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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예감하는 순간들

2019.03.29GQ

사랑이 뭐 별 건가? 이런 사소한 순간에 우리는 사랑을 예감한다.

더러워도 좋아
아직 사귀지는 않고 그 단계로 천천히 진입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사는 곳이 가까워 같은 동네에서 만나기로 한 어느 일요일. “나 너무 귀찮아서 못 씻겠어ㅠㅠ”라는 문자에 “안 씻어도 예뻐 ㅎㅎ”라고 답했다. 사실 그냥 잘 보이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정말 씻지도 않고 유사 잠옷을 입고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해장 라면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눈가의 눈꼽을 떼주는 나를 발견했다. 더럽다는 구박 대신 라면 다발에 단무지를 올려주던 그 순간, ‘아, 이게 사랑이구나’ 느꼈다.
박지훈(사운드 엔지니어)

못생겨도 좋아
서핑을 시작했다. 비키니 입고 예쁘게 서핑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입문했지만 어지간히 실력을 쌓기 전엔 외모를 챙기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파도 속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멋까지 부릴 여유가 없다. 특히 추운 계절에 서핑을 하게 되면 외모는 사실상 포기해야한다. 후드 달린 웻수트를 입으면 인간 본연의 못생김, 내 안에 숨겨놓은 못남이 고스란히 드러나서다. 웻수트를 입고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서강준, 차은우 정도 되려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해녀복 같은 수트를 입고 라이딩을 하는 그가 순간 괜찮아보였다. 두 번째 봤을 땐 잘 생겨보였다. 이만하면 사랑 아닌가.
임은경(요가 강사)

시시콜콜해도 좋아
약간 잘난척이나 허세처럼 들리는 거 안다. 그래도 나는 ‘우리 모두는 너무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문자 메시지나 카톡은 “디자인 수정 시안 보냈습니다” 정도의 업무 용건만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고, 정말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연락하기 좀 불편하네” 라는 투정 섞인 그녀의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카톡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의 야유를 받으며 시시콜콜한 잡담 대열에 합류했다. 이게 사랑이겠지?
장재진(웹 디자이너)

싫은 것도 좋아
카페 가서 공부를 하거나 미팅을 하는 행위, 아니 그냥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는 것을 제외한 다른 행위 자체를 이해 못하는 편이었다. 아니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셨으면 얼른 일어날 것이지 수다를 떨고 진을 친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모든 장소엔 그에 맞는 목적성이 있기 때문이다. 카페 강경파인 내가 얼마 전 그 사람과 어니언 안국점에 가서 줄을 서고 인스타용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 사랑이다.
강현수(IT 개발자)

말이 많아도 좋아
‘저 친구 참 과묵해.’ 30년 넘게 내 캐릭터는 과묵이었다. 실제로 필요한 말만 하기도 했고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쑥스럽기도 했다. 온갖 종류의 모임에서 존재감도, 말수도 없는 사람으로 살던 내가 어느 날부터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게 다 지금의 연애 덕분이었다. 그 사람에게 자꾸 말을 걸고 싶고 궁금한게 많아져서 덩달아 말도 부쩍 늘었다. 그동안 안 써먹었던 언어 능력을 200% 활용 중인데, 사랑 때문이겠지?
강동오(회사원)

먼저 가도 좋아
그 사람은 걸음이 빨랐다. 본격 사귀기 전이라 손을 잡고 가기도 애매해서 같이 걷다보면 그는 늘 나보다 먼저 앞서 걸었다. 쫄래쫄래 따라가다 문득 멈춰 서서 뒷모습을 보게 됐다. 아무렇게나 꼬인 곱슬머리를 휘날리고 통 넓은 바지를 휘적 거리며 경보 하는 그 모습이 귀여워보이면서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졌다. 사랑이란…
조은주(통역가)

    에디터
    글 / 서동현(프리랜스 에디터)