받아오는 게 분명히 있죠. 이렇게 멋진 역할을 많이 하다 보면, 나도 멋있는 사람이 되어가요. 화면을 통해 캐릭터를 연기하는 날 보면서 그 옷태나 태도라든지, 멋짐이 몸에 익는 거예요.

<스카이 캐슬> 김주영은 하나의 아이콘이었습니다. 한 올도 남김없이 넘겨 묶은 머리, 올 블랙 수트, 새카만 두 눈, 슈베르트의 ‘마왕’을 그림자처럼 두른 여자. 존재감이 엄청났죠. 김주영은 현실에 있지만 비현실적인, 장르적인 캐릭터로 잡았어요. 다른 현실적인 캐릭터를 압도하려면 그들과 공존하지 않는 느낌이 필요했죠. 올 블랙 수트를 입기로 하고, 대본 한 권이 나오면 4시간씩 피팅하고 각 신의 감정선에 따라 소재와 재질, 디테일을 다르게 분류했어요. 박수창을 만나는 장면에선 총부리를 겨눠도 흐트러짐 없는 거짓을 보여주기 위해 가죽을 입었죠. 올백으로 묶은 헤어는 위험 부담이 있었지만 그만큼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 의상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공을 들이는 배우예요. 신에 적합한 의상을 입는 건 감정 연기에 무척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내 스스로의 만족도 중요하고요.

상대역인 염정아 배우는 김주영과 대사를 주고받을 때면 세뇌당하는 것 같았다고 했어요.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홀리는 것 같죠. 염정아 언니와 둘이 붙는 신이 제일 많았는데, 서로 매번 기가 빨린다고 했어요. 리허설 들어가기 전부터 서로 감정 이입을 해치지 않도록 많이 배려했죠. 베테랑들은 알아요. 사담을 나누다가도 표정이 딱 바뀌어. 그럼 바로 알아채고 말을 안 걸죠.

톤과 발성, 표정은 어떻게 연구했나요? 원래도 중저음이지만 끝음을 더 내리고, 눈꼬리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며 연기하는 느낌이었어요. 상대 배역들을 압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래서 대사를 밀 듯이 했어요. 호흡을 계속 밀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사람은 몰리는 기분이 들어요. 제압하듯 위화감을 주는 거죠. 누군가를 볼 때도 노려보지 않고 지그시 쳐다봤어요. 김주영은 그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니까요.

센 악역을 많이 맡아왔어요. 익히 알려진 <아내의 유혹> 신애리뿐 아니라, <악녀> 권숙, <샐러리맨 초한지> 모가비, <기황후> 황태후까지. “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라며 도발하던 신애리는 늘 고개를 치켜들고 숙이지 않았죠. 전 그들의 태생과 과거, 어떻게 자라왔고, 여기까지 왔는지. ‘이 여자는 어릴 때 어땠을까’를 자꾸만 상상해요. 그러면 악하고 강해질 수밖에 없겠다는 연민이 들죠. 어쩌면 김서형도 신애리처럼, 모가비처럼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배우를 하겠다고 이십 년 전에 서울에 와서 겪었던 굴곡들을 생각해보면, 저 역시 더 큰 불행을 만나 어긋났더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테죠. 그렇게 캐릭터를 인정해주면 연기하기 편해져요. 물론 김주영은 살인까지 했고, 그 캐릭터의 몫까지 뛰어넘어야 해서 어렵고 외로운 지점이 있었지만요.

악녀지만, 그들 각각이 달랐죠. 경력이 쌓이면 습관처럼 나오는 연기가 많아요. 하지만 난 절대로 같은 연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에게도, 내 자신에게도 지루해지고 싶지 않거든요. 늘 스스로를 다그치며 새로운 연기에 매달리곤 했어요.

희대의 악역 신애리 이후 슬럼프가 있었다고요. 여성 배우가 악녀라는 고정된 스테레오타입이 생기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신애리로 그렇게 악을 썼는데, 계속 너무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는 거예요. 연기를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배우의 가능성을 봐줘야 하는데, 왜 같은 역할만 찾지? 반감이 생겼죠. 남자 배우들은 악역으로 빛을 봤다고 악역만 시키진 않잖아요? 살인자 했다가, 형사 했다가, 뭐든 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아내 혹은 팜므파탈 같이 한정된 역할에 가둬두죠. <스카이 캐슬> 전에 다들 그랬어요. 이 나이에 할 역할이 없다고. 그런데 삼십 대에도 그 얘긴 들었거든요.

돌이켜보면 김서형의 캐릭터는 악하거나, 강하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굿와이프>의 서명희 변호사, <어셈블리>의 홍찬미 대변인도 힘과 권위를 가진 캐릭터들이었죠. 맞아요.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전 남자들이 주로 맡곤 하는 어떤 ‘우위에 있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는 거예요. 여자라고 한쪽에 비켜서 있지 않고, 남자들 사이에 껴서 힘을 겨루고 우위에 서는 역할들. <샐러리맨 초한지>에선 회장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며 웃어도 봤죠. 그건 제 복인 것 같아요. 연기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어요.

어쩌면 미디어는 강한 여성과 악녀를, 여성의 힘과 악을 같은 궤에 놓고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현실도 그래요. 여자가 세면 기센 악녀 취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가 힘 있으면 다들 줄 서는 거죠.

멋진 선배 이미지로 여성들에게 인기 많은 것 알고 있어요? 광고에서도 활용된, 힘들어하는 후배 자리에 두통약을 쓱 두고 간 상사 느낌으로요. 그래서 십 대들이 좋아하는 건가? 이상하게 어린 친구들이 좋아해요. 선생님처럼 생각하나 봐요. 하하.

<아는 형님>에 바지 교복을 입고 나온 것도 화제였어요. 제작진에게 난 바지 입겠다고, 남자 교복을 달라고 했어요. 방송을 보면 여자 출연자들은 치마 입고 나왔다가 게임할 때는 트레이닝복을 받쳐 입더라고요. 그럴 거면 굳이 치마를 입을 필요가 없잖아요. 제작진이 여자 상의와 남자 하의를 보냈는데, 여자 교복 재킷은 짧고 타이트하고 라인이 다 들어가서 불편한 거죠. 이게 아니라고, 남자 걸 달라고 다시 부탁했어요. 난 편하게 게임하고 싶고, 그냥 그 모습이 좋다고요.

학창 시절엔 어땠요? 나를 따라 하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하하. 하지만 그보단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사람들이 좀 궁금해하는 애였어요. 그때 전 한창 방황에 심취해 있었죠. 배우가 되고 싶다는 목표는 확실한데, 지방에 있으니 어떻게 그 꿈을 이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고, 방황하면서 안으로 파고들었죠. 문학반에서 시 쓰길 좋아했어요. 생각해보면 고민 많던 그 시절이 지금의 김서형을 버티게 해주는 것 같아요.

강릉에서 보냈던 그 시절이요? 네. 학교까지 버스가 있었지만 걸어 다녔어요. 걸으면서 코스모스를 보고, 이문세 노래를 듣고, 시를 쓰고…. 어디서든 버스를 타고 내리면 바다가 보이고, 산이 보였어요. 힘들 때면 그런 게 스치듯 떠올라요. 서울 생활이 힘들 때면, 그 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때가 많았죠.

배우가 되려고 서울에 상경한 후 신애리를 만나기 전까지, 이름을 알리지 못한 시절이 있었어요. 외롭고 힘들었어요. 배우로서 해놓은 게 없어 점점 더 조급해졌죠. 목표는 있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던 거예요. 그걸 겪었기 때문에 삼십 대는 정말 열심히 살았죠. 사람들은 신애리와 김주영만 기억하지만, 전 한 해에 한 작품 이상씩 꼭 했어요. 지나가다 어머님들이 “신애리네! 요즘 왜 일 안 해?”라고 말씀하시면 그냥 넘겨도 되는 걸 “어머니, 저 일하고 있어요. <기황후> 출연 중이에요”라고 꼭 말씀드렸어요. 난 시청률이 1퍼센트가 나와도, 매니저가 없어도, 내가 그 작품에 자신이 있으면 내 돈 들여 라운딩 인터뷰를 했어요. <스카이 캐슬> 덕에 전성기가 된 건 맞을 거예요. 하지만 김서형은 계속 일 해왔어요. 스스로 등 두들겨주면서 여기까지 왔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김주영도 연기해낼 수 있었던 거죠.

그만큼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힘들었을 거예요. 다양한 역할에 갈증이 깊어 보여요. 정확해요. 사실 내가 어떤 역할이든 다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을 때, 내가 뭐든 다 잘할 진 모르겠단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기회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 치열하게 노력하겠지만, 망할 수도 있는 거예요. 저 배우 저런 연기는 안 어울려,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나이가 되고 이만큼 경력이 쌓인 배우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고, 작품과 배역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하단 거예요. ‘나 잘할 수 있어’가 아니라 못할 수 있지만, 도전해보고 잘하는지 나도 알고 싶고, 못하면 잘하려고 노력하는 나도 알고 싶은 거죠. 기사엔 “나 다른 것도 잘할 수 있으니 기회를 주세요”라고 짧게 나가지만, 그 뒤엔 이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 기회가 다른 배우들에게도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네. 모든 배우에게.

그 시절을 통과해온 지금은 어때요? 전 이십 대보다 삼십 대가, 삼십 대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지금도 고민은 많지만, 체력이 안 돼서 고민 이틀할 거 하루만 하고 말아요. 하하하. 힘든 건 여전해도 적어도 지금은 여유가 생겼거든요. 이십 대 땐 그토록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원하고 방황했고, 삼십 대 땐 잡힐 듯 말 듯 애매했고, 지금은 그걸 달걀 쥐듯이 살짝 쥐고 있어요. 더 꽉 쥐진 못하더라도, 요 정도만 살짝 쥔 상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지금은 중요한 것 같아요.

김주영 이후의 김서형은 어떨까요? 지금도 새치가 나는데 기르는 대로 염색 안 하고 내버려둬 볼까 싶어요. 머리가 하얗게 세면, 주디 덴치가 연기한 <007>의 M이나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네요.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적재적소에 독보적으로 남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늘 김혜자 배우를 존경하는 배우로 꼽아왔어요. 영화 <마더>에서의 연기는 압도적이었죠. 정말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선배님이에요. 한지민 씨랑 드라마 하시던데, 혼자 부러워했죠. 하하. 저도 선배님처럼 꾸준히, 오래 연기할 수 있었으면 해요.

14년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본 이야기인데, 퀴어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요. 지금도 그래요. 예전엔 퀴어 영화도 남성 퀴어가 주류였는데 최근 여성 퀴어 영화도 꽤 나와서 반갑죠. <캐롤>의 케이트 블란쳇 역할이나, <정사>의 이미숙 선배님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퀴어 영화나 나이 차 나는 연하남과의 멜로로 중년의 매력을 풍겨보고 싶네요. 하하. 그런 것도 재미있겠어요. 남편이 있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거.

꽤 먼 미래까지, 연애나 결혼 같은 문제는 김서형의 관심사에 끼어들 자리가 없어 보이네요. 60세, 70세가 되더라도 하고 싶으면 하겠죠. 하지만 이삼십 대 때도, 지금도, 그건 여전히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녜요. 배우로서 롱런하려는 게 내 목표니까요. 지금도 종종 이십 대 때 마음을 떠올려봐요. ‘내가 그렇게 원하고 또 원하던 게 뭐였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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